# 212화.
***
살육자들이 머무는 장소로 향하는 충렬과 그 무리들. 그들은 곧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도전자들의 묘비를 보며 지나쳤다.
-앞쪽에 살육자들의 마을 있음.
-그들의 마을에서 잠을 자는 것. 효과적.
-와! 생긴 것과 다르게 몬스터가 마을에서 잠도 재워주네요!
-나도 자봄. 근데 왜 내가 지금 묘비에 글을 남기고 있을까?
-ㅁㅊ놈들아. ㅋㅋㅋㅋㅋ 깨어나면 고깃덩이 되어 있다.
-으. 도축당하는 도중에 깨어나셨나 봐요. 불쌍.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묘비 글부터. 살육자들의 마을과 관련한 내용이 적힌 글까지. 묘비의 종류는 다양했다.
-마을 규모가 제법 된다.
-베테랑 10명이서 토벌 도전했는데 실패. 전멸.
-여기 베테랑이 올 수준 아닌데. 거기다 고작 10명이서;
-무슨 배짱으로 온 거냐. 일류 정도는 되어야 비빌 만한 곳이다.
-오고 싶어서 왔겠음? 시스템이 보냈으니까 왔겠지.
묘비들을 보며 지나가던 충렬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베테랑이라.’
자신도 베테랑일 때가 있었다. 달인의 전전, 일류의 직전 단계가 바로 베테랑이었으니까. 당연히 지금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살육자들은 아마 베테랑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정도인 것 같았다. 물론 마스터인 자신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고작 베테랑을 보낼 정도라면 내가 따로 걱정해야 할 것은 없다.’
베테랑과 마스터.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해도 모자란 표현이었다.
‘우주와 티끌. 그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시스템이 괜히 직업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베테랑도 약한 위치는 아니었지만 마스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찌되었든지 그렇게 묘비들을 살피며 얼마나 나아갔을까? 마침내 저 멀리 원시적으로 지어진 움막집들이 보였다.
움막들의 크기는 사람을 위한 크기가 아니었다. 사람보다 훨씬 거대한, 살육자들을 위한 크기였다.
암흑 투기로 시야를 끌어 올렸기에, 먼 거리임에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저쪽에서는 이쪽의 접근을 알아채기가 힘들겠지만 말이다.
마침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살육자 하나가 있었다.
‘도살자랑 무척이나 닮았군.’
덩치는 도살자보다 훨씬 거대했고, 뚱뚱한 살은 재봉을 한 듯, 바늘 자국이 가득했다.
도살자에 대해 좋은 추억이 없던 충렬은 살육자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때문에 앞에서 해골 보병들과 함께 전진하던 데프론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거, 잡아 와.”
곧바로 죽여 버릴 필요는 없었다. 추후 자신의 병력이 될 녀석들이었다. 일단 놈들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
살육자들의 우두머리. 녀석의 행패가 지긋지긋했다. 때문에 사냥을 핑계로 마을을 뛰쳐나온 ‘크락’은 남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남쪽. 먹을 것 없다. 하지만 괜찮다. 잠깐 쉬다가 온다.”
우두머리가 행패를 부릴 때마다 크락은 남쪽에 있는 산맥을 애용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우두머리의 난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머무르기에는 제격이었다.
커다랗게 자리를 잡은 산맥은 오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힘들게 올라도 보상 따위는 없었다. 그렇지만 크락에게 있어서는 완벽한 휴식처였다. 어차피 자신들은 굶는다고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엄청난 식욕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을을 금방 나와 남쪽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한 후 얼마나 지났을까? 크락은 목격할 수 있었다. 달그락거리며 이동하고 있는 해골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음을.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그러나 크락은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곳은 언데드들이 살아가는 땅이었다. 간혹 스켈레톤들이 많이 지나가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서로 싸울 필요도 없었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언데드가 아닌 존재들이 나타나면 함께 싸워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크락은 그냥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움직였다. 흔히 보이는 스켈레톤이라고 하기엔 화려한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의구심은 들었다. 그렇지만 의구심은 거기까지였다. 그 외에는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녀석의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녀석의 시선은 충렬에게 향해 있었다.
“이, 인간이다!”
그렇지만 녀석은 흘러나왔던 침을 도로 집어넣었다. 인간의 주변에는 수많은 언데드들이 있었다. 아마 저 언데드들의 포로이리라. 그렇다면 건드릴 수가 없었다.
“쩝. 아깝다. 내가 못 먹는다.”
하지만 크락은 곧 이상한 기류를 파악했다. 자신을 지나치리라 생각했던 스켈레톤들. 해골 보병들이 자신을 둘러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치를 채었을 때는 이미 보병들에게 둘러싸인 뒤였다.
크락은 해골들에게 말을 걸었다.
“뭔가. 나에게 용무가 있나.”
크락의 말에 스켈레톤들이 입을 열어 말했다.
“겔겔.”
“겔겔겔.”
“겔겔겔겔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굳이 파악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할 줄 아는 듀라한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듀라한은 스켈레톤들의 사이를 헤쳐 나오더니 크락에게 말했다.
[무례하다. 그 따위 시선으로 저분을 바라보다니. 두 눈을 내리깔아라.]
듀라한의 정체는 바로 데프론이었다.
데프론은 이미 보았다. 크락의 시선이 충렬에게 가 있는 순간,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왔음을 말이다.
충렬에게만은 절대적인 존경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데프론이었다. 그래서일까? 데프론은 참지 못하고 다크 오러를 대검에 끌어 올렸다.
[내가 모시는 분께서 너를 부르니 따라오도록. 조금이라도 경거망동한다면 두 눈알을 파버리겠다.]
혹여라도 흑심을 품는다면 베어버리겠다는 듯이, 데프론은 자신보다 커다란 크락을 위협했다.
살육자라는 종족은 무척이나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언데드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크락은 듀라한의 협박에 곧바로 주저앉았다.
‘저, 저것에 베이면 죽는다!’
크락은 모르지 않았다. 다크 오러가 어떤 종류의 힘인지를. 뭐, 모르더라도 애초에 전의 따위는 상실한 상태였다.
크락의 덩치는 스켈레톤들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러나 녀석은 심상치 않은 무장을 한 해골들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숫자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의외로 영악한 두뇌를 가지고 있던 크락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두 눈알이 파지기 전에.
“시, 시키는 대로 한다! 눈알 파지 마라! 내 눈알 소중하다!”
만약 상대가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크락은 끝까지 반항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같은 언데드이고, 대화를 하려는 것 같으니 크락도 필사적인 반항은 하지 않았다.
***
충렬의 앞으로 끌려온 크락. 녀석이 앞에 도착하자마자 충렬은 암흑 투기를 서서히 드러내었다. 그러자 충렬의 몸으로부터 서늘하면서도 패도적인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프스스스!
충렬에게서 암흑 투기가 흘러나오자 의문을 품는 크락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의문은 이어질 수가 없었다. 곧 암흑 투기가 자신의 몸을 감싸오자 그만 괴로워했다.
“커헉!”
크락은 숨을 쉴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녀석의 언데드로서의 본능이 숨이 막힌 것처럼 괴로워하게 만들었다.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가 내뿜는 기세에 감히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얼음에 속박된 것처럼, 크락은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덩치에 맞지 않게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렸는지, 크락은 애처롭게 용서를 빌었다.
“그… 그만……! 잘못했다!”
딱히 용서를 빌 내용은 없었다. 충렬은 그저 기선 제압을 시도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크락의 모습에 충렬은 만족했다.
‘다행히 완전히 멍청한 종족은 아니었군.’
살육자. 녀석들은 어느 정도의 지능과 눈치가 있어 보였다. 반응을 보니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대충 계산을 끝낸 충렬은 순식간에 암흑 투기를 거두어들였다.
파앗.
암흑 투기가 즉시 회수되자, 그때서야 숨을 몰아쉬는 크락이었다. 애초에 숨을 쉴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도 녀석은 잊어먹고 있었다. 그저 충렬이 암흑 투기를 거두어들이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고, 고맙다. 내가 미안하다. 인간으로 오해했다.”
충렬을 인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니. 인간이 맞는데 말이다.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살육자에 관해서였다. 아무래도 묘비에도 도움이 될 내용은 없었다. 충렬은 토벌이 아닌, 정복을 하러온 것이었으니까.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충렬이 입을 열었다.
“자,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
살육자와 이야기를 나눈 충렬은 녀석의 이름이 크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렬이 물어본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살육자들에 대한 정보를 녀석에게 자세히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부분들만을 캐내었다. 녀석이 말하지 않을 일은 없었다. 힘의 우위에 억눌린 녀석은, 미리 심어놓은 스파이처럼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제일 강한 놈이 대빵을 한다 이거지?”
충렬의 요약에 크락이 답했다.
“그렇다. 강한 놈이 전부 명령한다. 명령하고 싶으면 강한 놈을 직접 죽인다.”
녀석들의 사회는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우두머리가 되고 싶으면, 자신이 우두머리를 처치하면 되었다. 물론 그것은 같은 살육자들끼리의 이야기였다. 다른 이가 살육자들의 우두머리를 처치하면, 모두가 적대했다. 그때부터는 자신들과 같은 언데드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크락과 모든 이야기를 나누자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스터가 된 당신은 영지 확장을 위한 첫 도전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당신에게 맞춤 임무가 등장합니다.]
[내용: 살육자들의 마을을 정복하고, 그들을 수하로 부려라.]
[보상: 두 번째 특성 ‘네크로맨서의 계약’]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일까? 임무는 유동적으로 주어졌다.
‘그나저나 네크로맨서의 계약이 뭐지?’
특성은 분명 하나만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추가적으로 주어질 수도 있는 것인가?’
아마 그런 것 같았다.
시스템은 네크로맨서의 계약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번 보상은 임무를 승낙했을 시, 완료하기 전에 먼저 주어집니다.]
[그러나 임무를 반드시 성사시켜야 합니다.]
[만약 임무에 실패한다면 당신은 마스터의 자격을 상실하고 챔피언 도전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두 번째 특성은 회수됩니다.]
[네크로맨서의 계약: 시스템의 주관하에, 세력에 속하지 않는 ‘언데드’에 한하여 계약을 진행할 수가 있다. 계약 내용은 당사자들끼리 정한다. 조건이 부합한다면 서로의 동의를 통해 계약은 이루어진다.]
설명을 끝마친 시스템은 충렬에게 물어보았다. 정확히 말해서 아직 임무는 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맞춰진 임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아도 별다른 페널티는 부과되지 않습니다.]
임무를 받아들인 후 실패했을 때, 페널티가 엄청났다. 무려 마스터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도전자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마스터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면 더 잔인한 일이었다. 운이 좋아 마스터로 수직 상승한 충렬이었다. 만약 챔피언이 되어버린다면 언제 마스터가 될지 그 기간을 계산할 수가 없었다.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득도 없다는 소리인가.’
그러나 충렬은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이건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
네크로맨서의 계약이라니. 설명을 본다면 애매모호한 특성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었다. ‘계약.’이라는 단어. 거기에 중점을 두어야 했다.
솔직히 충렬은 네크로맨서의 계약이라는 것이 없었더라도 살육자들의 마을을 정복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능력을 얻는다면 일은 더 수월해진다. 당장의 상황을 떠나 정복한 이후의 상황까지 제대로 관리할 수가 있게 된다.’
오랜만에 충렬의 잔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대략 1분 뒤. 충렬이 시스템에게 말했다.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시스템이 답했다.
[당신은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네크로맨서의 계약’을 습득합니다.]
시스템의 답변을 들은 충렬은 이제 대화의 대상을 바꾸었다. 눈앞에서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크락에게로 말이다.
“내 밑에서 일해라. 대빵으로 만들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