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타락귀
김시민이 이충렬을 어떻게 상대할지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사이, 충렬이 있는 봉우리에서의 전투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자이언트 켈드론을 제외하고 봉우리에 있는 정령들은 모조리 처치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켈드론이라는 거대한 물의 정령뿐이었지만, 녀석이 처치되는 것도 금방이었다.
아무리 공격해도 주변의 물을 이용해 재생하는 켈드론의 제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르타디아의 빙계 마법과, 레일리의 화염 마법이 조화를 이루니 녀석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켈드론은 처치되기 직전,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그러더니 더 이상은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액체로 변하며 가라앉았다. 동시에 시스템이 알려왔다.
[오염된 자이언트 켈드론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30,000카르마가 주어집니다.]
어렵지 않은 중간 보스급의 몬스터를 처치한 보상이 3만 카르마라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이 너무나 끈질겼던 탓에, 적지 않은 시간을 봉우리에서 소모하게 되었다.
‘흠… 여기서 시간을 제법 오래 끌었어.’
그래도 지금은 여유가 있었다. 타락술사를 직접 상대해 보았던 덕분이었다. 만약 상대해 보지 않았다면 골머리를 썩여야 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럼 지금부터 몰이를 시작해 볼까.’
이제부터는 남은 정령들을 천천히 처치하면서, 도망친 사냥감을 몰아 사냥할 시간이었다. 물론 그 사냥감은 바로 김시민이었다.
***
충렬이 김시민을 꾀어내기 위하여, 남아 있는 정령들을 처치하기 시작한 그 시각.
한참을 고민하던 김시민은 네크로맨서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끝마쳤다.
‘어쩔 수 없다.’
정말로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괴물들의 힘을 잠시나마 사용하는 수밖에.’
벌써 신체의 상당수를 녀석들이 장악했지만, 비록 녀석들의 장악이 가속화될지라도 지금은 그 힘을 사용해야만 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아끼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은 함정부터 먼저 파놓아야겠지. 그리고 네크로맨서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힘을 개방하는 것은 그가 도착했을 때야.’
어차피 지금 김시민이 있는 장소에는 오염된 정령이 몇몇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자신이 있는 곳으로 결국 도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
계곡을 얼마나 헤집고 다녔을까? 아르타디아가 처음 타락술사를 만나 청소하지 못한 우측 계곡마저도 모조리 정리를 했을 무렵이었다.
함께 있던 레일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흐음… 여기까지면 계곡의 모든 장소를 둘러본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일단은 계곡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아무런 말도 없다는 것은, 아직 오염된 정령들이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어쨌거나 그런 레일리의 말에 마렉이 웬일로 신중하게 의견을 내었다.
[숨겨진 공간이 있다거나 그런 것 아니야?]
아르타디아 또한 동의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곳의 장소는 무척이나 넓으니까 말이지.”
계곡이 꼭 세 갈래의 갈림길을 가진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하나.’
왜 도전자들이 묘비에서 짜증 난다는 식의 말이 많았는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오염된 정령의 처치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조금 답답한 감은 있었다. 물론 그들은 충렬과 달리 여기까지도 오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답답함도 잠시였다.
[계곡에 남아 있는 오염된 정령의 숫자가 10마리가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정령들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템은 충렬의 시야에 미니맵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정령들의 위치 또한 표시해 주었다.
‘10마리가 비슷한 지점에 모여 있군.’
그래도 10마리밖에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령들의 위치를 확인한 충렬이 입을 열었다.
“지도도 생겼으니 곧바로 이동하죠.”
그러면서 아르타디아를 향해 말했다.
“부탁합니다.”
충렬은 길게 말하지 않았으나, 아르타디아는 충렬이 무엇을 부탁한다는 것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답한 그녀가 본 드래곤으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그렇게 잠시 뒤, 본 드래곤으로 변한 아르타디아의 몸에 충렬을 포함한 네임드들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나머지 정령들을 처치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머지 정령들을 처치할 때까지 타락술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야 좋지.’
어쩌면 어렵지 않게 임무를 종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거대한 본 드래곤의 위압감이 자신을 향해 시시각각 좁혀오는 것을 김시민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충렬의 지도에 정령들이 표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시민의 지도에는 방해자들의 위치가 이제 막 표시되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아르타디아의 경우는 너무나 큰 점으로 표시되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적들이 가까워짐을 인지하고서 입을 열어 오염된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흩어져.”
그러자 오염된 정령들은 충렬의 무리가 오는 방향 외의 장소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령들을 보내자, 네크로맨서의 무리가 순간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이쪽의 움직임이 노출된 것인가.’
그렇지만 저쪽도 멈칫하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이쪽으로 계속 오고 있었다. 몇몇 작은 점들이 정령들의 뒤를 쫓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점은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네크로맨서는 드래곤과 함께 오는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상대해야 할 적의 숫자가 줄었군.’
그 모습을 본 김시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타락의 힘.”
그러자 부패의 손을 사용할 때, 심상치 않은 힘이 그의 손에 깃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의 전신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시 후, 김시민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던 괴물들의 그림이 그의 살갗을 꿰뚫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온전한 괴물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괴물들이 가진 갖가지 신체 부위들 중 일부가 튀어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은 무척이나 괴랄했다.
쩌저적.
쩌적.
쩌저저적.
거대한 거미의 다리가 그의 어깨를 뚫고 튀어나왔으며, 발톱이 날카롭게 벼려진 맹수의 앞발이 그의 허벅지를 뚫고 등장했다. 그 외에도 온갖 것들이 몸 곳곳에서 튀어나오거나, 혹은 그의 몸을 뒤덮으며 잡종과 같은 괴물로 만들어갔다.
그렇게 수차례 살이 찢어지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척이나 버티기 힘들어하는 표정이었다.
“크윽… 진행이 너무 많이 되었어.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군.”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허리를 똑바로 펴며 최대한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침착하게 만들은 김시민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네크로맨서와 그 무리를 맞이해주기 시작했다.
***
정령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본 충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한 반응이다.’
이상하긴 했다. 정령들이 왜 한 곳에 모여 있었을까? 물론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유인하기 위해서겠지.’
그럼에도 충렬은 직접 그를 상대해 주리라 했다. 그래도 보험은 잊지 않았다.
“샤오링.”
“네, 오라버니.”
“이따가 고도를 낮추면 제레미의 해골마에 함께 탑승해서 남쪽으로 도망친 정령들을 처치해.”
정령들이 온갖 방향으로 흩어지긴 했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 방향이었다. 북쪽, 서쪽, 남쪽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충렬은 샤오링에 그치지 않았다.
“데프론, 넌 헬 하운드와 함께 이동해라. 북쪽으로.”
[그리하겠습니다.]
이제 나머지 방향인 서쪽이 남아 있었다. 그 방향은 마렉에게 맡기기로 했다.
“마렉, 악티니언을 함께하게 해드릴 테니 서쪽을 맡아주십시오. 그쪽으로 간 정령의 숫자는 얼마 없으니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입니다.”
[맡겨만 주라고.]
마렉은 하늘을 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어렵지 않게 정령들의 뒤를 밟을 수 있을 터였다.
보험치고는 제법 많은 인원들을 추적조로 보내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차피 이들은 타락술사와의 전투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충렬의 암흑 투기와 같이 몸을 보호할 수단이 없다면, 타락술사와의 근접전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충렬의 미니맵이 이들과 공유되고 있었기에, 추적에 어려움은 따르지 않을 것이리라.
그렇게 잠시 뒤, 높은 고도를 날던 아르타디아가 고도를 낮추었다. 그러자 마렉은 악티니언을 안아 고도를 높여 서쪽으로 날아갔고, 충렬의 명령을 받은 나머지 네임드들은 즉시 아르타디아의 등에서 뛰어내려 각자의 길로 향했다.
결국 타락술사를 상대하러 가는 인원은 이충렬, 레일리, 아르타디아.
그렇게 총 셋이었다.
***
마렉이 향했던 서쪽길은 김시민을 지나치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높게 날았던 탓일까? 김시민은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치는 마렉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리라.
현재 김시민의 상태는 완벽한 반 괴물화 상태였다. 물론 그의 모습은 완벽한 괴물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이성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마렉을 보낸 것이었다. 상대할 적을 늘리느니, 조금이라도 적은 숫자를 상대하자는 생각에서 말이다.
‘타락의 힘을 오래 사용할 수는 없다. 내 몸이 더 먹히기 전에 네크로맨서를 끝내 버린다.’
때마침 네크로맨서도 본 드래곤, 그리고 리치와 함께 자신의 앞에 등장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단지 본 드래곤의 위에서 자신을 보더니 할 말을 잊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아르타디아의 위에 탑승한 충렬은 김시민의 모습을 보고서 말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도전자 맞아……?”
그런 충렬의 말에 레일리가 동의했다.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기가 어렵네요.”
충렬의 입장에서는 저런 흉측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아르타디아 또한 놀랍다는 말투였다.
[키메라보다 더한 것이 등장해 버렸군.]
하지만 저것은 키메라가 아님을 아르타디아는 알고 있었다. 김시민의 위에는 그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표시가 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상황을 알게 해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타락귀들의 일부분을 불러낸 타락술사 김시민>
겉으로만 보아서는 단순히 괴물들의 신체 일부분이 몸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타락귀라는 이름이 따로 있었나보다. 그렇다고 해서 귀신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하기야, 괴물과 같은 모습일지라도 그의 주변에서는 스산한 느낌의 한기가 한가득이었다.
‘괴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귀신의 종류일지도.’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김시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이, 감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군.’
과연 자신이 상대할 수가 있을까? 상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감히 측정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붙어보면 알겠지.’
마침 상대 또한 충렬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날개 같은 것이 없었는데도, 신기하게도 그의 몸은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정신은 멀쩡한 것인지, 그가 곧 아르타디아와의 고도를 맞추고서 말했다. 괴물과 같은 모습이 되어서일까? 그의 음성은 정신으로 전달되었다.
[네크로맨서라… 지금까지 본 도전자들 중에서 제일 강한 상대더군.]
그가 말을 먼저 걸어오자 충렬이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비록 적으로 만난 것은 맞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그쪽도 내가 겪어본 도전자들에 비교한다면 충분히 강해.”
충렬의 대답에 그가 아련한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같은 한국인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미안하다. 이충렬. 그 이름을 기억해 두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의외의 반응에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그렇지만 충렬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대답해 주었다.
“그러든지.”
그리고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게 나을 듯해.”
그 말은 충렬도 이곳에서 패배할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 충렬의 대답에 그가 답했다.
[그래.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후회가 없겠지. 다른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
“좋을 대로.”
그렇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충렬의 말을 마지막으로 타락술사와 네크로맨서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