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마스터-131화 (131/237)

복수의 기사 Maidenbride

데보라 시먼스 지음

도 향희 옮김

신영 장편 2003.09

복수의 이름으로 선택한 사랑! 질리안은 니콜라스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오로지 복수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다니! 그러나 입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니콜라스의 눈빛은 왜 그녀에게 다른 말을하는걸까?

 -1- 

  니콜라스 드 라시는 연회장 벽에 기대선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간해서 취하는 법이 없는 터라 지금도 정신을 말짱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판단력을 자랑하는 니콜라스에게 과음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니콜라스는 인기척이 들린 입구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갓난 아들을 안은 여동생 애슬리였다.

  헥섬이 이곳엘 발을 들여놓을 일은 두 번 다시없겠지.

  잠시 과거의 유령이 그의 기억을 헤집어 놓았다. 이미 죽어버린 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사막에서 그를 습격한 사악한 이웃, 죽어가는 그를 내버려 두고 돌아와 그의 영지를 빼앗으려던 원수는 바로 이 연회장에서 애슬리의 남편인 피에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피에르가 니콜라스에게서 복수의 기회를 빼앗아 버린 셈이 되긴 했지만.......

  니콜라스는 연회장 한가운데 놓인 묵직한 의자를 바라보았다. 바로 저 의자, 애슬리의 자리 옆에서 벌어졌던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다. 헥섬의 피도 말끔히 지워진 지 오래였다. 영원히. 이젠 니콜라스가 자신의 손으로 그 피를 흘리게 만들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그의 굶주린 영혼을 달래 줄 복수의 환희를 맛볼 기회도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후 니콜라스는 용병으로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낯선 적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그 대가로 받는 금화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이었다. 이미 막대한 부를 소유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풍요로운 영지를 지닌 그가 아니던가. 벨브리는 니콜라스 연배의 귀족이나 영주들이라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성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니콜라스에게는 즐거움을 줄 수 없었다. 벨브리로 돌아온 니콜라스는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공허함을 채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니콜라스는 무의식중에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벨브리가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을 헤맨다 한들 내 삶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가 팔레스타인의 전장을 누볐던 지난 5년 동안 애슬리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원했던 헥섬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는 이유로 매제인 피에르조차도 니콜라스는 용서할 수 없었다. 

  "오빠,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바람에 못 봤어요! 특별히 할 일이라도..."

  애슬리가 어설픈 미소를 띠며 물었다. 사랑스러운 금발의 여동생은 니콜라스가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지 몰라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나 자신도 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니....

  " 아니다. "

  니콜라스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는 투로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옆에 놓인 벤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기를 안은 애슬리가 의자에 앉았다.

  " 봐, 시빌, 니콜라스 삼촌이란다. 네 삼촌이야."

  애슬리는 니콜라스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다정한 말투로 아기를 얼렀다.

  그가 아는 애슬리는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새침한 숙녀인 동시에 유능한 안주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애정을 표현하는 법이 없었던 애슬리가 아기를 하녀에게 맡기는 대신 온종일 품에 안고 다니는 이유를 니콜라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피에르였다.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거구였지만 외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환희의 대상인 것처럼 보였다.

  "피에르!"

  애슬리가 반색을 했다.

  " 아빠가 오셨구나, 시빌!"

  애슬리는 아기의 앙증맞은 주먹을 피에르를 향해 흔들었다. 아이를 낳다가 반쯤 얼이 빠졌나? 니콜라스는 애슬리의 유치한 행동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 잠깐 삼촌한테 가 있으렴."

  애슬리가 다짜고짜 아기를 품에 밀어 넣는 바람에 니콜라스는 기겁을 했다. 작고 통통한 아이에게서는 젖먹이 특유의 냄새와 비누 향기가 풍겼다. 니콜라스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젖이라도 토하는 날엔 옷을 엉망으로 만들 텐데....... 난감해진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애슬리는 저만큼 멀어진 후였다. 

  니콜라스는 애슬리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피에르에게 안기는 광경을 보았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경정적인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역시 니콜라스의 눈에는 경박한 행동으로 비쳤다. 애슬리는 그렇다 치고 피에르까지 웬일이람.

  "으앙!"

  품에 안겨 있던 조카가 낯선 사람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 니콜라스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속히 던머로우를 떠나는 게 상책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세 식구에게 둘러싸여 있자니 자신의 삶이 더욱 쓸쓸하고 공허해지는 느낌이었다. 

  "아기 받아라!"

  니콜라스는 애슬리를 향해 아기를 내밀었다.

  "오, 이런, 시빌. 잠이 오는구나, 그렇지?"

  마치 아기가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상냥하게 타이르는 애슬리를 보자 니콜라스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애슬리의 눈에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오빠마저도. 니콜라스는 속이 뒤틀렸다.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도무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니콜라스!"

  피에르가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한 피에르의 태도는 니콜라스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다. 벨리브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주제에 감히 충고를 하려 들다니.

  던머로우는 낡은 성이었고 주민들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니콜라스의 절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속이 쓰리기 시작했지만 니콜라스는 피에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까부터 자넬 찾았어. 국왕의 전령이 도착했네. 자넬 찾는군."

  니콜라스는 재빨리 피에르의 등 뒤를 살폈다. 분명 낯선 사내가 서 있는데 왜 진작 발견하지 못했을까? 애슬리 부부의 행동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진 탓이었겠지. 니콜라스는 짜증을 참으며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어 섰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헥섬의 이웃한 벨브리를 통째로 삼키려 든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러나 헥섬이 죽고 난 후 그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피에르는 국왕 에드워드가 니콜라스에게 그 영지를 하사할 것이라고 했지만 니콜라스는 왕실을 신뢰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헥섬의 영지를 몰수하여 왕실 재산으로 삼는다고 선언해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니콜라스에게 벨브리는 무의미한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어차피 후사를 남기지 않은 헥섬이니 그 영지는 영영 헥섬 가문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별것 아닌 위안이라고나 할까. 

  "벨브리 남작인 니콜라스 드 라시 경이오?"

  왕의 전령이 물었다.

  "그렇소."

  "국왕 폐하의 전갈을 가지고 왔소."

  니콜라스는 전령에게 만찬 테이블 옆에 놓인 벤치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애슬리 부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결정이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단순한 호기심에서일까? 니콜라스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시장하실 텐데 식사를 준비할까요?"

  애슬리가 상냥하게 물었다. 니콜라스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니콜라스가 아는 애슬리는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여자였다. 아기를 낳고 난 후유증일까? 변해도 너무 변했군.

  " 감사합니다만 부인,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국왕 폐하의 전갈부터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

  전령이 니콜라스와 애슬리 부부를 번갈아 바라보면 물었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탓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니콜라스는 피에르를 향해 자리를 피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피에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보기에는 애슬리를 유약하게 만든 사람이야말로 피에르였다. 그러면서도 니콜라스로 하여금 어딘지 모르게 애슬리에게 빚을 진 듯 한 느낌을 들게 만드는 사람도 피에르였다. 그런 이유 탓에, 피에르의 친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언젠가는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할 날이 오리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니콜라스가 양보했다. 하긴 애슬리 부부가 듣는다고 해서 안 될 이유도 없지 ㅇ않은가. 

  "이쪽은 내 여동생 부부입니다."

  니콜라스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안심하시고 말씀하시지요."

  전령은 화사한 금발의 가냘픈 여인과 건장한 체격의 검은 머리 기사가 친동기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니콜라스 남매를 번갈이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은 벌써 푸짐한 저녁 식탁 앞에 가 있는지도 몰랐다. 

  "벨브리에 인접해 있는 헥섬 남작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결정되었소."

  전령의 말에 애슬리 부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저렇게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걸까? 헥섬의 영지가 누구 손에 들어가건 애슬리 부부가 신경을 쓸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자기들은 그 악당의 죽음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리지 않았던가.

  니콜라스는 전령이 읽어 내려가는 미사여구의 편지에만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에드워드의 목적은 한 가지였다. 어떤 방법을 써서건 휘하의 귀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표현한다 해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알았다, 알았어. 어서 본론이나 털어놓으시지!

  "그러므로 헥섬 남작에게 조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그대는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 두 가문과 영지의 결합을 성사시키기를 바라노라."

  니콜라스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헥섬 남작의 조카? 니콜라스의 피는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채울 수 없었던 공허감을 해결해 줄 복수의 대상이 나타난 것이다. 

  "조카라고요? 헥섬에게 조카가 있었나요?"

  비명에 가까운 애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몰랐는데....."

  "오래전에 세상을 뜬 남동생의 딸인 모양입니다."

  전령의 설명이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충격에 싸인 얼굴들을 흘끔거리며 전령은 거북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전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윽고 애슬리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오빠, 설마..... 오, 제발......."

  니콜라스는 놀라서 애슬리를 돌아보았다. 아기를 껴안은 채 꼿꼿이 서 있는 애슬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절대 안 돼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니콜라스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그러나 애슬리는 어느새 예전의 단호하고 위엄 있는 안주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오히려 니콜라스 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했을 정도였다. 

  "헥섬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애슬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 어쩌면 이미 헥섬에게 충분히 시달렸을지도 몰라요. 헥섬이 자기 아내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봐요. 탑에다 감금해 놓고....."

  참으로 애슬리답지 않은 일이었다. 저렇게 감정이 복받쳐 말을 잊지 못하다니.

  "그 가엾은 아가씨 역시 그렇게 갇혀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랬으니 내가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겠지."

  애슬리는 초조하게 전령을 향해 돌아섰다. 

  "맞아, 그랬을 거야. 지금까지 어디서 지냈다고 하던가요?"

  "줄곧 수도원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봅니다."

  "수도원?"

  애슬리가 기겁을 했다.

  "그럼 수녀란 말인가요?"

  애슬리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넓은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당신도 봤잖아요! 오빠 표정 ㅁ라이에요. 오빤 자기 신부를 죽이고 말 거예요!"

  "진정해요."

  피에르가 타일렀다. 

  "그럴 사람이 아니오. 차갑긴 해도 잔인한 사람은 아니야."

  "당신은 오빠를 안다고 생각해요?"

  애슬리가 피에르를 향해 홱 돌아섰다. 

  "아니, 난 모르겠어요. 어릴 때도 오빠처럼 말수가 적고 좀처럼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더구나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온 후로는 더 차갑고, 또......"

  애슬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전쟁이란 사람을 ㄷ라라지게 만드는 법이요, 애슬리."

 피에르의 말도 애슬리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애슬리의 머릿속은 니콜라스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오빠는 복수를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고 증오심 하나로 삶을 버텨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죄 없는 여자가 그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에드워드 국왕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오빠가 헥섬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분명 나름대로 복안이 있었을 거요. 헥섬이 죽은 후로 그나마 니콜라스가 뭔가에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잖소?"

  "맞아요. 하지만 그걸 보고 있자니 끔찍하군요."

  애슬리는 몸서리를 쳤다. 

  "에드워드 국왕은 영리한 사람이오. 함부로 그 여자를 사지에 몰아넣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요.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ㄴ그가 뒤에서 손을 쓴 결혼이 성공한 예가 있는 걸로 아는데......"

  애슬리는 걸음을 멈추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행복한 결실을 얻기까지 자신들이 겼었단 아픔 역시 얼마나 컸던가.

  "그래도 그건 경우가 다르죠. 국왕이 자기 기사들 중에서 한 사람을 고르라고 했을 때 내가 당신을 택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명령 덕분이 아니라 내가 현명하게 판단한 덕분이었어요."

  "당신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잖소."

  피에르의 신랄한 지적에 애슬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 피에르! 그래도 난 달랐어요. 이 여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일 거예요. 수녀라잖아요! 오빠가 감히 주님의 종을 학대하는 일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요. 그리고 아직 서원을 하지도 않은 사람인 모양인데, 뭘. 서원을 했다면 결혼할 수가 없잖소."

  "하지만 줄곧 수도원에서 자랐다니 남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거친지는 고사하고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지도 전혀 모를 게 아니에요! 오빠가 그 여잘 어떻게 할지!"

  "믿음을 잃지 마요, 애슬리"

  "그래야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밖에 없을 테니까요. 제발 하느님께서 그 불쌍한 종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 할 텐데."

  

  니콜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던머로우에는 손톱만큼도 미련이 없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니콜라스였지만 호위할 병력은 늘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고 여행을 떠날 준비도 항상 되어 있었다. 미래의 신부가 있다는 수도원의 위치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니콜라스는 길을 떠났다. 

  신부가 될 여자의 외모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그 여자는 적건, 추녀이건 미녀 그 여자는 헥섬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분노는 새롭게 찾아낸 복수의 대상을 향해 그를 몰아가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부하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삶을 지배해 온 인내심과 원칙을 존중하는 엄격함은 서서히 통제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니콜라스는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입고 있는 긴 겉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니콜라스가 거느리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도 몇몇은 전통적인 갑옷 차림을 싫어했다.

  "다리우스"

  생각에 빠진 나머지 그가 다가오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상대가 다리우스라면 허를 찔렸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림자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다리우스였다. 그런 재주를 두려워하는 죽들도 있었지만, 니콜라스는 그 기술이 숱하게 닥쳤던 위기에서 자신의 생명을 건져 주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시리아인 이라지만 니콜라스는 다리우스가 실제로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시리아는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사는 나라였다.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이탈리아인, 유태인, 회교도들에다 게르만족과 스칸디나비아인들까지 있었다.

  다리우스라는 이름 자체는 이집트 식이었다. 게다가 파라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다리우스에게서는 타고난 기품과 위엄이 느껴졌다. 피부가 아주 검은색도 아닌 걸 보면 혼혈이 아니가 싶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한 번도 다리우스의 과거를 물은 적이 없고 다리우스가 스스로 밝힌 적도 없었다. 몇 년 전 운명처럼 만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함께 영국으로 돌아올 때가 되자 니콜라스는 이제는 친구라도 불러도 좋을 정도가 된 다리우스에게 꼭 알려야 할 사항들만 알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구속할 어떤 맹세도 주고받지 않았고, 장래를 함께 하겠다는 언약도 하지 않았다. 또한 서로를 비판하고 꾸짖는 일도 없었다. 

  "수도원으로 간다네."

  니콜라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여자들만 모여 사는 신성한 장소야."

  다리우스가 무슨 뜻이냐는 듯 한 표정을 짓자 니콜라스가 덧붙였다.

  다리우스는 그래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산단 말인가?"

  "그래. 사진을 신에게 바치기로 맹세한 여자들이지."

  "우리가 거길 왜 간단 말인가? 그런 곳이라면 남자들을 들이지 않을 텐데........"

  "내원수의 핏줄을 찾으러 가는 걸세. 헥섬의 핏줄이 거기 있어, 다리우스.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온 걸세."

  "헥섬의 핏줄이 신에게 바쳐진 여자야?"

  "아니, 거기 살긴 하지만 그런 여자는 아닐세."

  다리우스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니콜라스는 다리우스가 종교를 갖고 있진 않지만 기독교이건 회교이건 간에 성지로 구별되는 장소들을 깊이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가? 그럼 그 여잘 어떻게 할 생각인가?"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탓도 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불확실하게만 생각되던 미래가 갑자기 갖가지 가능성을 그의 눈앞에 펼쳐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니콜라스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지만 평소의 인내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헥섬의 죽음 때문에 복수의 기회를 놓친 후 줄곧 영혼을 잃은 껍데기처럼 살아온 니콜라스로서는 즉각적인 보답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헥섬이 내게 했던 것처럼 괴로움을 겪게 해 주겠어."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말인가?"

  니콜라스는 다리우스의 빈정거림을 무시해 버렸다. 살갗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던 사막의 한낮과 뼈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던 밤과 길고 지루하던 회복기를 떠올리기 싫은 이유도 있었다.   

  "아니, 그 여자가 가장 아끼는 게 뭔지 알아낼 거야. 그래서 헥섬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걸 빼앗을 생각일세. 그 대신 그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걸 선사하겠어. 그 여자를 괴롭히는 걸로 내 즐거움을 삼겠어. 그렇게 복수할 생각이네."

  다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다리우스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고 있었다. 그의 계획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게 분명한데도 다리우스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다리우스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럼 그 여자를 죽이러 가는 건가?"

  "아니"

  니콜라스가 차갑게 웃었다.

  "결혼하러 가는 걸세."

-2-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상관없다. 이번만큼은 다스릴 필요가 없는 흥분이다. 부하들을 채근해서 불과 열흘 만에 도착한 수도원이었다. 신부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해도 좋지 않을까?

  승리는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쾌활한 젊은 기사의 삶을 망쳐 놓고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끌고 간 악령들, 긴긴 세월 동안 꿈속에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혀 온 악령들을 비로소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 손으로 복수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면 예전의 온전한 니콜라스 드 라시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등 뒤에 서 있는 다리우스를 흘끔 돌아보았다. 평소나 다름없이 다리우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그가 자신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아는 한 그 어떤 기사보다도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다리우스였다. 여자를 이요하려는 책략 따위에 동조할 리가 없었다. 니콜라스에게 어떤 식으로 복수할 셈이냐고 질문한 것만으로도 다리우스는 이미 둘 사이의 묵계를 깨뜨린 셈이었다. 니콜라스는 대답을 피했다. 앞으로의 일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 여자는 니콜라스의 아내가 될 테고, 니콜라스는 헥섬이 했던 그대로 여자에게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질리안이라고 했던가? 헥섬과 닮았다면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이겠군. 수도원에서 자랐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기 십상일 것이다. 마침 작달만한 키에 머리가 굽은 원장 수녀가 다가왔다.

  "신부가 도착하는 즉시 식을 올리겠습니다."

  니콜라스는 흥분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불가능합니다!"

  원장 수녀가 비명을 질렀다.

  "구드 신부님께서 몸이 불편한 동생을 만나러 출타 중이십니다. 다른 신부님을 찾는다 해도 가장 가까운 곳이 라튼인데, 여기서 하루는 가야 하는 걸요."

  니콜라스는 다리우스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기사를 불렀다.

  "렌프리드, 신부님을 모셔 와라."

  "알겠습니다."

  "내일까지는 도착하도록 해."

  "알았습니다."

  렌프리드가 재빨리 물러났다. 렌프리드의 뒷모습이 입구를 통해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거의 동시에 여자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질리안."

  원장 수녀의 말에 니콜라스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드디어 나타났군! 하지만 대체 어떤 여자인가?

셋 다 검은 수녀복을 입고 베일을 쓴 채 얼굴을 숙이고 있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차이점이라곤 가운데 선 여자의 키가 유난히 크다는 정도였다. 문제의 여자를 자세히 보려던 니콜라스는 자리에 앉는 여자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질리안, 그대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요."

  원장 수녀의 ㅁ라에 키가 큰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저 뻔뻔스런 여자가 문제의 질리안은 아닐 테지? 유난히 예의가 없어서 그럴 뿐이겠지?

  "국왕께서 그대를 위해 남편을 보내셨어요."

  원장 수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었던 여자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원장 수녀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는 여자의 눈에는 반항기가 가득했다. 세상에, 저런 수녀가 어디 있담.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군요. 에드워드 국왕이 제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자의 말에 니콜라스는 숨이 막혔다. 저 당돌하고 반항적인 계집에가 질리안 헥섬이라고?

  "사실이에요."

 원장 수녀가 타이르듯 대답했다.

  "백부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전언과 함께 드 라시 경과 결혼해서 영지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셨어요."

  여자는 재빨리 니콜라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뻔뻔스럽기는 하지만 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좋아, 질리안, 네 주인을 똑똑히 봐 둬라. 니콜라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자의 시선을 받았다.

  여자는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이 니콜라스를 쏘아보았다. 니콜라스는 여자가 예상보다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나이 든 여자도 아니었다. 열여덟 내지 열아홉 정도 돼 보였다. 박색은 고사하고 평범하다고 할 수도 없는 미인이었다. 얼굴 윤곽이 갸름하고 우아했다. 매끄러운 피부에 가늘고 오뚝한 코, 보기 좋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헥섬과는 달리 짙은 녹색인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여자가 돌연 경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니콜라스는 물벼락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알면서도 알리지 않으셨죠?"

  여자가 원장 수녀를 향해 내뱉었다. 지독한 절망이라고 해야 좋을지 지독한 분노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한 말투였다. 수도원에서 자랐다는 여자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게 아니라, 질리안......."

  원장 수녀가 입을 여는 동시에 다른 두 여자가 걱정스런 눈짓을 교환했다. 한바탕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듯 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심 쓰는 척하지 마세요!"

  질리안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분명 미리 알았으면서도 알리지 않았죠? 내가 달아나서 이 사기꾼한테 받을 두둑한 돈주머니를 잃게 될까 봐 겁을 낸 건가요?"

  질리안은 니콜라스를 손가락질해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기꾼? 니콜라스는 폭발 직전의 분노를 간신히 삼켰다. 아직은 정식 아내가 아닌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이를 악물고 참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아. 천천히 갚아 주지. 이 모욕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겠어.

  다른 수녀들은 기겁을 했지만 원장 수녀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질리안, 내게 있어서 금화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 진정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봐요. 오로지 그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대는 이곳에서 행복을 얻지 못했어요. 이제 새로운 삶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예요. 물리치지 마요. 주님의 축복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예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의논하셨더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죠. 내가 달아나려 할까 봐 끝까지 숨겼다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군요."

  달아나?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감히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만 하시오!"

  듣다 못한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감히 수녀가 자시의 수도원 안에서 언성을 높인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 아닌가.

  "언제 소식을 들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우린 결혼하게 될 것이고 당신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소."

  질리안이 그를 향해 홱 돌아섰다. 다른 두 수녀가 황급히 제지했지만 질리안은 매섭게 뿌리치고 니콜라스 앞에 다가왔다. 

  "천만에요."

  증오로 타오르는 녹색 눈동자를 보자 니콜라스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날 미워하는 걸까? 분노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헥섬에게 당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이젠  그 조카라는 여자의 독설까지 감당해야 하나? 질리안은 물러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니콜라스는 자기가 움직였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리우스가 팔을 붙드는 순간에야 그는 자신이 문 앞까지 질리안을 쫓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그냥 두게."

  다리우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 니콜라스는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길 잃은 돼지 새끼처럼 질리안 헥섬을 뒤쫓아 가지 않았다는 게 대견할 따름이었다.

  "용서하세요, 드 라시 경."

  원장 수녀가 애원을 했다.

  "질리안은 성질이 급합니다. 다소 고집이 세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곧 침착해질 거예요.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니콜라스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만큼 참을 수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왜 제가 온다는 사실을 진작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다면 이런 불상사는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원장 수녀는 니콜라스를 바로 보지 않고 얼굴을 돌렸다. 질리안의 말이 맞는 걸까? 나와 결혼하느니 도망치는 편을 택하겠다고?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신의 백부와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전혀 모를 텐데.......  원장 수녀 말로는 헥섬이 자신의 조카를 수도원으로 보낸 후에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질리안이 만나 본 적도 없는 백부에게 애정을 갖고 있을 리도 없는 일이 아닌가?

  멍해졌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니콜라스는 원장 수녀를 쏘아보았다. 

  "부근에 애인이라도 만들어 두었습니까? 아니면 이곳을 떠나는 걸 거부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동료라도 있나요?"

  수녀들이 기겁을 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다만 질리안 자신의 고집일 뿐이지요."

  원장 수녀의 단호한 대답을 듣자 니콜라스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무척 완고하답니다."

  다른 수녀 하나가 속삭였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따르지 않아요."

  또 다른 수녀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몹시 힘들게 살았거든요."

  처음의 수녀가 덧붙였다.

 "여기서 말입니까?"

  니콜라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와 함께 매우 빈곤한 생활을 살았다고 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백부가 우리에게 보내기 전까지요."

  원장 수녀가 설명했다.

  떠돌아다녀?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서 살았다는 겁니까?"

  "평민 집안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하녀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요."

  잘됐군. 비천한 신분의 삶도 경험했다 이거지? 그런데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렇게 고생을 했다면 내 쪽에서는 마땅히 즐거워해야 할 일인데......

  "하녀 노릇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성격으로 보이는군요."

  니콜라스가 빈정거렸다.

  "질리안은 좋은 아이입니다. 다만 수녀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뿐이지요. 어쩌면 성주의 부인 역할이 더 어울릴지도 몰라요."

  원장 수녀의 눈에 물기가 살짝 어렸다.

  니콜라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군. 니콜라스가 아는 귀부인들 중에 질리안처럼 과격하고 무례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슬리만 해도 언성 한 번 높인 적이 없는 숙녀 중의 숙녀가 아닌가.

  니콜라스는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애슬리와 그 초록 눈동자의 마녀를 비교하다니, 될 법이나 할 얘긴가. 원장 수녀는 질리안을 다스릴 수 없었을지 몰라도 니콜라스는 질리안에게 두려움이 뭔지 가르칠 자신이 있었다.

  니콜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질리안도 차라리 수도원을 그리워하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다. 아니, 차라리 농가의 부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온 질리안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짚어 보았다. 이미 저녁 기도 시간이 가까웠다. 빈자리는 금세 표가 나기 마련이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그것도 이제 겨우 수녀로 평생을 지내겠다는 결심이 선 마당에!

  갑자기 숨이 막힐 것처럼 엄격하게 통제된 수도원 생활이 오히려 천국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느새 수도원 생활에 익숙해져서 슬슬 따분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을 구속하는 수도원의 벽이 사실은 위험한 외부와 그녀를 차단해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사실 수녀로서의 삶에 잘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성스러운 부름에 응답할 만한 인내심이나 헌신적인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먹고 입고 자는 데는 불편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안전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일들로 가득 차 있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 마음 놓고 바깥출입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해야 할 만큼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거늘......

  그리고 그런 위험을 몸으로 겪었던 그녀가 아닌가. 질리안은 다급하게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해.

  공포에 싸일 때면 늘 그랬듯, 질리안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발작이 일어났던 게 언제였더라? 창자를 끊어놓을 듯 한 허기와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들던 추위, 지저분한 몸에서 풍기던 악취와 끝없는 절망.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질리안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때보다는 훨씬 성숙했고 현명해졌으니까. 잘만 하면 괜찮은 집안에 하녀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아니, 그건 안 돼. 차라리 도시로 가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게 나을 거야.

  초라한 소지품들을 대충 시트에 싼 후 질리안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먹을 것도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히 주방으로 접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아는 수녀들이 있을 테니 지금쯤은 달아날 것까지 예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유감스럽지만 그녀는 성급하고 충동적 이기로 유명했다.

  질리안은 창문을 향했다. 제법 높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따라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오래전, 질리안도 자신의 가정을 갖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아버지처럼 도박 따위로 귀한 재물을 낭비하지 않을 남편과 함께 하는 꿈을. 평범한 기사건 장사꾼이건 상관없었다. 질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꿈을 꿀 때조차도 상대가 부유하기로 이름난 드 라시 집안의 남자이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실패한 차남의 보잘것없는 딸인 자신이 벨브리의 영주와 맺어진다는 사실을 질리안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결혼 따위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만일 상대가 다정하고 관대한 남자였다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함부로 폭력을 휘둘러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두려움에 덜게 만들지 않을 남자라면.......

  질리안은 또 몸서리를 쳤다. 첫눈에도 니콜라스 드 라시는 그런 남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더구나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은 질리안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미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가 바라는 결혼이 아닌 이유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백부와의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확실한 건 그 차가운 눈빛이 불확실한 세상을 향한 모험보다 더 두렵게 느껴진다는 것뿐이다. 이미 혼자 힘으로 살아 본 적이 있으니 다시 한 번 세상과 맞닥뜨린다고 한들 대수일까! 그 눈빛을 감수하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질리안은 보따리를 바닥으로 던진 후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날렸다.

  떨어진 충격으로 질리안은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다행히 풀밭은 푹신했다. 그래도 질리안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발끝부터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몇 군데 멍이 들었겠지만 그게 전부라면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베일은 비뚤어지고 치맛자락은 말려 올라간 채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지만 그것도 상관할 바 아니었다. 얌전한 척하는 것도 이젠 끝났군. 질리안은 그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였다.

  니콜라스 드 라시는 그녀의 머리에서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부츠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놀란 질리안이 눈을 치켜뜨자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 그랬소."

  질리안은 그래도 누운 채 멍하니 니콜라스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독설이 나올 수 있다니.......

  "벨브리에서 당신이 쓸 방에는 빗장을 지르라고 해야겠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졌지만 무서운 한마디였다. 질리안은 허둥거리며 일어나 엉망이 된 치맛자락을 잡아 내렸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상대는 질리안의 당황한 모습에 만족한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질리안은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운명에 순종하시오. 내일이면 결혼식을 올리게 될 테니까."

  물론 니콜라스는 질리안을 가둬 놓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떤 여자가 그의 부하들을 이글 수 있을까. 손님용으로 배정된 방 안의 딱딱한 침상에 누운 니콜라스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내일이면 질리안 헥섬은 내 손에 들어온다.

  하지만 얼마나 유별난 여자인지! 그와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갈아입을 옷가지만 달랑 들고 탈출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다니. 한 술 더 떠서 탈출을 감행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가. 게다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그랬다가 목이라도 부러졌으면 내 꿈은 또 수포로 돌아갈 뻔했지!

  그런 무모한 시도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줘야지. 버릇을 단단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그런 꼴로 풀밭에 널브러질 수가. 두건 밑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이 마치 불꽃처럼 흩날렸지. 풀어 헤치면 어떨지 궁금하군. 매끈한 종아리를 드러내 놓고 두 다리를 벌린 모습이 마치......

  니콜라스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붉은색이면 어떻고 다리가 날씬하면 어떻단 말인가. 그에게 있어 질리안 헥섬은 복수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날이 밝으면 아내가 될 여자이지만 니콜라스는 그녀의 몸을 원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빠져 스스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꼴을 보지 않았던가.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헥섬의 핏줄이 어떤 식으로건 날 좌지우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서원을 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뿐 아니라 평생 다른 어떤 남자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살게 되겠지.

  "영주님"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지? 니콜라스는 잠시 방심했던 자신을 꾸짖었다. 그의 손은 소리 없이 허벅지 옆에 놓인 단도를 쥐고 있었다. 호신용 단도를 가까이 둔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무리 수도원 안이라고는 해도 위험은 상존하는 법이다. 어디에나 위험은 존재하며 수녀건 누구건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게 니콜라스가 터득한 진리였다.

  니콜라스는 입구 쪽을 노려보았다. 문도 커튼도 없는 어두컴컴한 입구 부근에 고개를 숙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니콜라스는 살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아뇨! 제발 그냥 거기 계십시오. 저예요. 라이트 수녑니다."

  원장 수녀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낮고 거칠었다."

  이 시간에? 뭐야, 설마 저 나이에 남자 생각이 나서 온 건 아닐 테고.......

  "뭡니까?"

  "이건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차마 얼굴을 맞대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와? 그랬다가 칼이라도 날아오면 어떻게 하려고? 차라리 자기 집무실에서 만나자고 했으면 훨씬 위엄이 서지 않았을까?

  "말씀하시지요."

  "질리안 문제예요. 그 아이를 함부로 다루지 말아 주십사해서 왔습니다."

  짜증이 솟구쳤다.

  "질리안은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더 이상 원장님께서 간섭하실 문제가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영주님.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질리안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그 아이를 차지하려 들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수녀가 할 수 있는 충고인가?

  "이름뿐인 부부로 지내란 말씀인가요?"

  "진심으로 애정을 느끼기 전까지는요."

  "가만, 내가 혼란을 일으킨 거라면 용서하십시오, 원장임. 하지만 교회는 혼인 서약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저는 다만 강간은 죄악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원장 수녀의 말투가 다소 거칠어지는 듯했다.

  "부부 사이에 강간이란 말이 어떻게 성립합니까!"

  니콜라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수녀를 상대로 이런 얘길 주고받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분의 몫이지요!"

  원장 수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원장님, 어째서 제가 질리안을 강간할 거라고 생각하셨지요?"

  니콜라스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이 질리안을 볼 때 눈빛이 증오로 타오르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부인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말문이 막힌 니콜라스가 멍청해진 것과 동시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니콜라스는 너무 놀라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아니, 이 수도원의 수녀들은 하나같이 저런 반미치광이들인가?

  니콜라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도로 침상에 누웠다. 속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원장 수녀가 그렇게까지 몰염치한 수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아내에게 손끝 하나 댈 의사가 없다는 걸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그보다 더한 계획도 있는데......

  헥섬의 부대를 전멸시키고 그를 뒤쫓을 때 이후로는 이런 승리감에 취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비겁한 녀석이 꼬리를 감추고 달아난 탓에 헥섬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니콜라스는 헥섬의 조카와 나란히 신부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이 여자가 내 손에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다. 

  질리안은 여전히 검은 수녀복 차림이었다. 옷이라곤 이것 밖에 없다는 의미인가? 하긴 수중에 가진 돈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니콜라스는 문득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이 여자가 뭘 입고 있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비단옷을 원하면 누더기를 입히고 검소한 옷차림을 원하면 호화찬란하게 휘감아 줄판인데! 니콜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머리가 니콜라스의 턱 언저리까지 오는 걸 보면 신부의 키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처음으로 신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짙은 속눈썹에 싸인 눈 위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눈썹, 매끄러운 뺨과 장밋빛 입술...... 그런데 혼인 서약을 하라는 지시를 들었을 텐데도 문제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말없이 한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질리안은 겁을 먹기는커녕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니콜라스를 올려다보았다. 감히 겁을 줄 생각이라면 어립도 없다는 듯 한 투였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질리안은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천만에, 그렇게는 못할걸. 어찌 됐거나 승복하는 수밖에 없지. 니콜라스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질리안이 고개를 돌린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질리안은 놀란 신부를 향해 고함치듯 혼인 서약을 했다.

  전장에서 단련된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니었다면 니콜라스도 어지간히 위축되었을 만한 상황이었다. 헥섬의 핏줄이 이렇게까지 강인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무의식중에 질리안의 눈치를 살피던 니콜라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리석다 보니 이런 무모한 짓도 하는 거겠지.

  의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니콜라스는 신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즉시 떠나겠습니다."

  니콜라스는 놀란 원장 수녀를 향해 내뱉었다.

  "작별 인사를 하시오."

  의외였다. 항의를 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질리안은 쌀쌀맞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둘러서 있는 수녀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질리안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 세상에!

  니콜라스는 정신을 가다듬고 원장 수녀에게 말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전 제 아내에게 손도 대지 않을 겁니다."

  원장 수녀의 반응 역시 의외였다. 안심하리라고 생각했던 원장 수녀의 주름진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원장 수녀가 깡마른 손을 내밀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오, 드 라시 경. 나도 질리안이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르셨어요."

  니콜라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마당에 질리안이 아름답고 추하고가 문제인가.

  "어젯밤에 하신 말씀과는 다르군요."

  "어젯밤이라뇨?"

  원장 수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남들 앞에서 자기가 한밤중에 니콜라스의 방을 몰래 찾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당황한 걸까?

  그러나 니콜라스를 바라보는 원장 수녀의 눈빛은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군. 니콜라스는 휙 돌아섰다.

  질리안은 자신이 타고 갈 말 옆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 그를 찾아온 사람은 원장 수녀가 아니라 질리안이었다. 원장 수녀를 가장하고 숨어 들어와 날 바보로 만들 생각이었다?

  니콜라스는 피가 끓어올랐다. 저 당돌한 빨강 머리 계집애가 감히 부부 사이의 일을 왈가왈부해? 니콜라스는 치솟는 화를 겨우 가라앉혔다. 비록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빗나간 상대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좋아, 어디 마음껏 농간을 부려 봐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니까.....

-3-

  니콜라스는 황혼 무렵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리도록 했다. 버릇없는 수녀가 말에서 내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자 니콜라스는 고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와 부하들이 그런 고행에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수도원 안에만 박혀 있었던 질리안에게는 무리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질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라면 복종의 표시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질리안의 경우에는 그저 피곤한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마 그가 나무 아래서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을 여자였다.

  참 이상야릇한 여자였지만 좋은 적수였다. 그 짧은 동안에 이미 자신의 백부와는 전혀 다른 용기를 발휘해 보이지 않았던가. 다만 한밤중에 그의 방을 찾아왔던 것만큼은 예외였다. 과연 헥섬의 핏줄다운 사악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간 그 이유만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워낙 기만과 속임수에 뛰어난 혈통을 타고난 탓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칼날을 겨눌 수도 있는 여자였다.

  니콜라스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이제 그만큼 먹었으면 됐다. 니콜라스는 앞으로 나섰다. 그건 그렇고 놀라운 식성이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키가 큰 편이지만 그렇다고 살이 찐 체격도 아닌데 먹은 건 다 어디로 갔담? 니콜라스는 이미 식사를 끝냈는데 질리안은 여전히 접시를 들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끌 수작이로군. 니콜라스는 질리안이 앉아 있는 모닥불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직 멀었소?"

  축 처져 있던 질리안의 어깨가 꼿꼿이 솟는 모습을 보고 니콜라스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고개조차 들지 않는 질리안을 보자 감탄은 짜증으로 돌변했다.

  "아직 멀었어요."

  질리안은 쌀쌀맞게 내뱉더니 손에 든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네가 거기 서 있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한 태도였다. 

  "당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이제 당신 남편이오. 내가 끝났다고 하면 끝난 거야."

  니콜라스는 질리안의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질리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굶길 생각인가요?"

  "하! 지금까지 먹은 것만으로도 며칠은 족히 견딜 것 같은데!"

  굶겨? 그것도 졸은 방법이군.

  "물론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굶기는 수도 있겠지."

  의외로 질리안은 순순히 접시를 양보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감히 날 무시하겠다는 생각인가? 그럴 수는 없지. 니콜라스는 질리안의 턱을 받쳐 들었다. 억지로라도 자신을 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의에 불타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질리안의 눈빛은 그게 아니었다.

  공포로군. 가쁜 호흡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분명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지금까지도 괜찮았는데 왜 하필....... 그 순간 니콜라스는 대답을 찾아냈다. 잠자리 때문이로군.

 자신을 보살펴 준 원장 수녀에게까지 대들고, 니콜라스의 분노에 대항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던 깜찍한 마녀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게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다. 어젯밤에 굳이 원장 수녀를 가장하고 찾아와 그를 속이려 했던 것도 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니콜라스는 심한 모욕감에 사로잡혔다. 지금껏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그였다. 사실, 평판이 자자한 드 라시 가문의 준수한 용모만으로도 필요 이상으로 여자들의 이목을 끌곤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 일단 니콜라스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들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질리안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에 부풀어 흥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어차피 목적은 질리안을 괴롭히는 것이었고, 이 당돌하고 무례한 아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자신의 의도가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질리안을 놓아주었다. 구개를 떨구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긴 하지만 질리안의 태도에서는 방금 전까지의 당당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질리안은 손가락 마디의 관절이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이 니콜라스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질리안의 양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질리안은 움찔 놀랐지만 니콜라스는 붙든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질리안이 마지못해 손가락을 펼 때까지 니콜라스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천천히 문질렀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피가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니콜라스는 손바닥에 난 붉은 자국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내가 언제 여자의 손을 이렇게 만져 본 적이 있었던가. 질리안의 손바닥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뭉툭한 손가락 끝이 적지 아니 일을 한 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질리안의 손들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라도 졸린 듯 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놀란 니콜라스는 고개를 번쩍 드는 동시에 질리안의 손을 놓아주었다. 

  "잠자리로 가시오."

  니콜라스는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길 때까지도 질리안의 따가운 시선의 뒷덜미에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질리안이 도망치듯 자신의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계집애 같으니! 니콜라스는 질리안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그렇고 난 또 왜 이 지경인가. 분명 겁을 주려고 시도한 행동이었는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다. 질리안은 그의 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해묵은 분노를 상기시키려는 니콜라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예의 속이 쓰린 증세가 시작되었다. 

  배를 움켜쥐고 뒹굴고 싶을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니콜라스는 이를 악물고 제자리를 지켰다.  

  늘 그랬듯 조금만 기다리면 가라앉을 것이다.

  "왜 강제로 취하지 않나?"

  니콜라스는 깜짝 놀라 돌아섰다. 다리우스의 목소리에 놀랐다기보다는 뜻밖의 말에 놀랐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다리우스는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일 텐데. 그렇지 않았으면 어젯밤에 자네를 찾아갔을까?"

  다리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들었나?"

  "어지간히 시끄러웠어야 말이지."

  다리우스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자네 얘길 듣고 원장 수녀가 당황하는 모습도 봤지.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하더군. 그렇지 않은가?"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리안 짓이었어."

  니콜라스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았다.

  "그럼 왜 강제로 취하지 않나? 자네 입으로 그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찾아내서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들겠다고 해놓고. 꾸물거릴 이유가 없니 않나? 그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고 해서 누가 도와줄 것도 아닌데, 아니면 다른 사람들까지 구경하길 바라는 건가?"

  니콜라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리우스가 자신의 계획을 얼마나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난 그 여자를 원하지 않아."

  "어째서? 내 고향의 여자들 같은 미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니콜라스는 그만두라는 시늉을 했다. 불타는 듯 한 초록색 눈동자와 가냘픈 손가락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쁘지는 않더군."

  "그럼 왜 원하질 않나? 프랑크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대를 이르려고 하던데?"

  "난 아이 따위는 원하지 않아! 더구나 헥섬의 더러운 피가 섞인 아이라면 더더욱! 그 못된 계집애한테 날 허락할 생각도 없고!"

  니콜라스 다리우스를 노려보았다. 다리우스는 여자 때문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맺고 끊을 때를 분명히 아는 남자였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이성적이고 용감하다는 평을 듣는 남자들조차도 여자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사내들이란 종종 머리보다 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곤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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