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
듀라한이 된 데프론. 녀석은 자아가 생겨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바닥이 울릴 정도로 세게 무릎을 꿇은 데프론이 입을 열었다. 덩치가 커져서 그럴까? 데프론의 음성은 그에 걸맞게 굵직한 소리를 울렸다. 물론 성대가 없었기에 데프론의 음성은 정신으로 전달되었다.
[저의 주인이시여. 인사를 올립니다.]
닭살이 돋는 녀석의 행동과 대사에 충렬이 제지했다.
“됐어. 일어나.”
그러자 데프론은 별다른 반문 없이 꿇었던 무릎을 다시 폈다.
[알겠습니다.]
일행들도 데프론이 변한 모습을 신기해했다. 특히나 자르딘은 충렬을 부러워했다.
“하하, 진짜 부럽습니다. 저도 소환 스킬이 있었다면…….”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와서다.
[남쪽에 위치한 마족들이 전멸하였습니다.]
이쪽에서 마족들을 끝내고 잠시 쉬는 동안, 남쪽에서도 마족들의 소탕을 성공하였나 보다.
‘하긴, 그쪽으로 간 인원이 몇인데.’
그러나 자르딘이 말을 멈춘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간 도전자들이 마족들을 소탕하는 순간, 시스템이 좋지 못한 소식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드래곤 아르타디아가 휴식을 완료하였습니다.]
[아르타디아가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 어딘가로 이동합니다.]
“벌써 휴식이 끝났다고?”
“생각 외로 휴식이 빨리 끝나는 것 같습니다.”
드래곤이 움직인 이상, 여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솔직히 아르타디아가 이쪽으로 오는 것은 상관이 없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면 문제였다.
‘동쪽과 서쪽이 걱정이군.’
아직 그곳은 마족들을 처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충렬이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드래곤은 출발했다. 드래곤이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놈들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혹여 녀석이 향한 방향을 안다고 해도 녀석보다 빨리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소리였다.
‘그래도 일단은 움직여야 하겠지.’
그렇게 시스템의 음성이 끝나자마자 충렬과 일행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
레어에서의 휴식을 끝내고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 움직인 아르타디아. 실상 그녀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남쪽에 위치한 인간들에게 브레스를 사용하라.]
머릿속을 울리는 마족의 명령. 그 명령이 자신의 육체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르타디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아아… 싫어……!’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동족들이 마족에 의해 이러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드래곤이기에 다른 동족의 처지야 관심 밖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 또한 육체의 지배권을 마족에게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에이션트급의 드래곤인 자신은 그나마 자아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미 육체는 마족의 명령에 굴복하는 신세였다.
‘고작 마족 따위에게 내가 이러한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살마저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한번 빼앗긴 육체의 주도권은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 정도로 몸 안에는 마기가 들끓었다. 방대한 마나를 지닌 드래곤 하트마저 집어 삼킬 정도로 말이다.
‘주도권을 다시 찾으려면 마족들의 기운이 더 이상 나에게 흘러오지 않아야 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당장에 마기에 잠식된 육체를 회복시키고, 마족들에게 복수를 하러 갈 터였다.
‘풀려날 수만 있다면 마족이라는 종족의 씨를 말려 버릴 텐데.’
이 세상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은 이들이 마족들이었다.
아르타디아의 마음은 그만큼 증오심으로 불탔다. 오랜 세월을 살아서 지냈던 만큼 감정에 대해서는 무미건조해할 나이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분노로 불타올랐다. 드래곤의 평정심? 그러한 것은 이미 없어진지가 오래였다.
‘만약 내가 풀려나기만 한다면 네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단 한 놈도 절대로 남기지 않아.’
자신을 포함하여 드래곤 일족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어린 드래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는 서로가 무슨 일을 하든지, 혹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관심이 없는 것이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될 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갓 태어난 드래곤인 해츨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였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도 좋았다. 해츨링은 모든 드래곤의 관심을 받는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하필 마족들은 해츨링 하나를 납치했고, 해츨링을 이용해 드래곤들을 꾀어내었다. 때문에 놈들의 마수에 의해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이러한 꼴을 당해야만 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지.’
그만큼 어린 해츨링은 드래곤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결국 해츨링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마족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상황이 발생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츨링의 목숨을 보존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드래곤이 붙잡혀 이러한 신세가 된 이후로, 해츨링은 마족들에 의하여 처절히 유린당하고 말았다.
해츨링의 심장은 놈들의 마기를 보충하는 데 쓰였으며, 해츨링의 비늘과 뼈는 놈들의 병장기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다른 드래곤들이 보는 앞에서 뼈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분해되어야만 했던 어린 해츨링.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물론 그것은 마족들이 의도한 바였다. 드래곤의 평정심을 흔들기 위해서였으니까.
어쨌거나 그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풀려나기만 한다면…….’
마족들의 본진으로 즉시 쳐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놈들을 전멸시켜 버리리라. 동시에 녀석들의 뼛조각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씹어 먹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해츨링을 죽인 놈들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자신을 이러한 꼴로 만든 녀석들에 대한 복수심이 더욱 커졌다.
‘이 원한은 절대로 잊지……!’
하지만 아르타디아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다짐과는 다르게 그녀의 정신은 점점 흐려졌던 것이다. 브레스를 사용하고 나서는 쉬어야 했는데 무리하게 움직여서일까? 그녀의 자아로 마기가 더욱 깊이 침식하기 시작했다.
‘아… 아직은 안 되는데…….’
한창 남쪽을 향해 날갯짓을 하는 아르타디아. 그녀의 시야는 그렇게 침침해져만 갔다.
사실 지금까지도 많이 버틴 것이었다. 정작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수면기에 들지 않고 정신력으로만 버틴 것도 대단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한계는 명확히 존재했다. 이 이상은 아무리 견고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버티기란 불가능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말이다.
‘아아…….’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두 눈도 짙고 어두운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육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을 유지했던 두 눈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녀에게서 드래곤의 옛 모습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어둠에 완벽히 잠식당한 한 마리의 괴물일 뿐이었다.
***
한편 남쪽에서 방금 막 마족들을 처치한 도전자들. 그들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도전자들은 마족들을 처치한 순간, 시스템이 알려온 드래곤의 움직임에 대해 안일한 반응을 보였다.
“설마 우리들한테 오는 거겠어?”
“그래, 확률은 반의반이라고.”
“조금만 쉬자. 너무 힘들어.”
그러나 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잠시 뒤,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의 주인은 바로 드래곤이었다. 뒤늦게 드래곤의 접근을 알아차린 도전자들은 당황했다.
“야… 저거 설마…….”
“헉…….”
“제기랄! 하필 왜 이쪽으로 드래곤이 온 거야!”
도전자들은 드래곤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서로간의 거리를 벌리며 흩어지려 했다. 뭉쳐 있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캠프에 있을 때도 드래곤의 브레스를 피하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두 번째로 이어지는 브레스를 감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브레스는 당장에 조금 흩어진다고 누군가는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일정 지역을 그대로 초토화시키는 것이 바로 드래곤의 브레스였으니 말이다.
처음에 충렬이 브레스를 무효화시켜서 그 강함을 체험하지 못했을 뿐. 브레스를 피하고 싶었다면 드래곤이 출발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서로가 죽어라고 흩어져서 달려야 했다.
그렇게 도전자들이 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아르타디아는 방금까지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도전자들의 머리 위에서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저, 전부 도망쳐!”
“으아악! 흩어져! 다들 흩어지라고!”
도전자들이 한창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아르타디아의 가슴팍이 힘껏 부풀어 올랐다. 주변의 모든 공기를 얼마나 빨아들였는지, 순간 도전자들이 있는 위치까지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아르타디아가 브레스를 준비하는 행동에 도전자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할! 피하기엔 글렀어! 왜 하필 내 쪽을 바라보는 거야!”
“씨발! 이쪽으로 오지 마! 저쪽으로 달리라고!”
“야, 이 새끼들아! 원거리 마법을 그냥 퍼부어! 혹시 모르잖아!”
“병신 새끼야. 저게 닿을 거리냐? 그딴 소리를 지껄일 거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달려, 이 새끼야!”
장내는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고작 드래곤이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러나 도전자들의 발악도 거기까지였다. 아르타디아가 숨을 모두 들이 쉰 순간, 도전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드래곤이 숨을 들이마시고 대략 3초간의 정적 후, 브레스를 쏘아냈기 때문이다.
곧 어둠에 물든 거대한 브레스가 도전자들을 향해 들이쳤다.
위력은 처음에 비하여 한층 떨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곳에 있는 도전자들을 전멸시키기에는 말이다.
일직선으로 짓쳐오는 드래곤의 브레스가, 순식간에 남쪽에 위치해있던 모든 도전자들을 집어삼켜 갔다.
“아악!”
“사, 살려!”
도전자들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아르타디아의 브레스에는 자비가 없었다.
콰쾅!
콰과광!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마치 개미에게 파도가 몰아치듯. 도전자들에게 드래곤의 브레스가 덮쳐갔다. 피할 장소는 없었다.
그렇게 마족들을 처치하고 나서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남쪽의 도전자들은 전멸해야만 했다.
***
아르타디아가 남쪽의 도전자들을 전멸시키는 사이, 서쪽과 동쪽의 마족들도 모두 처치되었다.
[동쪽에 위치한 마족들이 전멸하였습니다.]
[서쪽에 위치한 마족들이 전멸하였습니다.]
한창 이동을 하던 충렬과 일행들도 그 소식에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특히 자르딘은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다행히 다른 쪽도 무사히 마족들을 처치했나 봅니다.”
그의 말에 충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곧바로 드래곤의 레어로 향하죠. 다른 쪽을 지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왕찌엔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함세. 그런데 마족들이 모두 처치되어서 다행이긴 하네만. 드래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를 모르니 말일세. 그게 조금 걱정이야.”
하기야,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마족들이 모두 처치되었으니 당장에 드래곤에게 흘러들어 가는 마기의 공급은 중단이 되었을 터.
“이제부터 둘 중 하나겠군요.”
녀석이 정신을 차리던지, 아니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마기에 잠식당해 있던지. 그 둘 중에 하나의 상태로 존재하게 되리라.
만약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해도 이쪽에게 승산은 있었다. 더 이상 마기를 공급받지 못하는 드래곤은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믿을 구석은 그것이 전부인가.’
솔직히 엄청난 덩치를 가진 드래곤을 어떻게 사냥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했다.
‘일단 붙어보면 알겠지.’
그래도 우선은 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시스템도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드래곤의 레어에 도착해서 어떤 상황으로 흘러갈지 살펴야 하는 것이 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