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데프론의 몸속으로 빙의된 충렬은 생각했다.
‘굳이 힘들게 대피시킬 필요가 있을까.’
방금까지 데프론의 기억을 읽었던 충렬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지형 자체가 누군가를 탈출시키기에는 불리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마을의 입구를 제외하고는 딱히 도망치기가 힘든 산악 지대였다.
그렇다면 도망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야 했다.
‘병사들의 숫자는 정확히 30 언저리다. 잘만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데프론의 기억으로 병사들은 평범한 일반인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승산은 정말로 있었다. 문제는 데프론의 몸뚱이가 여린 소년병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충렬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병사들의 대장인 그가 데프론의 몸에 빙의한 충렬에게 말했다.
“가라. 귀찮게 하지 말고.”
그의 말을 들으며 충렬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연신 곁눈질로 주변의 병사들이 모두 떠났는지 확인했다.
‘모두 떠났군.’
충렬이 고개를 숙이고 떠나지 않자 병사들을 이끄는 대장이 으름장을 놓았다.
“가라니까?”
하지만 충렬은 떠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대장님.”
“왜?”
“보여 드릴 것이 있는데…….”
“……?”
충렬이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자 호기심을 드러내는 그였다. 그는 데프론의 몸을 차지한 충렬이 허튼짓을 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충렬이 다가가 무언가 꺼내는 시늉을 했다. 물론 진짜 꺼내었다. 그것은 바로 데프론이 가지고 있던 숏소드였다.
데프론의 덩치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때문에 깜깜한 어둠이 자리를 잡은 곳에서, 무엇을 꺼내는지 확인하기란 힘들었다. 결국 눈 깜짝할 시간에 꺼내진 숏소드가 방심한 상대의 복부를 관통했다.
푸욱!
너무나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설마 당할 줄은 몰랐던 그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지르려 했다. 더불어서 발버둥을 치려 했지만 하필 치명적인 부위를 찔린 것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크윽……! 이게 무슨……!”
그런 그에게 충렬이 대답했다.
“보여 드리려던 것은 바로 제 칼입니다. 날이 아주 반들반들하게 잘 갈려 있지 않습니까? 흐흐.”
그러면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살펴가쇼. 배웅은 나중에 해드릴게.”
그리고 복부에 박았던 숏소드를 빼내며 무방비한 상대의 목을 베었다.
서걱.
데프론의 힘이 약했던 것인지 상대방의 목은 단번에 잘리지 않았다. 그러나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베여 버린 그의 경동맥으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촤아아아아악!
동시에 하나의 시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쓰러지는 시체의 모습을 바라보며 충렬은 생각했다.
‘이미 저질렀다. 화끈하게 그냥 다 죽이자.’
그렇게 그의 시체를 뒤로하며 충렬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죽인다는 대상은 마을 주민들이 아닌, 병사들이었다.
***
병사들의 대장을 처치하자 새로운 칸이 생겨났다.
[살아 있는 마을 사람들의 수: 50명]
[남아 있는 병사들의 수: 29명]
혼자서 저 많은 병사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혼자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우선 그곳부터 가야겠군.’
지금 가려는 곳은 여기서 가까운 위치면서도 가장 도움이 될 조력자가 있는 곳이었다. 데프론의 기억을 읽고, 이미 상황을 한번 살펴본 적이 있는 충렬은 최적의 루트를 떠올렸다.
‘빨리 움직여야겠어.’
그러지 않아도 병사들이 먼저 출발한 상황이었다. 녀석들이 마을 주민들을 살해하기 전에 도착해야했다. 목적지를 정한 충렬은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
마을의 조그마한 대장간. 그곳에도 여지없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대머리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지고 있던 사내가 연신 물을 부으며 불을 끄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름을 부어서 만든 불인지, 불길은 꺼져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장장이 스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자신의 대장간이 글러먹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제길. 이미 불길을 꺼뜨리기엔 늦었어. 이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지 가봐야겠군.”
하지만 스미스가 대장간을 벗어나려는 그때였다. 이동하려는 스미스의 앞으로 병사 두 명이 다가와 길을 가로막았다. 스미스는 병사들의 등장에 의문을 품었다. 영주님의 병사가 이곳엔 갑자기 왜 나타났단 말인가?
“도와주러 온 겁니까?”
그렇지만 병사들의 답변은 스미스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다.
“크큭. 촌구석에 있는 놈들은 멍청하다니까.”
“암. 도와주러 왔지. 그 질긴 목숨. 내가 오늘 끝내도록 도와줄게.”
저들의 언행이 심상치 않았다. 스미스의 뇌리에 경고등이 울렸다. 빠르게 판단한 그는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이곳은 농기구밖에 없는 대장간이었다.
‘젠장할. 그러지 않아도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그는 어쩔 수 없이 근처에 있는 호미라도 손에 쥐었다. 그런 스미스를 향해 병사 하나가 조롱했다.
“어쭈. 그걸로 덤벼보시게?”
그리고 조롱한 병사의 동료가 품에서 숏소드를 꺼내며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내가 상대하고 올 테니까.”
그렇게 스미스를 처치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그는 뒤에서 구경하고 있을 병사에게 말했다.
“맥주 내기 어때? 1분 안에 끝내면 자네가 맥주를 사라고.”
하지만 그의 뒤에서 동료의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위화감에 그는 등을 돌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먼저였다.
털썩.
동시에 스미스의 얼굴에 당혹과 반가움이 함께 드러났다.
“데프론……?”
그때서야 혼자 남은 병사는 깜짝 놀라며 등을 돌렸다.
“뭐? 데프론?”
물론 그의 음성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간결한 동작으로 찔러오는 숏소드가 정확히 병사의 목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숏소드를 찔러가는 움직임에는 머뭇거림이 보이지 않았다.
병사는 목에 칼이 박히자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목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혈액을 게워내는 소리만 내뱉어야 했다.
“끄르륵…….”
목에 칼이 박히니 그의 말로는 너무나도 뻔했다. 곧이어 사망하게 된 병사는 직전에 죽은 동료의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병사 둘이 쓰러지자 데프론의 몸에 빙의한 충렬은 지체 없이 그들이 가진 무기를 수거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스미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충렬은 스미스에게 숏소드를 건네주며 말했다. 충렬의 입장에서는 처음 만나는 스미스였지만, 데프론의 기억을 빌려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자세한 내용은 이동하며 알려주기로 했다.
“오랜만입니다. 스미스. 시간이 없으니 일단 이동부터 하죠.”
***
방패는 따로 챙기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신속함과 은밀함이 관건이었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 빠르게, 그리고 은밀하게 이동해야 했다.
다음으로 이동할 곳은 가까이에 위치한 오두막집이었다. 그곳엔 나무꾼이 살고 있는 장소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병사들의 움직임은 매우 굼떴다. 급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분명했다. 그들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아직까지 마을 주민들의 수는 건재하다.’
얼마나 천천히 움직였는지 도리어 충렬과 스미스에게 뒤를 따라잡히는 병사들도 존재했다. 목적지인 오두막으로 도착하기 전,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병사 둘의 모습이 보였다. 충렬은 자세를 낮추며 스미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충렬의 시선을 받은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발견했다는 소리다. 둘은 앞서서 걸어가는 병사 둘의 뒤를 조심히 밟아갔다.
병사들은 뒤에서 누군가 다가온다는 사실도 모른 채 떠들었다.
“캬, 잘 타오른다. 불구경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단 말이야?”
“불구경이 재미있다고? 뭘 모르네. 내가 더 재미있는걸 알려줄까?”
그들이 신나게 떠드는 소리가 충렬과 스미스의 발걸음 소리를 가려주었다.
“여기 마을에 예쁘장한…….”
그러나 그들의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그들의 음성이 지속되기란 불가능했다.
푹!
푸욱!
그들의 뒤로 각각의 숏소드가 틀어박혔다. 그들은 자신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칼날에 의아해할 뿐이었다.
“어……?”
“으윽……!”
하지만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당했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다. 생명을 다한 병사 둘의 시체가 그 자리에 무너졌다.
털썩.
털썩.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의 시체 위를 충렬과 스미스가 지나쳤다. 지나치는 와중에 무기를 챙긴 것은 덤이었다.
***
다행히 나무꾼이 있는 곳에는 병사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방금 충렬과 스미스가 죽인 병사들이 이쪽의 담당이었나 보다. 그러나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몇의 병사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마을 주민들의 숫자도 줄어들기 시작해서다.
[살아 있는 마을 사람들의 수: 48명]
[남아 있는 병사들의 수: 25명]
충렬은 재빨리 오두막 근처를 살피며 외쳤다. 스미스도 마찬가지로 나무꾼을 찾아갔다.
“랄프아저씨! 어디계세요!”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던 그때였다. 충렬과 스미스의 시선이 닿지 않은 오두막의 건너편에서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카앙!
캉!
‘설마 전투 중인 것인가?’
방금 제거한 병사들 외에 먼저 이곳에 도착한 병사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스미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충렬과 함께 지체 없이 이동했다.
그렇게 스미스와 충렬이 오두막의 반대편에 도착했을 무렵. 고기가 도축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빨리 달려왔다고 생각했지만 들려오는 소리에 충렬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정확히는 데프론의 가슴이 불안감에 쿵쾅거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충렬은 거기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이런… 한발 늦었나!’
하지만 한발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 도축된 것은 나무꾼이 아닌, 병사였다. 병사 하나의 머리가 바이킹처럼 생긴 거구의 사내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큼지막한 도끼가 있었는데, 그걸로 병사의 목을 썰어버린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병사는 혼자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어찌되었거나 나무꾼 랄프는 충렬을 보더니 조금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적대감 자체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충렬이 입고 있는 병사의 복장 때문에 잠깐 주의를 했을 뿐이었다.
“아니, 데프론… 이게 무슨 일이더냐.”
의문이 많았던 랄프였다. 그러나 이내 함께 오는 스미스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재 마을이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짐작한 듯했다.
“그래. 데프론. 네 녀석이 이딴 쓰레기들과 함께할 리가 없지. 다른 사람들부터 살피러 가자꾸나.”
그렇게 나무꾼 랄프도 충렬에게 합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