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랜서
***
[‘랜서 32호’가 필드에 나타났습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시스템의 음성과 함께 랜서 32호가 등장했다. 녀석은 이전에 맨티스가 시작했던 장소에서 나타났다. 전체적인 외형은 사람과 비슷했다.
‘아니… 저건 그냥 사람이잖아?’
몬스터라고 부르기에는 정말로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찰랑거리는 연보랏빛의 긴 생머리는 비단과 같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옷은 입고 있지 않아서 적나라하게 몸매를 노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 벗은 상태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는 약간 창백한 색이었는데, 중요한 부위들은 검은색의 비늘이 돋아나 가려주고 있었다.
뭐,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가린 것이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거나 충렬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남자라면 거기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마음을 홀릴 정도였다.
그러나 충렬은 곧 제정신을 차려야 했다. 충렬이 그러고 있자 옆에서 샤오링이 충렬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샤오링은 랜서와 충렬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뭐 해요!”
“아, 응.”
순간 따끔함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샤오링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샤오링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상태 이상 ‘매혹’에 저항하였습니다.]
단지 쳐다본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혹에 걸렸다고?’
그래도 한번 매혹에서 벗어나니, 재차 쳐다보아도 더 이상은 끌리는 느낌은 사라졌다.
자신의 매혹에서 충렬이 벗어나자 랜서 32호가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시스템이 그러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음성이 전달되었다.
[칫.]
녀석의 아쉬움에 어이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날 어떻게 해보려고 한 거야?’
물론 이곳이 전투를 벌이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넘어가줄 의향이 조금 정도는 있었다. 저런 쭉쭉 빵빵한 미녀가 유혹한다면 어떤 사내가 감히 마다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여기는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전장이었다.
“데이트는 다음 기회에 하자고.”
충렬이 거부의 의사를 밝히자 랜서는 아쉽다는 듯이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멀리 있는데도 충렬의 말이 들렸나 보다. 그러자 그녀도 더 이상은 간을 보지 않았다. 상대가 매혹에 걸리지 않으니 곧바로 달려왔다.
달려오는 랜서를 보며 충렬은 대기하고 있는 해골들에게 명했다. 충렬의 시선은 달려오는 랜서를 향해 있었다.
“이쪽으로 도착하면 일시에 덮쳐.”
차라리 마법사들도 랜서가 가까이 다가오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아보였다. 여기서 마법을 사용해 봤자 저런 움직임이라면 적중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괜히 마법을 충전하는 시간을 날리느니 랜서가 가까워진 순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이득이었다.
***
랜서의 움직임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기민했다. 그녀가 땅을 박찰 때마다 축지법을 보는 듯 했다. 점점 좁혀오는 거리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랜서는 달려오면서 무기 하나를 소환했다.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던 그녀의 손으로, 이글거리는 주황색의 창이 공간을 찢으며 나왔다. 친절하게도 시스템은 그 무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랜서 32호’가 마법 무기 ‘불의 심판’을 소환하였습니다.]
[‘불의 심판’에 당한 상처는 순식간에 타들어가며 대상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음성을 듣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랜서가 코앞까지 도착하기 직전이어서다. 그런 랜서를 향해 해골들이 달려들었다. 충렬과 샤오링은 해골들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랜서를 향한 돌진은 곧 멈추어야 했다.
[랜서 32호가 궁극기 ‘반월 베기’를 사용합니다.]
궁극기라고?
‘보통 궁극기는 마지막에 사용하지 않나?’
하지만 잡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랜서가 들고 있던 창을 허공에다가 가로로 휘둘렀기 때문이다. 단순히 휘두르기만 했다면 겁낼 것이 없었다. 그러나 휘두른 무기의 끝에서 붉은 선이 생성되더니 이쪽으로 덮쳐왔다. 타원으로 생긴 그 선은 점점 크기를 불려갔다. 전방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우우우웅!
반월의 형체는 삽시간에 들이쳤다. 그래서일까? 용맹하게 선두를 지키고 있던 데프론이 피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적중되었다. 데프론은 당하자마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야 했다. 분리되기만 했다면 마렉의 스킬로 복구가 될 터였다. 그렇지만 랜서의 공격에 당한 데프론은 복구될 수가 없었다.
[<해골 부분대장 데프론>이 반월 베기에 당하여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습니다.]
[‘불의 심판’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해골 부분대장 데프론>이 불타오릅니다.]
동시에 반으로 갈라진 데프론의 몸뚱이가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프론의 뼈다귀는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한 채로 역소환이 되어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반월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때문에 다른 해골들도 마찬가지로 앞에 위치하던 순서대로 역소환을 당해야만 했다.
[<해골 보병1>이 역소환되었습니다.]
[<해골 보병2>가…….]
해골들 중에서 움직임이 빠른 보병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일리를 포함한 마렉과 마법사들도 랜서의 공격을 회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역소환이 된 해골은 레일리였다.
…
[<마법 조장 레일리>가 역소환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앞에 있던 해골들이 모조리 전멸해 버렸다. 과연 궁극기라고 칭할 만했다.
‘엄청나잖아.’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해골들을 전멸시킨 그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렬은 자신의 몸도 반쪽이 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우선은 반응하지 못한 샤오링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바로 바닥으로 쓰러지며 외쳤다. 밀착되면서 샤오링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샤오링은 괜찮겠지만 이대로라면 헬 하운드의 상태가 가볍게 끝나지만은 않을 터였다.
“헬 하운드! 문양으로 돌아와!”
다행히 뒤에서 따라오던 헬 하운드는 늦지 않게 빛으로 화하며 곧장 충렬의 왼팔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반월 베기는 충렬과 샤오링의 머리위로 무서운 소리를 내며 지나쳤다.
쉬이이이익!
간발의 차이로 게임 오버가 될 뻔했던 충렬은 욕을 한바가지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기랄. 더럽게 소름끼치네.’
그래도 궁극기라고 했으니 당장에 똑같은 스킬을 쓰지는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랜서 32호의 반월 베기 쿨타임이 3분 남았습니다.]
만약 저 스킬을 마구 난사할 수가 있었다면.
‘여기가 내 무덤이 되었겠지.’
충렬은 자신의 품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샤오링을 향해 말했다.
“샤오링! 가서 잠시만 시간을 끌어줘!”
충렬의 품에서 잠시나마 멍하니 있던 샤오링은 갑작스런 고함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무언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 네!”
그러거나 말거나 충렬은 샤오링을 품에서 놓아주고 곧바로 일어섰다. 그리고 스킬을 사용해 나갔다.
“해골 병력 소……!”
그러나 충렬은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충렬이 스킬을 사용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랜서가 창을 던진 것이었다.
랜서의 창은 바람을 가르고 순식간에 짓쳐들었다.
쉬이이이이익!
‘제기랄!’
하는 수 없었다. 지금은 스킬의 사용을 취소하고 뒤로 물러날 때였다. 충렬이 뒤로 물러나자 방금까지 있던 땅위로 창이 꽂혔다.
푸욱!
심지어 마법무기의 기능이었는지, 랜서가 던진 불의 심판은 스슥하고 사라졌다. 그러더니 다시금 랜서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겠군.’
근접전이 전공은 아니었지만 그 외에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킬 사용의 타이밍을 놓친 이상, 다시 스킬을 사용하기엔 이미 늦었다.
‘스킬을 사용해서 허점을 보여주는 순간 랜서가 던진 창에 사망한다.’
샤오링이 직접 랜서를 상대한다고 해도 소환 스킬을 쉽사리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약간이라도 지친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어떻게 당할지 몰랐다.
그러니 소환 스킬을 사용하기엔 당장에 무리였다. 헬 하운드도 꺼낼 수는 없었다. 저런 무식한 무기인 불의 심판에 조금이라도 당한다면, 간신히 얻은 탈것이 증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충렬은 곧바로 본 완드를 집어넣었다. 어떻게 전투를 이끌어갈지 마음을 정한 충렬이, 정령의 주머니에 보관된 아이템을 하나 꺼내었다.
‘당장에 사용할 무기가…….’
있었다. 이전에 머더러를 처치하며 손에 넣은 무기였다.
[‘본 완드’를 정령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강철의 글라디우스’를 장착합니다.]
그래도 무턱대고 근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믿을 만한 구석은 있었다. 바로 라이프 드레인과 시체 폭파다.
‘현재는 그것들을 믿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시체 폭파는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스킬을 사용한 당사자를 포함해 아군까지 휘말릴 수가 있었다.
말 그대로 폭파였다. 예를 들어서 폭탄이 코앞에서 터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휘말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맨티스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도 그러한 점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전장에는 충렬과 샤오링, 그리고 랜서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정확한 타이밍을 계산해야 했다.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주어야 했다.
‘특히나 조금이라도 더 강한 대미지를 주려면 폭파의 중심지로 랜서를 끌어들여야 한다.’
지금 근처에 있는 시체는 총 4구였다.
머리가 터져서 죽은 폴로, 케이, 팜의 시체와 그레이트 웜의 시체. 그렇게 4구가 전부였다. 맨티스들의 시체는 하운드가 먹어버려서 없었고, 레이너 등의 시체는 웜의 위액에 녹아버렸다. 데프론 등의 해골들은 죽을 때 뼈다귀 채로 역소환이 되니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일전에 마르바스를 사냥할 때 사용된 해골들은 역소환이 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뼈다귀를 사용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이 외에 사용할 시체가 없었다.
‘힘들겠지만 상관은 없다. 이빨이 없다면 잇몸으로라도 씹어갈 뿐.’
그 어느 때보다도 상황은 무척이나 열악했다. 그렇다고 굴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충렬은 글라디우스의 손잡이를 한 손에 꽉 쥐고 뒤따랐다. 앞서서 랜서를 막아가고 있는 샤오링에게 합류해 나간 것이다.
***
달려오는 랜서를 충렬보다 앞서 마주해 준 사람은 샤오링이었다. 랜서는 샤오링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자 조소를 흘렸다. 단순한 조소는 아니었다. 가시가 가득 박힌 분노가 함축되어 있었다. 랜서는 샤오링이 충렬의 상태 이상을 풀어준 것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샤오링의 육체는 연령에 비해 성숙해 있었다. 그렇지만 랜서는 괜히 시비를 걸만한 내용이 없자 샤오링이 어리다는 점을 강조했다.
[후후. 자라다가 만 꼬마야. 네 덕분에 일이 어렵게 돌아갔네?]
그런 랜서의 말에 샤오링이 대답해 주었다. 살짝 웃으며 말하는 샤오링의 얼굴은 매우 순수해 보였다. 물론 그 입에서는 순수함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이전에 충렬과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게 랜서를 대하는 샤오링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게 평소에 좀 꾸미고 다니지 그랬어요. 그렇게 하고 다니니까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지.”
샤오링이 지적한 것은 야시시한 랜서의 차림새였다.
너무나 여유롭게 자신의 말을 되받아쳤기 때문일까? 랜서의 눈빛에는 분하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말로는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는지, 랜서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시끄러워! 이 언니에게 그냥 죽어주렴!]
동시에 랜서는 샤오링에게 뛰어들었다. 뛰어든 랜서가 점프한 만큼 그대로 ‘불의 심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샤오링은 당연히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창을 막아갔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검으로 올려친 것이다.
검황의 특성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샤오링은 랜서와의 공방에서 당장에는 밀리지 않는 실적을 보여주었다. 당장 랜서의 움직임에 반응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아압!”
그렇게 창과 검이 부딪치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