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시스템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고 욕심을 부린 결과, 물러설 수 없는 전투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이전까지는 장난기 가득했던 충렬이었다. 하지만 막상 진짜로 목숨이 걸린다고 생각하니 표정에서 더 이상 장난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진지함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충렬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외쳤다.
“시작해!”
악마 ‘마르바스’가 등장하자마자 충렬은 기사를 시켜 스킬을 사용하게 했다. 만약 도발이 먹힌다면.
‘어느 정도는 놈을 공략하기가 쉬워질 터.’
도발이 걸린다는 가정 하에 충렬이 다양한 경우의 수를 떠올릴 사이였다. 명령을 받은 기사가 스킬을 사용했다.
[<해골 기사1>이 ‘광역 도발’을 시전합니다.]
그러나 해골 기사의 도발은 통하지 않았다. 98%나 약화된 복제품과 같은 존재라고는 하나, ‘마르바스’는 결코 저급한 존재가 아니었던 탓이다. 아무리 온갖 제약이 주어졌다고는 해도 악마는 역시나 강력하기가 그지없었다. 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었는데도 자동으로 해골 기사의 도발을 무효화시켰다.
[‘마르바스’에게 도발의 효과를 적용하기에는 <해골 기사1>의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마르바스’가 도발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발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로 삼을 때가 아니었다. 분명히 이성적인 부분에 제약을 받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충렬을 보더니 곧바로 돌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바스는 악마 추종자들과는 다른 행동 패턴을 보였다.
[‘마르바스’가 본능적으로 도전자 ‘이충렬’을 제거해야 함을 인식합니다.]
[‘마르바스’가 땅을 박찹니다.]
본능만 남겨두었다고 해도 녀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충렬만 쓰러뜨린다면 자신의 승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르바스는 도살자처럼 비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커다란 덩치로 인해 움직일 때마다 큰 소리를 울렸다. 물론 녀석이 움직이는 속도는 도살자보다 훨씬 빨랐다.
쿵! 쿵! 쿵! 쿵!
충렬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4m의 악마를 보면서 재빨리 몸을 뒤로 빼내었다. 놈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오고 있었다. 주변에 해골들을 무시하고 곧장 이쪽으로 오다니. 이러다간 외통수가 되기 직전이었다. 저런 녀석과 근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충렬도 자신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기는 했다. 네크로맨서의 무기인 본 완드가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때려본다 한들 놈을 처치할 수는 없었다.
‘제기랄!’
충렬이 뒤로 몸을 빼는 동안, 중간에 해골 기사 하나가 마르바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해골 기사10>이 ‘마르바스’의 앞을…….]
그러나 시스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르바스는 해골 기사를 그대로 걷어찼다. 얼마나 강했는지 퍽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그보다 강력한 소리가 울렸다. 대포를 쏘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울린 것이다. 마르바스의 발이 해골 기사와 부딪치자 주변의 공기가 터져 나갔다.
퍼엉!
무언가 하지도 못하고 허공을 날아가는 해골 기사였다. 도대체 얼마나 파괴력이 강한 것이었을까? 허공으로 올라간 해골 기사의 몸뚱이가 추락하려 할 때는, 이미 모든 뼈다귀가 분리되어있었다. 그 때문인지 뼛조각들은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후두두두두둑.
그와 함께 시스템은 해골 기사의 사망을 알려왔다.
[<해골 기사10>이 파괴되었습니다.]
놈을 막기 위해 해골 기사만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다른 해골들도 서로가 마르바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대거 참여를 했다.
[<해골 보병40>이…….]
[<해골 농민149>가…….]
[<해골 농민150>이…….]
[<해골 보병39>가…….]
하지만 기사도 막지 못했던 놈을, 보병과 농민들이 막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마르바스의 발길질 몇 번에 해골들이 무기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펑!
퍼벙!
펑!
이내 주변은 뼈들의 소나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해골 보병40>이 파괴됩니다.]
[<해골 농민149>가 박살 났습니다.]
[<해골 농민150>이 무너집니다.]
[<해골 보병39>가 파괴되었습니다.]
기사를 포함한 해골 다섯 구가 박살이 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2초도 되지 않았다. 다른 해골들도 재빨리 놈을 막기 위해 움직였지만, 아쉽게도 놈은 더 이상 해골들과 놀아주지 않았다. 다시금 움직인 놈이 충렬의 앞까지 도착하는 것이 먼저였다.
쿵! 쿵! 쿵!
삽시간에 다가오는 마르바스의 모습에 충렬이 도망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늦었다. 사람이 뛰는 속도로는 도무지 놈과의 거리를 벌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가 이렇게 빨리 오는……!’
마르바스는 멈추지도 않고 충렬에게 계속해서 달려왔고.
쿵! 쿵! 쿵! 쿠웅!!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충렬과 충돌했다.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다. 피할 틈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충렬은 놈의 돌진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놈과 부딪치자 놈의 몸에서 나온 수많은 가시가 충렬의 몸을 찔렀다. 각각의 크기가 30㎝자의 길이만 한 가시가 일시에 찌르고 들어오자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푹!
푸북!
푹!
푸욱!
당연하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놈의 돌진이 얼마나 과격했는지, 충렬은 뒤로 쭉 날아가야 했다.
퍼엉!
한없이 뒤로 날아가던 충렬이 대저택의 벽과 부딪쳤다.
콰과광!
강력한 충격으로 인하여 대저택의 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폭삭 무너져 내렸다. 다량의 먼지가 발생한 그 아래에서 충렬이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었다.
“쿨럭!”
일반 사람이었다면 단숨에 절명할 만한 상황이었다. 버스나 트럭에 치여도 날아가지 않을 거리를, 충렬은 날아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충렬은 사망하지 않았다. 레벨 6이라는 경지는 무식할 정도의 공격을 한차례 버티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강한 충격에 충렬은 손끝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 충렬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젠장할… 몸이…….’
눈앞이 희미해져 갔지만 정신의 끈을 악착같이 붙잡아갔다. 여기서 죽으면 완전히 끝이었다. 충렬은 악착같이 용을 쓰며 감각을 되돌리려 했고. 얼마 있지 않아서 효과가 나타났다.
꿈틀.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충렬은 다시금 자신의 몸을 움직여갔고, 곧 느리게나마 정신을 차리며 일어설 수가 있었다.
충렬이 일어나자 가시에 당한 몸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나왔다.
[상태 이상 ‘출혈’이 발생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지혈하십시오.]
그렇지만 충렬은 자신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시선을 마르바스에게 고정했다.
‘더럽게… 강하잖아…….’
도대체 저런 녀석을 어떻게 잡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마르바스는 충렬에게 돌진한 뒤,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해골들이 놈의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마르바스의 주변엔 해골들로 득실거렸다. 그런 해골들이 진을 짜며 마르바스를 향해 공격해 나아갔다. 그렇지만 녀석이 당하는 일은 없었다. 당한다고 해도 그 피해는 매우 적었다. 오히려 놈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해골 보병14>가 ‘마르바스’의 종아리를 베어갑니다.]
[베는데 성공했지만 그 성과가 미미합니다.]
[<해골 농민41>이 도끼로 ‘마르바스’의 발등을 찍어갑니다.]
[‘마르바스’의 발등에 조그만 상처가 생깁니다.]
[‘마르바스’가 분노하여 날뜁니다.]
덕분에 해골들은 덤비는 족족 파괴되어 나아갔다. 마르바스 주변으로는 뼈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만큼 파괴되어 가는 해골들이 많다는 소리였다.
충렬은 놈이 해골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사이 다리를 움직였다.
‘지금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걸을 때마다 벌어진 상처 부위에서 고통이 밀려왔지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빨리 놈에게 스킬을 사용하여 몸부터 회복시켜야 했다.
충렬이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시스템이 알려온다.
[<해골 보병37>이 파괴됩니다.]
[<해골 농민148>이…….]
[<해골 기사9>가…….]
[<해골 농민147>이…….]
도대체 파괴되는 해골들의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많은 수의 해골들이 그렇게 파괴되어갈 무렵, 충렬은 놈의 근처까지 오는 것에 성공했다. 잠깐 사이에 충렬을 따르는 해골들은 168이라는 숫자로 줄어 있었다.
[현재 당신을 따르는 해골: <해골 기사1~8>, <해골 보병1~30> <해골 농민1~130>]
[총 해골의 수: 168]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놈은 강력했다. 어쨌거나 놈의 근처까지 도착한 충렬이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사용하려는 스킬은 지금 상황에서 딱 하나였다.
충렬은 스킬의 적용이 가능한 최대 거리 6m를 유지한 채로 입을 열었다.
“라이프 드레……!”
하지만 6m라는 거리마저도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마르바스는 충렬을 인식했고, 인식하자마자 거리를 좁혀왔다.
쿵! 쿵! 쿵!
놈이 거리를 좁히는 데 걸린 시간은 1초를 채 넘지 않았다. 놈은 충렬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한쪽 손을 휘둘렀다. 기다란 녀석의 손톱이 충렬을 압박해 왔고, 그 속도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쉬이이익!
바람마저 가르는 마르바스의 손톱이 미처 피하지 못한 충렬의 몸을 그었다. 충렬은 회피를 해본다고 옆으로 몸을 이동시켰지만 완전히 회피하지는 못했다.
안타깝게도 왼쪽 어깻죽지를 놈에게 내어주어야 했고. 내어준 어깻죽지는 단번에 절반 정도의 깊이로 갈라졌다.
스걱.
동시에 갈라진 틈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악!
악마의 손톱이라서 그런 것일까? 놈의 공격에 당한 상처가 미칠 듯이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마르바스’의 오른쪽 검지 손톱에 당하였습니다.]
[상태 이상 ‘상처 악화’가 발생합니다.]
[‘출혈’과 ‘상처 악화’가 합쳐져 상태 이상 ‘강제 출혈’로 변환됩니다.]
가시와 달리 손톱에 당한 상처에선 피가 봇물이 터지듯 터져 나왔다. 상처는 계속해서 벌어져 팔이 덜렁거렸다.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지만 충렬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꽉 물며 놈의 움직임에 주의했다. 역시나 놈은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낼 것이 아니었는지 재차 이어서 공격해 왔다. 마르바스는 차버릴 기세로 다리를 뒤로 쭉 빼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충렬을 향해 몰아쳤다.
저 다리에 맞으면 최소 사망이었다. 그 이하, 그 이상은 절대로 없었다. 엄습해 오는 놈의 발길질을 보며 충렬이 욕지거리를 속으로 내뱉었다.
‘제기랄……!’
재빨리 바닥을 구른 충렬의 머리 위로 놈의 다리가 스쳐 지나갔다. 놈의 다리가 지나친 궤적으로 바람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흩날렸다.
후우우웅!
놈의 공격이 실패했을 때가 기회였다. 충렬은 마르바스가 다리를 회수하는 도중, 멀쩡한 팔로 녀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라이프… 드레인……!”
그러자 놈의 손톱과 가시에 당했던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됨을 느낄 수 있었다.
[‘마르바스’의 충만한 생명력이 체내로 흡수됩니다.]
[상태 이상 ‘강제 출혈’이 제거됩니다.]
[갈라졌던 피부와 근육이 다시 붙어갑니다.]
[부족한 혈액이 자동으로 보충됩니다.]
역시 라이프 드레인은 충렬에게 구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던 몸이 금방 회복되었다. 몇 주 이상은 요양해야 회복될까 말까 한 상처가 금방 복구된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의 생명력이 크니 그만큼 회복 속도도 빨랐다.
‘그러나 라이프 드레인으로는 마르바스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다.’
충렬이 놈의 생명력을 빼앗은 것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증거로 놈의 움직임은 여전히 쌩쌩했다.
충렬은 계속 라이프 드레인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다리를 회수한 마르바스가 재차 공격해 오려 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마르바스의 발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놈의 발차기가 날아드는 것을 본 충렬은 늦지 않게 움직였다. 몸이 회복된 이상, 똑같은 공격에 재차 당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충렬이 뒤로 몸을 살짝 빼자, 얼굴 앞으로 놈의 발이 스쳐 지나갔다. 놈은 충렬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처음으로 입을 열어 짜증을 내었다.
“크르르르…….”
그리고 더욱 본격적으로 충렬을 덮치려 했다.
하지만 해골들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놈의 지척 거리에 있던 해골들이 악귀같이 마르바스에게 달라붙었다. 과연 명불허전 언데드였다. 해골들은 자신들의 몸을 생각지도 않고 악마 마르바스를 향해 움직였다.
달그락. 달그락.
일시에 해골들이 덮쳐오니 아무리 마르바스라도 더 이상은 쉬이 행동해지 못했다. 처음과는 달리 다가오는 해골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리고 해골들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차피 마르바스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때문에 방어는 포기하고 오로지 공격에 모든 것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해골들이 마르바스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갈 때, 충렬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