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도살자의 고성
***
화악!
눈앞이 번쩍이며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게 된 충렬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있는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실이었다. 벽에는 낡은 횃불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서부터 미약한 불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밝혀주었다. 석실의 공간은 꽤나 넓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피 냄새가 진동하지?’
충렬의 의문이 풀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뚝.
뚜둑.
뚝.
곳곳엔 해부된 고깃덩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특히나 큼지막한 고깃덩이들은 커다란 쇠꼬챙이에 꿰여 있었는데, 거기로부터 피가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느긋하게 주변 상황을 살필 때는 아니었다.
‘윽……!’
피가 머리로 몰리고 있었다. 왜냐고? 충렬도 거꾸로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충렬의 발은 천장에서 걸려 있는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밧줄을 풀기 위해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스템이 알려왔다.
[도살자의 고성]
[지하 1층: 식인 도살자의 인육 창고]
[당신은 식인 도살자의 인육 창고에 잡혀 왔습니다.]
[도살자가 창고에 도착하기 전에 현재 장소를 벗어나십시오.]
[도살자에게 붙잡히면 당신은 무조건 사망하게 됩니다.]
[도살자가 도착하기까지 2분 남았습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끝날 때쯤, 충렬은 밧줄을 푸는 것에 성공했다. 밧줄이 풀리자 충렬의 몸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하지만 착지한 장소가 좋지 않았다.
첨벙.
다행히 그다지 높게 매달린 것은 아니라서 큰 충격은 없었다. 그러나 바닥은 피로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덕분에 충렬은 난데없이 피를 몸에 적시게 되었다.
‘시작부터 요란하군.’
자세를 갈무리한 충렬은 시야의 오른쪽 상단을 살폈다. 그곳에는 도살자가 충렬이 있는 장소까지의 도착 시간을 알려주었다.
[도살자가 도착하기까지 1분 57초 남았습니다.]
‘그나저나 일단은 탈출을 하라고 했지.’
때문에 충렬은 다시금 둘러보았다. 어디로 탈출할지를 탐색하기 위해서다. 오물과 같이 썩은 피가 온몸을 적셨지만 거기에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출구로 보이는 곳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방이 밀폐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은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해골들이라도 소한해 놓아야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해골 병력 소환.”
그런데 시스템이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왔다.
[스킬 사용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제기랄.’
스킬 사용이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그렇다면 스킬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현재 장소를 탈출해야 된다는 소리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현재의 장소에도 곳곳에 묘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충렬은 재빨리 묘비를 살펴갔다.
-헬구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망치려 하십니까? 그냥 2분 동안 묵념이나 하세요.
-묘비에서 공략을 찾으려는 당신…….
-넌 이미 죽어 있다 ㅋㅋ.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
-진짜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묘비에 적힌 글들을 빠르게 읽어보았지만, 제대로 된 글이 적힌 묘비는 눈에 띄질 않았다.
‘전부 다 어이없게 죽은 건가?’
묘비에 적혀 있는 글들은 모두 허탈함을 토로하는 것들뿐이었다. 제법 많은 수의 묘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이곳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쪽 구석에 위치한 묘비에서, 의미심장한 글귀가 보였다. 충렬은 자세히 보기 위하여 그 묘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공략법 알려준다. 먼저 눈앞에 보이는 돌을…….
‘눈앞의 돌이라고? 이 석벽을 말하는 것인가?’
앞에는 석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딱히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충렬은 재빨리 묘비 아래에 이어진 글을 읽어갔다.
-힘껏 밀면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그 말에 충렬은 순간 석벽을 힘껏 밀어버릴 뻔했다. 그 밑에 이어진 또 다른 글을 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 밑으로 이어진 글을 발견한 충렬은 움직이려던 자신의 팔을 빠르게 정지시켰다.
-절대 밀지마라.
-이쪽 계단으로 도살자가 오는 중임. 마주쳐서 죽음.
-처음에 발목을 묶었던 밧줄 타고 올라가세요.
-ㅇㅇ 그게 구명줄이다.
‘밧줄이라고?’
충렬은 재빨리 원래 시작 위치였던 장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밧줄이 시작된 천장을 바라보았다.
‘밧줄이 정답이었군.’
처음엔 살필 겨를이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 천장을 보니 과연 묘비의 말 그대로였다. 밧줄은 천장의 구멍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천장은 충분한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밧줄을 타고 올라간다면 쉽사리 몸을 빼낼 수가 있으리라.
‘시간이 없다. 빨리 올라가자.’
묘비들을 살핀다고 어느덧 시간은 30초밖에 남질 않았다. 충렬은 재빨리 제자리에서 점프하여 밧줄을 잡아갔다. 그리고 그때에, 주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
쿠웅.
쿵.
지축이 흔들리는 이유는 바로 도살자 때문이었다.
[도살자가 거의 다 도착해 갑니다!]
[빨리 탈출하십시오!]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충렬이 선택할 길은 하나였다. 때문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밧줄을 잡은 충렬은 즉시 그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밧줄을 타고 올라간 충렬은 지하 창고에서 몸을 빼내는 것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빠져 나온 지하1층, 인육 창고에서 도살자의 괴성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아아!
녀석은 충렬이 보이지 않자 성질이 났는지, 괴성과 함께 발을 쿵쾅거렸다. 놈의 발광에 충렬이 있는 장소까지 아찔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러나 곧 놈은 잠잠해지더니 어디론가 이동했다.
쿵! 쿵! 쿠웅. 쿵.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몰랐다. 단지 진동은 점점 약해졌다. 하지만 놈은 결코 충렬을 놓친 것이 아니었다.
[도살자가 당신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곳을 향해 도살자가 오는 중입니다!]
[현재 당신이 위치한 장소는 반지하입니다!]
[늦기 전에 지상으로 올라가십시오!]
그랬다. 녀석은 충렬이 있는 곳으로 오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이제는 제한 시간이 따로 표시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고 지상으로 가라고만 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친절함 따위를 기대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충렬은 다시금 주변을 살펴갔다. 이번에는 지하 1층과 달리, 사방이 막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당장 보이는 통로만 2개였다.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이다.
‘어디로 가야 하지?’
도살자의 덩치를 고려한 것인지, 통로의 공간은 무척이나 넓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통로는 둘 다 높낮이가 차이나지 않고 일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 왼쪽 통로에서 진동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해서였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쿵. 쿵. 쿠웅. 쿵!
직선이 아닌, 꺾어져 있는 통로였다. 그렇기에 누가 오는지 모습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소리와 진동만 들어도 알 수가 있었다. 왼쪽 통로에서 도살자가 오고 있음을 말이다. 재빨리 판단을 내린 충렬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오른쪽 통로로 간다.’
그러나 빠른 결정을 내렸음에도 도살자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충렬이 오른쪽 통로에 진입하는 사이, 도살자도 마침내 반지하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지하에 나타난 녀석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충렬이 있던 위치로 가더니, 냄새를 맡아갔다.
킁킁.
그러고서 잠시 뒤, 냄새를 한창 맡아가던 녀석의 배에서 안타까운 소리가 났다. 배꼽시계가 울린 것이다.
꼬르르륵.
그러자 녀석은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도망친 충렬을 향해 의지를 다졌다.
“배고프다! 싱싱한 고기! 놓치지 않는다!”
***
발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는 충렬. 그 뒤를 도살자가 미친 듯이 따라오고 있었다. 2m 50㎝는 족히 될 법한 키에, 덩치는 어마어마하게 뚱뚱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스모 선수를 닮은 도살자였지만, 녀석은 결코 스모 선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통째로 덮은 아이언 마스크와 오른손에 들려 있는 쇠사슬과 갈고리를 본다면,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을 닮은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움직이니, 바닥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큰 진동을 널리 퍼뜨렸다.
쿵! 쿵!
충렬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도살자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움직임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빨랐다.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녀석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녀석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거의 10m 정도만이 벌려졌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녀석이 따라붙을 때마다 엄청난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쿵! 쿵! 쿵! 쿵!
여기서 충렬이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넘어지거나, 속도를 줄이는 순간 녀석에게 잡히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녀석은 충렬이 도망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크아아악! 뛰지 마라!”
뛰지 말라니, 그럼 얌전히 잡혀 죽으라는 소리인가? 어쨌거나 오른쪽 복도로 들어서고 계속해서 달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긴 터널이었는지 꽤나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평범한 통로라고 생각했던 곳은, 그 끝이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길었다.
그렇게 충렬과 도살자의 추격전이 한창 이루어지는 때였다. 도살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오른손에 쥐고 있던 갈고리를 던질 준비를 했다. 녀석은 쇠사슬을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갈고리가 공기를 가르며 묵직한 소리를 만들었다.
후웅! 후우웅!
그렇게 쇠사슬을 대략 3차례 정도 돌렸을 때였다. 녀석은 곧 충렬을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쇠사슬을 힘껏 던졌다. 쇠사슬과 이어진 갈고리가 묵직하면서도 빠르게 충렬을 향해 날아갔다. 갈고리는 단번에 충렬에게 적중될 듯했다. 하지만 충렬은 다행히도 녀석이 갈고리를 던진 것을 늦지 않게 눈치채었다.
‘맞으면 끝이다.’
충렬은 가볍게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갈고리를 피했다. 그러자 충렬이 방금까지 서 있었던 그 자리를 갈고리가 강타했다. 충렬이 없었기 때문인지, 갈고리는 바닥과 충돌하며 고막을 때리는 소리를 내었다.
카앙!
충렬에게 갈고리의 적용을 실패한 도살자가, 제자리에 서서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짜증난다! 쥐새끼! 잡아 죽인다!”
솔직히 말한다면 도살자의 이동속도가 충렬보다는 조금 더 빨랐다. 그러나 충렬이 지금까지 잡히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저 패턴 덕분이었다. 녀석은 일정 거리가 되면 쇠사슬과 연결된 쇠고리를 던졌고, 적중시키지 못하면 제자리에 서서 다시금 쇠사슬을 수습하고 쫓아왔다. 만약 적중당한다면 그대로 게임 오버겠지만, 레벨 5의 청력을 가지고 있는 충렬은 도살자가 쇠사슬을 던지는 소리쯤은 가볍게 인지할 수가 있었다.
스르르르릉!
뒤에서 도살자가 쇠사슬을 끌어당기며 수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사이 충렬은 더욱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앞으로 향했다.
‘제기랄,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끝이 안 보여?’
터널과 같은 이곳에서도 곳곳엔 묘비들이 있었다. 묘비들을 본다면 딱히 틀린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는데, 그 끝이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탄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덧 무기를 수습한 도살자가 다시금 추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쿵! 쿵! 쿵! 쿵!
놈의 추격에 충렬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하아… 그래. 누가 더 끈질기나 한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