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264화 (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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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화 비원의 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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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길이었다.

통로에 들어가고 나서 펼쳐진 건 끝 모를 유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길이었다. 천장과 벽, 바닥까지 전부 반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그 길은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찬은 그 길을 걸었다.

[신기하게 생긴 곳이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나조차도 처음 보는 곳이야.]

헤르메스는 떠돌이 신의 견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약간 분한 감정을 품었다.

현찬은 길을 걸으면서 손을 뻗어 매끄러운 벽면을 매만졌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운 벽면에서는 그 어떠한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반투명한 유리 벽을 본 현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공허한 공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유리 너머에는 세계 곳곳 풍경이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도, 천장도, 바닥도…… 이곳에 있는 모든 유리로 이루어진 것들이, 우주의 모든 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헤르메스. 아무래도 여기는…….”

[응. 과연 세계를 총괄하는 의지가 머무는 곳다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행성의 모습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니. 우리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곳이 이곳에는 가득해. 정말 대단하잖아!]

“너 되게 신나 보인다?”

[그야 당연하지! 지금까지 밝혀진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 미지의 종족들! 이 얼마나 가슴 뛰게 만드는 것들인지! 당장이라도 벽을 넘어서 놀러 가고 싶을 정도야!]

“어, 그래…….”

잊고 있었다. 호기심이야말로 헤르메스가 지닌 가장 강렬한 감정이자 행동 동기라는 것을. 사실 현찬도 헤르메스와 같은 생각이었다. 헤르메스의 계약자로서 그와 같은 것에 영향을 받는 건 당연했으니까.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응. 그러네.]

벽에서 시선을 돌린 현찬은 길게 이어진 통로의 끝을 향해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벽, 천장, 바닥의 풍경이 변해갔다.

하나의 세계, 다섯 개의 풍경으로 나누어진 마계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멸망해버린 용들을 대신하여 야생의 동물들이 번창하는 세계도 있었다.

다음 <대통합>의 우승자를 기리기 위해서 오랜 잠에 빠진 청동 신장의 모습이 있었다.

오랜 압정을 펼친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혁명에 성공한 세계도 있었다.

이 유리 통로에는 그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었다.

현찬은 그런 세계들을 스쳐 지나가며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

멈추지 않고 끝을 향해 걸었다.

“어서 와.”

통로의 끝에 도달하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백의 공간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새하얘서 경계조차 희미해졌다.

넓은 것 같기도 하고 좁은 것 같기도 하며,

높은 것 같기도 하고 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신비로운 세계의 중심에서 한 존재가 현찬과 헤르메스를 맞이해 주었다.

“당대 <대통합>의 영웅과 그와 계약한 신의 방문을 환영하지.”

치수가 큰 새하얀 도복과 허리까지 내려온 긴 백발. 눈썹과 수염마저 길게 기른 초로의 노인이 그곳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어딘가 점잖으면서도 총기가 흘러넘치는 그 모습에 현찬은 나지막이 감탄하며 그의 앞에 섰다.

“나를 처음 만나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는군?”

“뭐, ‘세계의 의지’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금 기대하기는 했는데 놀랄 것까지는 없잖아?”

“크하하! 이 나에게 반말을 하다니. 설마 지금 그대에게 힘을 준 존재가 누구인지 잊고 있는 건 아닐 텐데.”

긴 눈썹의 틈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였다. 현찬은 그런 ‘세계의 의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쪽이 처리 못 해서 곤란해하던 놈을 내가 없애 줬는데, 만약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면 내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건방지구나. 그 입이 자신의 화를 초래할 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거냐?”

“할 수 있으면 해 보던가. 손님을 초대해놓고 문전박대하는 막되어 먹은 주인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둘은 짧은 시간이지만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기 싸움을 이어나갔다.

결국, 먼저 포기하고 두 손을 든 쪽은 세계의 의지였다.

“졌다. 졌어. 장난이라도 좀 쳐보려고 했더니 아주 고약한 녀석이 걸리고 말았군.”

[장난이라니.]

끓어오르던 긴장감이 맥없이 탁 풀리자 헤르메스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다기보다는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위엄 넘치는 세계의 의지가 갑자기 친근한 태도를 한 부분에서 힘이 빠진 것에 가까웠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어?”

“원래 이런 성격이었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나라는 존재에게 성격이라는 게 딱히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애초에 이런 모습도, 단지 조금 골려줄 생각으로 취한 거라서 말이지.”

“대충 그쪽이 성격이 얼마나 나쁜지는 잘 알 것 같은데.”

“허허허허!”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세계의 의지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이런 모습은 괜찮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세계의 의지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초로의 노인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젊은 백발의 청년으로 바뀌었다.

“아니면 이게 좋으려나?”

청년의 모습에서 노파로, 노파의 모습에서 어린 소년으로, 어린 소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세계의 의지는 말을 할 때마다 계속 모습이 바뀌었다. 심지어 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뀌기도 했다. 온몸이 비늘로 덮인 어인, 머리에 뿔이 나 있는 짐승,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액체 괴물 등등.

그대로인 것은 그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뿐이었다.

“재미없는 장난은 이만 멈추지그래? 고작 그런 재롱을 보여주려고 나를 부른 건 아닐 거 아니야.”

“푸하하! 재롱이라니! 너는 정말이지 못하는 말이 없는구나!”

세계의 의지는 손뼉을 치며 현찬의 또래로 보이는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흰색의 앞머리가 눈을 가렸으며, 입고 있는 펑퍼짐한 백색 도복은 그대로였다.

“자. 이런 모습으로 가지. 네 말대로, 이제 장난은 그만 멈추도록 하겠어.”

“그래서.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뭔데?”

“우선은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세계의 의지는 오른손을 들더니 엄지와 검지로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현찬이 딛고 있는 지면은 별들의 무리인 원반 모양의 은하로 바뀌었고, 주변엔 광활한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어.”

차원과 차원을 가로막는 벽들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차차 흐르자 벽은 빠르게 복구되었고, 서로 충돌할 뻔한 세계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원래라면 그 이레귤러 때문에 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혼란이 생겼을 거야. 그것을 막아준 건 순전히 너의 힘이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세계의 의지가 고맙다고 하다니.”

“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냥 뭐.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인공지능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 세계의 의지의 말에 현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본 세계의 의지는, 어딘가 경박하면서도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도저히 <대통합>을 일으킬 녀석으로 보이지 않았다.

“뭐. 어떻게 보면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네. 인공지능이라…… 날 만든 건 누군가도 아닌, 저절로 만들어진 거지만 어떻게 보면 이 세계를 이루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감정이 풍부하다고?”

“그건 보면 알겠어.”

“큭큭. 맞아. 난 감수성도 풍부해. 멋진 세계를 보면서 그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니까. 물론 그것도 하마터면 전부 날아갈 뻔했지만 말이지. 그래서 네가 더 고마운 거야. 이 전부터 내가 권능을 일부 허락해준 수호자라는 녀석들은, 그 이레귤러를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현찬은 세계의 의지의 앞에 서서 그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털썩 앉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별들의 빛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려진 앞 머리카락 사이로, 세계의 의지가 눈을 빛냈다.

“고맙다는 말은 알겠는데, 나는 너한테 궁금한 게 좀 많거든?”

“뭐든지 물어봐. 세계를 구한 은인인데 어지간한 건 다 말해줄 수 있어.”

“너는 스스로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말했지. 다른 생명체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즐겁다고 했어.”

“뭐, 그렇지.”

“그러면 왜 <대통합> 같은 것을 일으키는 거지?”

줄곧 그게 의문이었다.

어지간한 권능을 전부 사용할 줄 아는 세계의 의지라면 굳이 <대통합>이라는 걸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대통합>으로 인해 발생한 몬스터들, 그런 몬스터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현찬의 의문에 세계의 의지는 조금 난처한 질문인지 입가를 일자로 만들며 고민했다.

“끄응. 뭐, 이미 내 힘을 어느 정도 이어받은 너라면 알아둬도 나쁘지는 않겠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희들이 말하는 <대통합>을 일으키는 걸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어. 그걸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체들의 수는…… 많았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데도 필요했기 때문이야.”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세계의 의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우주에는 네가 모르는 다양한 차원들이 있어.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들은 나날이 번창하고, 사라지는 것보다 새롭게 생기는 것이 더 많아지지. 우주는 무한하지 않아. 단지 무한해 보이지.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다루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우주 전체의 균형은 무너지게 돼.”

“그것 때문이야?”

“이건 중요한 문제라고. 우주야 계속 팽창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야. 이 우주의 크기는 아주 거대하지만, 그 크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 왜냐하면, 우주의 바깥에는 또 다른 우주가 있으니까. 거기랑 충돌하지 않으려면 별수 없어.”

“또 다른 우주라니…….”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그런 곳이랑 부딪치면 이쪽도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아서 팽창을 멈추고 안정화에 들어갈 생각이었지. 지나치게 많아지는 생명체들은, 내키지 않지만 줄일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일어난 것이 <대통합>이다.

경쟁과 협업을 통해, 나약한 자들은 도태되게 만드는 것.

어떻게 보면 자연의 섭리 그 자체인 세계의 의지가 선택한 방법다웠다.

“나도 처음에는 미숙해서 말이야.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가 지금 선택한 게 바로 <대통합>이라는 방식이었지. 하지만, 그것 또한 결국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 당장에 이레귤러의 탄생만 봐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거하게 싼 똥을 네가 치워줬으니까.”

“…… 네 입으로 그렇게 들으니 뭔가 기분이 묘한데.”

[푸흐흐! 뭐 어때 현찬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앞으로 뭘 어쩌고 싶어서 그런데?]

“이제 새로운 방법을 구해야지. 그것이 옳은지 틀렸는지는 모르지만…… 바뀌지 않으면 안 되니까.”

“보통 세계의 의지라고 한다면, 변화를 거부하고 지금 체계 그대로 가는 그런 역할 아니야?”

“에이. 날 너무 쉽게 본다. 그런 클리셰는 너무 식상하다고. 애초에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니까.”

부드럽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현찬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정말로,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어쩌면 이런 성격의 녀석이었기에 발드르를 선택했던 거고, 그 발드르가 현찬을 선택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셋은 다르면서도, 닮은 면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너희들에게 넘긴 나의 권능 중 일부는 그냥 그대로 놔둘게. 대신 내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해.”

“부려먹으려고?”

“에이. 부려먹다니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냥, 비즈니스 동업자 정도로만 하자고.”

세계의 의지는 현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그의 손바닥은 현찬을 향해 있었다.

“나와 함께 일하지 않겠어? 언젠가, 모두가 행복해질 내 비원의 끝을 이루기 위해서.”

“부려 먹히는 건 싫지만…….”

현찬은 그가 내민 손을 망설이지 않고 잡았다.

“동등한 동업자라면, 해볼 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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