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263화 (263/265)

# 263

263화 비원의 끝 (1)

_

순백의 장막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태평양을 완전히 뒤덮고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부 뒤덮었다. 지구의 넓은 표면 전체를 하얀 막 같은 것이 뒤덮은 것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그 백색의 속에서 모두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악신회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여기는……?”

악신회주는 반쯤 누워있던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지면은 평평하고 새까맣다. 그것이 끝이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광활한 우주의 풍경이었다.

검은 대지를 제외하면 이곳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부 우주뿐이었다.

눈부신 빛을 내뿜는 별들과 그 별들이 모여서 만든 은하. 온갖 물질이 뭉쳐져서 만든 성운과 모든 것을 흡수하며 종국에는 빛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마저 보였다.

그 무한한 크기의 명화를 보며 악신회주는 아려오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전부…… 꿈이었던 건가?”

이곳은 익숙한 곳이었다. 그가 태어난 장소가 바로 여기였으니까.

쿠르르릉! 익숙한 소리와 함께 허공이 갈라지며 그곳에서 검은 오물들이 방류된 댐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검은 지면을 가득 뒤덮으며 넓게 퍼져나갔다.

버려지고 사라진 세계의 오물들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이 쓰레기들은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계속 쌓여만 갔다. 그 중심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그였다.

“내가 꿈을 꾸다니. 이상한 일이로군.”

그는 꿈을 꾸지 않았다. 애초에 잠조차도 자지 않았다. 수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오랜 세월을 그냥 보내는 건 너무나도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라서 그는 숙면이라는 흉내를 낸 적은 몇 번 있었다.

그저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운다. 그것은 잠이 아닌 잠을 자는 척하는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고 해서 진짜 숙면으로 빠져드는 일은 없었는데…….

“심지어 꿈까지 꿨다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뭐, 그건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악신회주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랫동안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고, 저런 일도 있는 거다. 정말로 잠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꿈이라는 것을 꾸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이겠지.”

갑자기 떠올랐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는지. 누군가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닌, 스스로 내린 답을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냈다.

“나는 이 더러운 세상에 종말을 선사해줄…….”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던 악신회주는 자신이 꺼낸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항상 우주의 풍경을 바라봐왔다. 아주 넓게 펼쳐진 우주의 모습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주 아름다운 조형물 그 자체였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저것의 미에 미칠까, 의문이 들 정도로 세계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미시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아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생각은 물로 씻은 듯이 사라진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그 아래에 죄 없는 나약한 생명체들의 죽음과 절망, 괴로움을 양분 삼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이는 별의 일순간의 강렬한 불꽃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살아가는 행성의 멸망을 의미했다.

악신회주는 세계를 가장 아름다운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진상을 알아보고 더욱 큰 배신감을 느꼈다. 분노로 점철된 그의 목적은 오직 자신의 이 마음을 배신한 세상을 향한 복수심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목표를 세웠다.

세상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 아름다움의 아래에, 저런 지저분한 것이 깔려있어서는 안 됐다.

그러니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재건해야 한다.

더러운 것 없이,

추잡한 것 없이,

오직 순수하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것들로만 구성되게끔.

그래서 그는 항상 세계를 바라본다. 자신의 이 의지를 단 한시라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가다듬기 위해서. 세계의 근간을 들여다보고, 그 아래에 깔린 추악한 진실을 들추며 스스로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다잡는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째서……?”

언제나처럼, 세계의 이면은 추악하고 더러워야 할 터였다.

“어째서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거지?”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전혀 더럽지 않았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름다웠을 뿐이다. 오점을 찾기 위해 아무리 세세하게 뒤져보아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가 처음 우주의 풍경을 눈에 담았을 때 느꼈던 최초의 충격을 지금 다시 느낀 것이었다.

“세계가…… 이렇게나 아름다웠다고?”

악신회주는 그 광경에 매료되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세계는, 자신이 그토록 만들고 싶던 궁극의 목표였다. 그것이 대체 어떤 것일지는 몰랐다. 항상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이었으니까.

그것을 실제로 이 두 눈으로 바라보게 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악신회주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구성조차 알 수 없는 검은 무언가로 이루어진 몸을 내려다보며 악신회주는 다시 고개를 들어 우주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끝났구나.”

세상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곧 완벽해야 한다. 자신은 세상의 오물이 뭉쳐서 탄생한 일종의 이레귤러. 이 아름다운 세계에 자신의 존재란, 곧 커다란 오점이다.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악신회주는 드디어 깨달았다.

“나는, 더는 필요가 없는구나.”

악신회주는 눈을 감았다. 모든 비원을 이룬 순간, 그의 생명을 붙잡고 있던 아집이 가루처럼 흩어졌다.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그의 육신이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태양 아래의 얼음처럼, 그의 몸이 서서히 녹아 내려갔다.

악신회주는 그토록 미뤄왔던 죽음이 다가옴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뿌듯한 만족감만 있었을 뿐.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악신회주는 자신의 육신이 모두 녹아서 사라지기 직전까지 세계를 눈에 담았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완벽한 조형물을,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의 의식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아아.”

악신회주는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몸을 구성하던 갑옷은 이미 사라졌다. 상반신과 하반신은 비스듬하게 잘려나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 또한…… 꿈이었구나.”

겨우 비원을 이뤘다고 생각했건만…… 전부 다 그가 만든 허상이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한평생 꿈이라고는 꾼 적도 없던 그가, 죽기 직전에 꿈을 꾸다니 말이다.

그것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이상을 꿈에서 이루다니.

너무 웃겨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꿈이 이렇게 달콤한 줄 알았다면, 이전부터 한 번 정도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할 걸 그랬어.”

저벅. 저벅.

옆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악신회주는 고개만을 돌려 그 주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갑옷을 입고 있는 현찬이 다가오고 있었다. 악신회주는 눈가를 초승달처럼 휘었다.

“네 승리다.”

“패배한 것 치고는 되게 담담한데?”

“그저 그런 유치한 감정에 소모할 힘조차 없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이런 실패를 겪을 거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도 덤덤한 거고.”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육신 자체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어디론가 붕 떠서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 영혼마저도,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서 강제로 끌려가는 기분이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살아오며 바라본 비원을 이루지 못한 것은 퍽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군.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좋은 꿈을 꾸었으니 말이야.”

그것이 결국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이라 할지라도.

눈을 뜨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순간의 희망일 뿐이라도.

갈증과 욕망에 목을 매며 항상 앞만 보며 달린 악신회주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인간이여. 영웅이여. 세계의 의지여. 살아가라. 이 세상을 살아가라. 살고 살며, 계속 살아서…… 너 또한 맞이하라. 내가 그토록 바라던…… 세계가 이루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깨닫거라. 내가 바라던 것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이라는 걸. 이걸 바라는 한 존재의 뜻은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악신회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검은 육신은 점점 가루로 변하며 허공에 흩어졌다. 그가 사용하던 검은 마검도, 그가 부리던 전대의 수호자들도 전부 함께 사라졌다. 현찬은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싸움은 끝났다.

“어, 어어?”

“끄, 끝난 건가?”

세상을 뒤덮던 흰 빛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헌터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성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부터 이어지던 거대한 충돌은 그쳤다. 오직 얼마 남지 않은 성채의 파편만이 지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이, 이겼어!”

“이겼다! 강현찬 헌터님이 이겼어!”

그리고 그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모두가 곁의 동료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남은 성채의 잔해는 추락을 거듭할수록 점점 부스러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 아래 바다로 떨어지기 전에는 사실상 거의 분해될 것이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바다 한가운데에 큰 물보라를 일으키는 수준에서 끝나리라.

[현찬아. 드디어 끝났네.]

“응. 그러게.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겨우 끝났어.”

참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각성자가 되고, 헤르메스와 계약을 맺으며, 온갖 던전을 돌아다니고 적들을 만나 싸우며, 새로운 흑막을 발견하고, 그들과 싸우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고, 그렇게 많은 일이 있는 후에.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모든 것이 꿈만 같은 일이었다. 검을 쥔 생생한 손바닥의 감촉마저도, 너무나도 정교한 꿈의 일부인 것 같았다.

[현찬아. 이제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부 사라질 거야. 그 전에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이, 이건?]

갑자기 느껴지는 기묘한 힘의 파동에, 헤르메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당황한 것은 현찬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눈앞의 공간이 문처럼 열리며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적인 줄 알고 검을 고쳐 쥔 현찬은, 바로 다시 검을 내렸다.

저것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헤르메스. 아무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끝이 아닌 것 같아.”

[…… 그래. 그런 것 같네. 생각해보면 마지막 단계가 하나 남아 있었어.]

이 문이야말로 현찬에게 힘을 선사해준 진정한 후원자.

세계의 의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저쪽에서 현찬을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초대해 줬으니, 여기서 빼기도 뭣하지?”

[그래. 지금까지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그 낯짝을 친히 보러 가 주자고.]

“가자.”

현찬은 사각형 공간의 틈을 향해 몸을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