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262화 최후의 싸움 (3)
_
[강현찬 헌터님. 들리십니까?]
“김은혁 씨?”
[잘 들리시나 보군요. 저희도 지금 싸움에 가세하도록 하겠습니다.]
“위험할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제대로 힘을 쓰면 여러분들에게도 영향이 크게 갈 테니까요.”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요. 저희는 항상 도움만 받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저희가 당신을 도와줄 차례입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 말 대로였다.
“이놈들!”
악신회주가 자신의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거대한 암흑파를 방출했다. 그것은 거대한 구체를 그리며 주변의 전투기들과 수송선, 헌터들을 집어삼켰다. 피부를 찌릿하게 만드는 강렬한 힘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런데도 쓰러진 자들은 없었다.
[크하. 역시 강하네요. 악신들 대빵이라 그런가. 하지만 버틸 만합니다.]
지구의 인간들은 놀고만 있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도움만을 바라며 안일하게 살아온 자들은 이곳에 서지 않았다. 모두가 스스로 지닌 의지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며 노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뭉쳤고, 뭉쳤기에 강해졌다.
강한 자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 검은 갑옷을 입은 녀석에게 온갖 공격을 퍼붓고 싶지만 여의치 않으니 지금 추락하는 이 거대한 성채부터 처리해야겠네요.]
“잘 생각하신 겁니다. 이 녀석은 제 먹잇감이거든요.”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뭐, 남이 찜한 것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는 없겠죠.]
‘그러니, 강현찬 헌터님…….’ 하고.
김은혁은 시종일관 장난스러웠던 목소리를 싹 지운 채 진지하게 말했다.
[부디 이기시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건, 저에게 맡기세요.”
[예. 무운을.]
멀리서 보이는 사람들이 현찬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열린 문을 통해서 현찬에게 목례를 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가, 현찬을 향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싸우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미래를 열기 위해서.
그들의 기대와 응원을 한 몸에 받은 처지에서,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야. 이제 이쪽도 슬슬 진심으로 간다.”
“…… 네놈. 저 인간들이 휘말리는 것은 이제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분명 내가 힘을 발휘하면, 휘말리겠지.”
현찬은 스스로 지닌 힘에 관해서 자각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이것을 함부로 휘두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뭐라고?”
“왜냐하면, 나는 저 사람들을 믿거든.”
현찬은 믿는다. 그들이 살아남을 거라는 걸. 이런 곳에서 쉽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반드시 살 거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손속에 더 자비와 망설임을 두지 않았다.
“내게로 오라. 드높은 천상의 존재들이여.”
현찬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현찬의 부름에 응하며, 우주 저 너머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현찬을 향해 떨어졌다. 쿠우웅! 그것은 순식간에 현찬의 몸을 집어삼키며 주위로 찬란한 빛을 뿌렸다.
현찬은 지금, 신들을 부르고 있었다.
빛의 기둥은 통로였다. 그것을 통해서 거대한 격이 하나둘 현찬의 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악신회주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그의 감이 조금 전부터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위험하다. 이대로 가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제 여유를 부리는 것도 끝이다. 그 또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악신회주의 검은 갑옷 위로 불길한 기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스가 새어 나오는 늪지대처럼, 그의 갑옷 근처에서 거품이 터져 나왔다. 지독한 냄새와 강한 점성을 가진 그것은 지면으로 흘러내리며 땅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나는 세계에 멸망을 가져올 인도자.’
악신회주는 눈을 뜬 순간부터, 이날을 위해서 살아왔다.
그에게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이 없었다. 단지, 눈을 뜨고 사고가 가능한 순간부터가 그의 첫 기억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차원과 차원의 버려진 찌꺼기들이 쌓이는 그런 쓰레기더미 같은 곳에서.
그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내왔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에 의문이라는 것을 품을 줄도 모른 채
그는 계속 살아왔다.
난 대체 뭘까?
나는 무엇을 위해서 태어난 걸까?
악신회주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별은 저렇게 밝게 빛나는데 내 몸은 이렇게 새까만 걸까?
악신회주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우주는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이곳은 이렇게 더럽고 냄새가 나는 걸까?
왜 저 생명체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사라져야 하는 걸까?
왜 저 아름다운 별은 갑작스러운 멸망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어째서 세계는 이렇게나 멋진 세계를 제멋대로 없애는 걸까?
그 모든 것이 의문에 의문을 품었고
악신회주는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만의 대답을 내릴 수 있었다.
아아.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고의 확장이었다. 머리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그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꼈던 것 이상으로 모든 것들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감각이라는 것이 더 고등한 단계에 접어들며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거대한 성취감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나는,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탄생한 거구나.
아무것도 모르던 존재가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눈을 떠 본 적이 없는 장님이 처음으로 빛을 본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악신회주는 깨달았다.
세상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근간은 결국 추악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거기서 태어난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세계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이레귤러의 등장이었다.
세계라는 시스템의 아래에서, 악신회주는 바이러스였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세계는 백신을 투입하여 바이러스를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악신회주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다음 기회를 도모했다.
목적을 가진 이상,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달린다. 삶에서 처음 가진 목적이었기에, 악신회주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의(大義)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질 수 없다.
자신은 절대 패배할 수 없다.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기 전까지는, 절대로.
“네놈은 모른다!”
콰앙!
악신회주의 검과 현찬의 검이 수차례 격돌을 일으켰다. 찰나의 순간에 주고받는 공방의 횟수는 이미 세 자릿수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수준을 넘어선 검격은 이미 공간마저 갈라버리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내가 품은 이 신념을! 그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관철해 왔는지! 너는 모를 거다!”
“알고 싶지도 않아!”
콰과광!
둘의 검이 충돌하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악신회주의 투구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섬광처럼 폭발했다.
“고작 수십 년밖에 살지 못한 네놈이, 억겁의 세월을 견뎌온 나의 의지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악신회주가 팔에 힘을 주었다. 드드드득! 현찬의 몸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악신회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악의를 품은 그것은 전부 현찬을 노리고 있었다.
“신념도! 도의도! 의지조차! 전부 나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어찌 내게 맞서려는 것이냐!”
“그딴 거 내 알 바 아니야!”
꽝!
현찬은 그대로 투구를 뒤로 젖혀 악신회주에게 박치기를 가했다. 머리를 울리는 강렬한 충격에 악신회주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현찬은 그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서린 번개가, 눈이, 폭풍이, 화염이 온갖 사이한 것들을 다 태우고 찢어버렸다.
“네가 오래 살아와서 뭐 어쨌다고!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할 뿐이야!”
자신의 신념? 목적? 대의?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고작 그런 입에 발린 말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해야 하는가?
천만의 말씀.
모든 것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세계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그런 대의가 어디 있겠는가. 그쪽이 그것을 대의라는 허울 좋은 말로 치장하고 포장해서 외친다면, 이쪽도 똑같이 대꾸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딴 게 대의면! 내가 지금 하는 행동도 대의다! 자식아!”
“이 자시이이이익!!”
자신 삶의 목적마저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악신회주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인정한다. 현찬이 강하다는 것을. 그가 준비한 만큼, 세계의 의지에게서 선택받은 수호자 또한 지금까지 싸워왔던 녀석들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찬이 강하니까, 그렇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나는! 나는 세계를 파괴하기 위한 사명을 타고난 존재! 네놈 하나에 꺾일 만큼 내 의지는 나약하지 않다!”
악신회주가 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사방으로 중구 난방하게 흩뿌리던 그의 검은 기운이 검의 끝에 모였다. 순식간에 검의 크기가 수백 미터나 길어졌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현찬을 향해 내리찍었다. 현찬은 검을 수평으로 세워 방어했다.
콰아아앙!
너무나도 강한 힘으로 추락하고 있던 성채마저 반으로 갈라졌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떨어지는 파편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순간 잊어버린 채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세상에 남아 있던 흔적마저 모두 소멸해 버려라!”
쿠웅!
현찬의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몇 배는 더 거대해졌다. 콰득! 현찬의 무릎까지 지면에 파고들었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검 자체가 내포한 힘만으로 주변 공간이 뒤틀릴 정도였으니까. 콰득! 현찬의 얼굴을 덮고 있던 투구가 부서지며 현찬의 민얼굴이 드러났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역량에 현찬은 적이지만 감탄했다.
그는 정말로 강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이 순간만을 위해서 준비해왔다는 말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현찬은 지면에 무릎까지 파고든 발을 뽑아 올렸다. 쿠웅! 단단한 지반에 발을 올리며 그대로 힘을 줘 몸을 고정한다. 몸에서 끌어올린 힘을 방어하고 있는 검으로 밀어 넣었다. 후우웅! 현찬의 검이 낮게 진동하며 점점 눈부신 백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뭣?!”
악신회주는 자신의 혼신이 담긴 일격이 점점 밀리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피조물이라면 절대로 견디지 못할 공격이었음에도, 현찬은 그것을 견뎌냈으며 지금은 오히려 자신을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
파아앗!
현찬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광이 점점 더 커졌다. 그것은 역으로, 악신회주의 검은 기운을 몰아내며 그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어찌 네놈이 이 정도의 힘을!”
어찌 자신이, 고작 수십 년밖에 알아오지 못한 자에게 이렇게 밀린단 말인가!
살아온 세월도, 싸움에 대한 경험도, 쌓아온 지식도, 축적한 힘도 그가 월등히 위였는데 어째서!
투구 너머로도 당혹감을 충분히 느낄 정도로 경악하는 악신회주를 향해, 현찬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아~주 예전부터. 나랑 싸우는 적들에게 똑같이 하는 소리가 있지.”
순백의 기운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붙였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악신회주가 마지막 발악으로 내뱉는 검은색 기류는 백색의 폭풍에 힘없이 찢겨나갔다.
“나는…… 혼자서 싸우지 않아.”
[우리는…… 항상 함께 싸워왔어.]
예전부터 그래왔다.
현찬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훌륭한 동료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니, 네가 이길 턱이 있나.”
이제 이 싸움을 끝낼 때가 왔다.
기회를 잡은 이 순간, 현찬은 모든 힘을 쥐어 짜내며 저항감이 느껴지던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걱!
강렬한 저항감과 함께, 현찬의 검이 악신회주의 몸을 비스듬하게 베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