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259화 마무리 단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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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처음에 악신회주가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당장 싸울 것처럼 분위기를 잡던 녀석이, 난데없이 세상의 진실에 관해서 알려준다고 하니 너무 뜬금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그가 무언가 기습을 가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진실의 눈>을 발동했는데도 그랬다. 악신회주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현찬과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현찬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악신회주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였다.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온 사람이 없이, 그는 셀 수도 없이 긴 세월을 홀로 보내왔다.
<대통합>이 일어나 세계들이 하나로 뭉치고 또 거기서 세계들이 사라지는 것을 봐 왔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되는 <대통합>을 봐 왔고, 그보다 몇십 배나 되는 종족의 멸망을 봐 왔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 스스로 사고하는 생각과 이성이 있으며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이 마모되고 만다.
‘실제로, 아주 먼 옛날과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조금 많은 것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목적만큼은 잊지 않았다.
어둡고 축축한 고행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항상 빛을 향했다.
오직 그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악신회주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결승선을 코앞에 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을 일종의 자비심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동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혹시 모를 만의 하나에 대한, 자신을 향한 마지막 변호이자 발악일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자신과 대등하다고 생각한 존재를 처음으로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악신회주에게 묘한 감상을 주기엔 충분했다. 그가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느끼는 일종의 여유 같은 것이었다.
그 끝이 눈부신 성공으로 가득 찰지 끔찍한 실패로 범벅이 될지는 차치하고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금까지의 여정을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이었다.
“너는 어째서 이 세계가 이렇게나 계속 통합이 되는지 알고 있나? 왜 가만히 있어야 할 우주에서 온갖 차원과 차원이 뭉치는 <대통합>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는 있다는 말투로군.”
악신회주의 말 대로였다.
지구의 영웅의 자격으로 중간과정에 참여한 현찬은 <대통합>이라는 것이 무언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것은 지금까지 수차례나 이어져 온 것이었다.
이 전에도 <대통합>은 일어났었고,
많은 세계가 분쟁의 끝에 멸망했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것을 일으켰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청동 신장을 만든 자가 그런 일을 벌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너의 세계, 지구라고 했었지. 그곳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는다고 치지.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떻게 될 거로 생각하지? 네가 모르는 곳에서, 지금도 실시간으로 여러 차원이 분쟁을 거듭하며 싸움을 개시하고 있지.”
악신회주는 그렇게 말하며 턱짓으로 우주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시선을 던져 눈에 힘을 주자, 서로 맞닿은 두 개의 행성이 보였다. 보통 행성 간에 저렇게 가까이 붙어있을 리가 없었다.
안력에 힘을 주고 더욱 확대해서 바라보자 그곳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서로 완전히 다르게 생긴 두 종족이 각자 무기를 쥐고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서로가 살의를 품고서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원초적인 광기만이 가득한 그 광경에 현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두 종족 중에서 한쪽은 반드시 멸망하겠지. 과연 저들만이 있을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분쟁이 일어나지. 원래라면 서로 만날 일도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어야 할 종족들이 마치 무언가에 의해서 이끌리듯 전쟁을 벌이는 거야. 웃기지 않나?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적과 싸워서 죽이고만 있지. 이다음에는? 다음 <대통합>에서는 또 얼마나 되는 세계가 멸망을 거듭해야 하지?”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데.”
“이 세계는 신기하게 이루어져 있지. 세계 자체가 하나의 의지를 지니고 있어. 크게 보자면 우주라는 녀석은 결국에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이지. 얼마나 고등한 사고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대통합>을 일으키는 것은 그 세계의 의지라는 녀석이다.”
“세계의 의지?”
현찬도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영령의 세계에서 신들이 하계로 함부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도, 그 세계의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 무언가 꿀리는 것이 없는 신들조차도 한 수 접어둘 정도로 엄청난 힘의 권능을 행하는 존재.
아니, 그것을 존재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이 우주의 살아있는 시스템이야말로 바로 의지 그 자체인 것이었다.
“세계의 의지는 지금까지 여러 번의 <대통합>을 일으켜왔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 자체가 너무 과포화 상태라 그런 거야. 세계의 의지는 너무 많은 생명체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대통합>을 일으키고 있는 거지.”
“세계의 의지가 일으키고 있다고?”
“그래. 아주 잘 짜인 정교한 시스템으로 말이지. 경쟁에서 밀린 종족들을 도태되게 만드는 거지. 마석을 품은 몬스터들이 우선으로 세계에 출현하며 그곳의 생명체들을 죽이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차원과 경쟁을 붙이는 거야. 그렇게 자신의 시스템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는 종족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거지.”
세계에는 의지가 있지만, 놈에게 감정은 없다. 그가 만든 이 <대통합>이라는 시스템 아래에서 사라져 가는 많은 생명체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세계의 의지는 지금까지 많은 종족을 멸망시켜왔다.
우주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 아래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 자체가 잘못됐으니까 나보고 어쩌라는 이야기지? 서로 손잡고 이 빌어먹을 세계를 갈아엎기라도 하자는 말이야?”
“그렇게 할 거였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악신회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그런 게, 무고한 생명체들을 멸하는 이 시스템을 막겠다며 지구를 없앨 생각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뭐, 이 빌어먹을 세계를 갈아엎겠다는 건 맞아. 다만, 너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지. 나는 오롯이 내 힘만으로 이 세계의 시스템을 바꿀 생각이니까.”
“대체 왜? 힘없이 사라져가는 저 무고한 자들을 향해 연민이라도 들었어? 아니면, 많은 생명체의 죽음 아래에 쌓인 이 시스템의 근간에 회의감을 느끼고, 정의로운 생각으로 바꿀 생각이라도 한 거야?”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는 건가?”
현찬은 코웃음 쳤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그의 어디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네가 정의로웠다면 지구를 멸망시키려 들지도 않았겠지. 다른 세계를 끌어들여서 전쟁을 벌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야.”
“그래. 정답이다. 나는 정의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야. 내가 세계의 의지를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건 단지, 내 개인적인 바람일 뿐이었다.”
악신회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지금은 거의 희미해져 버린, 아주 먼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듯 그는 눈을 감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그렇게 고민하길 고작 몇 초 후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말 그대로다. 나는 태어난 행성이 없다. 내 동족도, 내 부모도, 고향도, 가족도 전부 없다.”
악신회주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자신이 처음 스스로임을 자각하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처음으로 나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오롯이 홀로 존재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가만히 존재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이상한 공간을 떠돌았던 걸까.
그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난 뭐지?
여기는 대체 어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순간 수많은 정보가 그의 머리로 빨려 들어왔다.
“너무나도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것만 기억이 나지. 그 이후로 나에게는 지식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지식으로 답을 내림으로써 많은 것들을 알아갔지. 그래. 나는 세계의 틈새에서 태어난 이레귤러였다.”
“뭐?”
“세계의 의지는, 정말로 아주 잘 짜인 시스템이지. 그리고 그런 의지가 만들어낸 <대통합>이라는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태초에 <대통합>이 있기 이전에는 다른 방식들이 사용되고는 했지.”
그것이 바로 우주적인 재앙, 혹은 생명체를 멸망시키는 여러 종족이었다.
세계의 의지는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서 재해를 일으키거나, 혹은 생명체를 잡아먹는 끔찍한 괴물들을 만들기도 했다.
흔히들 <심연>이라 불리는 곳 또한 바로 세계의 의지로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였다.
지금은 거의 다 폐기되고 반쯤 버려진 것들이었지만 <대통합>이 있기 전에는 <심연> 같은 끔찍한 세계가 상당히 많았다.
“세계의 의지, 그 자체는 완벽했지. 하지만 녀석이 만든 시스템은 어딘가 나사가 빠지고 허술한 면이 있었어. 그래. 그것은 마치, 신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이…… 너무나도 미숙한 손재주로 볼품없는 물건을 만든 것과 비슷했지.”
물론 세계의 의지는 시행을 거듭하며 가장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전까지 유지하던 시스템의 잔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찌꺼기에서 태어났다. 세계의 의지가 만든 미숙했던 시스템의 틈새에서, 그 불규칙성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나였지.”
악신회주가 탄생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질 확률과 같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태어났고, 세계의 의지가 폐기한 시스템의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가며 나의 목적 의지를 찾아냈지. 나를 만들어낸 이 시스템의 불균형을, 세계의 의지가 만들어낸 온갖 시스템을 그대로 붕괴하는 것이야. 나를 이루는 근간 자체가, 의지에게서 버려진 모든 시스템의 애환과 분노, 증오의 덩어리니까.”
악신회주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는 거대하게 펼쳐진 이 우주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만찬이라고 생각하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이 세계의 시스템을 멸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순간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 지겹도록 오랜 세월을! 스러져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나를 만들어낸 세계의 의지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서!”
물론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악신회주, 아니 의지가 만들어낸 찌꺼기의 잔해는 <대통합>의 초기부터 그 틈새를 노려 세계의 멸망을 꾀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세계의 의지 또한 나의 존재를 인지했지. 그러나 녀석은 직접 나에게 손을 댈 수는 없다. 녀석이 만든 시스템이 그러했으니까. 나는 이미 실체를 가지고서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놈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의 의지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에 제약을 받아 악신회주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녀석의 힘은 대단했지. 세계의 의지는 <대통합>이 있을 때마다, 나를 막아내기 위해서 자신의 대리자를 앞세워 세계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어. 그리고 나는 <대통합>이 벌어질 때마다 쓰디쓴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지.”
악신회주는 하늘을 향했던 고개를 내리며 현찬을 직시했다. 검은 얼굴에 박힌 두 개의 눈동자가, 현찬의 모습을 핥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세계의 의지는 더욱 집요하게 강한 수호자를 보내왔지. 그리고 지금이 바로 몇 차례나 반복되어버린 그 순간인 것이다. 너는 세계의 의지에 의해서 탄생한 수호자의 자격으로, 나는 그것을 쓰러뜨리기 위한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지.”
악신회주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실패하면, 그는 더는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악신회주는 오랜 세월 동안 이번 <대통합>에서 승리할 준비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세계의 의지가 보낸 수호자인 현찬은,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떤 수호자보다도 더욱 강력했다.
즉, 수호자 중에서도 최강이 현찬이었다.
“이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구나. 자. 마지막 수호자여. 덤벼라. 이 지긋지긋한 순환의 고리를…… 여기서 끊자꾸나.”
악신회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더는 네 이야기를 들어주기 힘들었거든.”
현찬 또한 자신의 무기를 꺼내 쥐고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