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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258화 (258/265)

# 258

258화 마무리 단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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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디르의 합류로 알렉세이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까스로 맞춰졌던 균형의 추가 드디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지원군이라고 하는 사람이, 보기엔 가냘파 보이는 여성이라는 점이 예상 밖이었지만…….

‘확실히 밀어붙이고 있다.’

아렌디르는 일방적으로 트랄텍트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단 하나라고 하더라도, 그 한 명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상황은 판이해진다. 당연히 아렌디르는 개개인의 무력에서 절대로 트랄텍트리에게 꿀리지 않았다.

“이 건방진 계집년이!”

트랄텍트리의 분노에 찬 노호성과 함께 지면이 흔들거리며 가시처럼 일어났다. 날카로운 대지의 창이 그대로 아렌디르의 여린 피부를 꿰뚫으려는 순간, 아렌디르의 몸을 검은 어둠이 집어삼켰다.

대지의 창은 어둠만 건드렸을 뿐, 아렌디르에게 닿지 못했다.

물질 투과 능력.

아렌디르가 사용하는 이 능력은, 모든 물질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힘이었다. 두껍고 거대한 벽이 앞에 우뚝 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렌디르를 절대로 막을 수 없었다.

땅속마저도 물속처럼 헤엄칠 수 있게 해주는 그녀의 능력은, 대지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창도 방패도 만들 수 있는 트랄텍트리에게 가장 상극의 것이었다.

원래라면 트랄텍트리의 신력이 담긴 대지는 아렌디르가 쉽게 통과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아렌디르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구와 동맹을 맺고, 현찬과 만난 이후로 아렌디르는 훨씬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리쿠르드>.

아렌디르의 부족이 모시는 위대한 힘이자, 아렌디르와 본격적으로 계약을 맺은 신.

족장이었던 아렌디르가 드디어 리쿠르드와 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녀는 이전의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리쿠르드 또한 신급 영령.

트랄텍트리의 신력으로부터 자신의 계약자를 보호해주는 일이야 손쉬운 일이었다.

촤악!

아렌디르가 휘두른 단검이 트랄텍트리의 뺨을 스쳤다. 절대로 상처를 입지 않을 것만 같던 철옹성에 금이 갔다. 트랄텍트리는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성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방어는 관통하고 공격은 흘려낸다. 단순하지만 파괴적인 트랄텍트리의 지고한 공방이, 고작 한 개체에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네년은 누구냐.”

이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은 여신은 그녀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구의 지원군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세계의 최강자의 부인이 될 몸이지.”

“뭐?”

너무 뜬금없는 말에 트랄텍트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뭐, 이러면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은데.”

[지원군들의 정신 상태는 좀 지적할 게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실력만큼은 진짜니까, 너무 뭐라 하지는 말자.”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현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다시 가루로 변하며 현찬의 옷에 달라붙었다. 공중에 가볍게 뜬 현찬은 자신의 힘을 체크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푹 쉰 덕분에 소모된 힘은 거의 다 회복됐다.

오히려 각 신화의 주신들이 자신에게 넘기고 간 힘 덕분에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거대한 충족감을 느끼고 있을 지경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기만 해도 태산을 날려버릴 힘이 몸 곳곳에 흘러넘쳤다.

현찬은 주머니 안에 넣어놓았던 큐브를 꺼내 들었다. 아지다하카를 쓰러뜨리고 녀석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온 이 큐브야말로, 악신회주가 있는 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시간이 더 많았다면 이런 큐브 없이도 그의 본거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까.”

[그렇다 해도, 놈들이 사용하는 물건으로 넘어가는 거라면 좀 걸리는 게 있지 않을까. 일단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놈들의 본거지야. 혹시 거기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악신들이 더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언제 또 악신회주가 다른 차원과의 문을 강제로 열어서 새로운 적들을 쏟아낼지 모른다. 지금이야 일단 급한 불을 끄고 세계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고 있지만, 인명 피해가 너무 컸다.

더 피해를 늘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솔직히 증거도 뭣도 없는 감으로 하는 소리인데. 아마 이 큐브를 통해서 저기로 넘어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은 놈 하나뿐일 거야. 다른 녀석들 없이, 나를 포함해서 단둘만 거기에 있는 거지.”

[그걸 어떻게 확신해?]

“말했잖아. 감이라고.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래서 뭔가 묘하게 긴장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

헤르메스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상황과 증거를 따지며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던 현찬이 갑자기 감을 들먹이며 저렇게 말하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그러나 또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현찬이는 이미…… 인간을 초월했으니까.’

현찬은 인간이던 시절에도 남다른 직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찬의 감은 대개 들어맞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확실히 틀린 적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

빛의 신의 힘을 얻고, 스스로 영령의 격까지 올라간 현찬의 감은 이제 감이라는 걸로 퉁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지에 가까운 그것을 헤르메스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헤르메스는 결국 손을 들었다.

[하. 그래. 내가 뭐 어떻게 너를 막겠니.]

“에이. 너무 그러지 마. 이게 다 우리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알고 있어. 무엇보다 내가 좀 짜증이 나는 것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야. 조금이라도 뭔가 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데…… 오히려 내가 답답하네.]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잘 해주고 있어. 헤르메스.”

현찬의 진심이 담긴 말에 헤르메스는 ‘흥’ 하고 고개를 옆으로 픽 돌렸다. 퉁명한 행동과 다르게 헤르메스는 귓불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현찬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손가락 사이에 쥔 큐브에 힘을 주었다.

파직!

큐브가 부서지며 그 가루가 허공에 날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흩어지더니 이내 현찬의 앞에 고리 모양의 차원 문을 만들었다. 현찬은 그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말해서 긴장된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을 앞에 두고 마음이 차분할 정도로 현찬은 강한 심장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었다.

“가자.”

[그래.]

현찬과 헤르메스는 불안정하게 꿈틀거리는 차원 문에 들어갔다.

&

악신회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폐쇄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그의 방은, 천장과 벽 일부가 사라져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울퉁불퉁하게 제한된 풍경 너머로는, 우주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흐르는 거대한 은하수와 온갖 은하와 성운들. 회전하며 사라지는 별과 새롭게 탄생하는 행성의 무리. 순간의 강렬한 빛무리를 뿜으며 산화하는 거성과 희미하게 빛이 사라지는 왜성들까지.

그 모든 것을, 그는 거장이 손수 그린 명화를 감상하듯이 음미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기존 생명의 죽음.

모든 삶과 죽음의 순환은 우주라는 거대한 도화지 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오랫동안 봐 왔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는 언제나 봐 왔던 것이었다.

그는 우주를 보며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수십억 개가 넘는 톱니바퀴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장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오직 전지전능한 존재만이 만들 수 있는 지고의 물건.

악신회주가 보고 있는 우주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모든 기계장치의 극의이자,

그가 반드시 파괴해야만 하는 구시대의 산물이었다.

“추하지만 아름답다…… 고 생각하지 않나?”

악신회주는 등을 돌리지도 않고 그렇게 나지막한 물음을 던졌다. 쿠르릉! 그 순간 그의 방을 장식하는 거대한 석문이 좌우로 열리며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는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은은한 광채를 뿜으며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따라 고고히 걸어오는 남자는 악신회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 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그것은 네가 너무 짧은 순간만을 살아왔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겉으로 보면 아름다움을 표방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거든.”

아름다운 그림들도 세세히 살펴보면 결국 물감의 흔적일 뿐이었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 근간이 되는 것은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

“아래에 쌓이고 쌓인 죽음이 이루는 세상이, 과연 존재의 가치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있겠지.”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아니, 이해하기조차 싫은 걸지도.”

“아주 잘 알고 있잖아. 바꿔 말하면, 너 또한 다른 자들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그것도 그렇군.”

악신회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현찬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에게 모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형상을 취한 검은 그림자였을 뿐. 다만 얼굴에 눈으로 추정되는 것만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곳까지 도달했구나. 세계의 구원자여.”

“그런 거추장스러운 이름으로 불린 적은 없었는데.”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게는 보인다. 너에게 걸고 있는 세계의 기대가. 그것은, 이 세계의 근본부터 뒤흔들며 거대한 멸망을 초래할 나를 막기 위해서겠지. 네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일 터.”

“개소리. 여기에 온 것은 다름 아닌 내 의지였어. 그리고 네가 이따위 짓만 벌이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에 올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런가. 너는 아직 잘 모르고 있나 보군.”

악신회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방에 남아 있는 자신의 옥좌로 걸어가 거기에 앉았다. 그의 눈은 현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그의 손이 그의 턱을 괴었다.

“어차피 우리가 싸우는 것은 세계가 정한 필연적인 운명이지. 그렇다 해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바로 무기를 뽑아 들고 싸우는 짓은 야만적이지 않은가.”

“뭘 어쩌자는 거야?”

“그대. 그리고 그대의 뒤에 있는 신까지. 어디, 싸우기 전에 이야기를 좀 나누지 않겠는가?”

원래라면 이런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현찬은 세계를 지키는 쪽이었고, 악신회주는 세상을 파괴하는 쪽이었으니까.

서로 자신의 입장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고,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악신회주는 나름의 이야기라는 것을 나누고 싶었다.

결국에는 이곳까지 당도한 사내와 나름의 대화를 섞어보고 싶었다.

그걸로 서로가 마음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찰나의 생각이 그에게 잠시의 여흥이라도 즐기게끔 만든 것이었다.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내가 오랫동안 봐 온 추악한 온상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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