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256화 힘의 전승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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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본신의 힘을 드러낸 튀폰의 거대한 육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몸통 위로 바닷물이 밀려왔다. 튀폰의 육신이 순식간에 바다에 빠르게 잠겼다. 그는 눈동자만 굴리며 하늘에 지엄하게 떠 있는 제우스를 노려보았다.
“제우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그러나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 튀폰은 이미 그 목숨에 경각에 달한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세 좋게 현찬을 향해 달려든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과 에르카닐 또한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하고 쓰러져 있었다. 버려진 세계의 주민 중 생존자는 단 하나였고,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
마지막 남은 생존자마저도 숨이 간당간당했다.
“허억! 허억!”
에르카닐은 자신의 무기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들거리는 다리와 계속 쏟아져 나오는 거친 숨소리는, 이미 그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현찬은 말없이 에르카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이미 에르카닐이 어떠한 과거를 지녔는지도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에르카닐.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엘브론드 차원의 마지막 생존자.’
그곳에서 그는 세계를 주름잡던 거대한 왕국의 왕자였다. 그들이 살아가던 세계는 너무나도 평화로웠고, 어디를 가도 아름다운 풍경들이 즐비했었다. 사계절이 없이 낮은 따뜻하고 밤에는 시원했으며, 오광의 빛이 찬란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그러나 <대통합>이 일어나면서 그가 살던 세계는 뒤바뀌었다.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숲이 불타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많은 전사가 싸움에 나섰지만, 전선은 밀리기만 했고 세계는 빠르게 황폐화했다. 에르카닐이 영웅의 제단까지 가서 그곳에서 우승했음에도 말이다. 이미 초반에 잃어버린 기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세계는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괴물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파괴를 자행했고 엘브론드 차원의 생명력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갔다.
그렇게 그가 살던 행성은 그대로 파괴되어 조각조각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 일부 차원은 다른 차원에 맞닿아 게이트 현상을 일으켰고, 그 차원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다른 차원의 몬스터가 되었다.
일부 조각은 차원의 틈새 사이로 빠져들어 가 그대로 틈새에서 소멸했다.
오직 에르카닐만이 그 궁극의 파멸 속에서 살아남았다.
정확히는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받게 된 것이었다.
온몸이 검은색의 무언가로 이루어진 존재가 에르카닐을 살려주었다.
[너의 세계를 부활시키고 싶나? 그렇다면, 나를 도와라. 네가 가진 씨앗의 힘이라면, 충분히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카닐은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종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세계의 씨앗을.
이것만 있다면 이미 멸망한 에르카닐의 차원을 부활시킬 수도 있었다. 이미 죽은 자들을 돌아오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새로운 동족들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악신회주는 에르카닐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건으로 씨앗의 힘을 빌리겠다고 했다.
에르카닐은 그 제안을 승낙했다. 원래는 죽었어야 할 그를 살려준 것도 악신회주였고, 기회조차 없는 그에게 기회를 준 것도 악신회주였다.
그의 종족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씨앗을 남의 손에 넘긴다는 것은 조금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오래된 낡은 법률을 들먹일 그의 고향은 이미 사라졌다. 에르카닐은 뭐라도 해야 했다. 그의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악신회주에게 씨앗을 건네주었다.
악신회주는 그 씨앗의 힘을 이용해 온갖 다양한 것들을 했다.
실제로 지구와 <심연>을 이은 것도 이 씨앗의 힘을 이용해 만든 인공씨앗이었다. 악신회주가 에르카닐에게 나름 잘해준 이유도, 그만큼 에르카닐이 지니고 있던 씨앗의 능력이 전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현찬은,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이제 끝이야. 포기하지그래? 너는 더 싸울 힘도 없어. 이 이상 덤벼 봤자 무리라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크흐! 웃기지 마라…….”
“씨앗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거라면 소용없다고 말해주지. 애초에, 지금 네놈의 손에 없잖아?”
“……!”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을 현찬이 자연스럽게 꺼내자 에르카닐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그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큭큭. 전부 다 알고 있는구나. 그래. 나에게 더 씨앗은 없다. 방도가 없지.”
“그러니 포기해. 이미 멸망한 너의 세계를 재건하는 일은 불가능해.”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아. 회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씨앗의 힘이라면 충분히…….”
“다른 세계를 멸망시켜가면서?”
“…….”
씨앗의 힘이 대단하다 한들 만능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씨앗을 심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을 토양이 필요했다.
즉, 에르카닐의 세계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되는 새로운 차원이 필요했다.
사람이 살 수 있고, 생명력이 풍부한 대지를.
그리고 그런 곳 중에서, 생명체가 살지 않는 곳은 없었다.
즉, 그가 고향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필시 기존의 차원 하나를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곳에 있는 생명체까지 전부.
에르카닐이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그게 뭐! 뭐가 어쨌다는 거냐! 내가 살던 세계를, 내가 부활시키겠다고 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다른 놈들은 알 바가 아니야! 내 일족을 위해서라면 그만한 희생 따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
“네놈은 모르겠지! 지킬 것이 남아있는 네 녀석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 기분을 알아?! 눈앞에서, 소중한 것이 사라져 버리는 기분을!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하고, 그대로 없어지는 기분을 아느냐고! 그런데도 나에게 그런 하찮은 도덕관념을 들먹일 생각이냐!”
이미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봉착했을 텐데도, 에르카닐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현찬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에르카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거친 그의 콧김만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고 지쳤는지 증명했다.
묵묵히 잠겨있던 현찬의 입이 열렸다.
“내가 그런 양심을 너에게 챙기라고 그런 말을 한 거로 생각해?”
“뭐……?”
“자신의 세계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뭐든지 하겠다. 뭐, 좋아. 만약에 내가 너의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현찬은 에르카닐이 동족을 살리기 위해 다른 종족을 희생시키는 점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네가 만약에 그렇게 행동하면 결국 지구는 멸망해야 한다는 거잖아.”
“…….”
“네 말대로야. 나 또한 사람들이 죽고, 너처럼 씨앗이 있으며 그걸로 다시 인간들을 번성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 거야. 그렇다는 건, 당연히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려고 하지 않겠어? 내가 너의 행동을 나쁘다고 비난한다고 생각해? 천만에.”
현찬은 손에 쥔 검을 뻗어 에르카닐을 가리켰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날의 끝이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너는 결국 우리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무뢰배고. 나는 내 세계를 지키려고 할 뿐이야. 선하고 나쁘고 그런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 없어. 중요한 건 그거지. 나는 지키고. 너는 파괴한다.”
이보다 더 깔끔한 답이 어디 있을까.
뭐라고 말하려던 에르카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푸하하하! 아주 걸작이야! 훌륭한 대답일세!]
[허허허.]
[흐흠. 이거 참.]
현찬과 계약을 맺은 주신들은 현찬의 통쾌하고 시원한 한마디에 웃음을 터뜨렸다. 현찬은 단순히 선하다는 관념에 얽매인 사내가 아니었다. 선하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냥 적이니까 싸운다.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사고관을 가진 현찬의 태도가 오히려 신들에게 좋게 다가왔다.
“대충 이야기는 다 끝났다고 보면 되겠네. 너는 결국 네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너라면 내가 봐준다 하더라도 몇 번이고 기회를 잡아서 어떻게든 너희 세계를 재건하려고 들겠지. 그러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에르카닐은 악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너무 선해서 피해를 본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너무 약했을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에르카닐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현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현찬은 말없이 검에 힘을 주었다. 손에 쥔 테레이오스테가 눈부신 백광을 뿜어냈다. 세계가 빛에 휩싸였다. 모든 감각과 소리가 사라졌다.
빛이 사라졌을 때, 주위에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망망대해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에르카닐도,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도, 튀폰도.
모두 사라졌다.
[계약자여. 우리는 이만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그대를 돕지 못하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지만, 이 이상 현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말이지.]
안 그래도 현찬도 그들을 현계에 잡아두는 것에 조금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무리 현찬이 엄청나게 강해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각 신화를 대표하는 주신들. 오랫동안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기도 뭣 하니, 마지막으로 선물을 남겨주지.]
[우리 힘의 일부라네.]
[부디 세계를 지켜주기를.]
주신들은 모두 떠나기 전에 현찬에게 자신의 권능과 힘 일부를 넘겨주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선물이었다. 무려 각 신화를 대표하는 주신들이 자신의 힘을 현찬에게 전달해준 것이니까.
그것은 힘과 함께, 그들의 근간이 되는 역사를 쌓은 세계를 지켜달라는 의지의 전승이었다.
현찬은 그 힘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지금의 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패기가 넘치는 단호한 대답에 신들은 만족한 얼굴로 떠났다. 모두가 떠나가고 헤르메스는 겨우 숨통이 트였다며 늘어졌다.
[으아아. 무슨 시집살이 처가 온 새댁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간이 큰 헤르메스라 할지라도 저렇게나 다양한 주신들이 있는 이상 함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현찬은 그런 헤르메스에게 장하다며 웃어 보였다.
“이제 상황 대부분은 정리가 다 된 것 같지?”
[그렇지.]
현찬이 세계 곳곳에 설치한 마커의 힘 덕분에, 용갑병들은 빠른 속도로 지구 곳곳을 누비며 다른 차원의 침략자들을 휩쓸어버리고 있었다. 빛의 날개를 펼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용갑병은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였고, 그들은 제국의 구동 기사를 벌했다.
현찬이 소환한 역사 속의 영웅들 또한 쉔니르의 기병들을 쓸어버리고 그 잔당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남은 것은 악신회의 여러 신과 싸우는 오버랭크 헌터들이었지만.
“그마저도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네.”
현찬의 눈은 이미 끝나가는 싸움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