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5화 힘의 전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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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울부짖었다.
그들이 품었던, 과거 지고한 격을 가진 존재들의 등장에 모든 세계가 경외심을 표했다. 거칠게 요동치던 바다가 죽은 듯이 잠잠해지고, 몰아치던 광풍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일순 세계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묘한 고요함이 흘렀다.
“이건……?”
현지와 안드레이를 상대로 지지부진한 싸움만 지속하던 튀폰은, 공격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힘의 파동을 주시했다. 아주 머나먼 곳, 시칠리아섬과는 거의 지구 반대편에서 흘러나오는 이 힘.
분명히 순간이지만 그는 세계의 흔들림을 느꼈다. 그리고 이 힘의 주인 또한 느꼈다.
“제우스!”
튀폰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렇게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가 한때 승리했던 신이기도 하며,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준 신이기도 한 제우스의 기운을.
그를 죽이기 위해 태어났고,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튀폰은 절대로 이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
그것은 현지의 계약자인 아르테미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멀리서 느껴지는 힘을 느꼈다. 분명히 올림포스의 주신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힘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와 비슷한 수준을 가진 힘이 제우스의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이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이 거대한 힘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나 신과 계약을 한 오버랭크 헌터들은 모두 뚜렷하게 느꼈고, 그들과 싸우고 있던 악신들 또한 느꼈다.
“뭐야. 이거. 장난치고는 좀 심한 거 아니야……?”
세트는 힘의 틈새에서 느껴지는 라의 향기에 입꼬리를 경련시켰다. 라의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라와 어깨를 견주고 나란히 할 수 있는 격을 지닌 존재들이, 최소 넷에서 다섯은 더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지진을 일으키고 세계를 무너뜨리려고 하던 트랄텍트리도,
도쿄의 도심을 휘젓는 8개의 머리를 지닌 뱀 야마타노오로치도,
전부 싸우는 것을 멈추고 피부를 바르르 떨었다.
그렇게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서 현찬은 하늘을 향해 뻗었던 팔을 내렸다. 그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기세를 일으키며 어떻게든 저항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고작이었다.
세계 전체가 악의를 가지고 짓누르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두 다리로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 이미 그들의 한계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버려진 세계의 주민이자,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 켈라우는 떨리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붙잡아 고정했다. 몸 일부가 물로 이루어진 그는 한때 한 세계에 이름을 날리던 정령이었지만, 그 세계가 멸망하고 겨우 명맥만 잇는 타락한 정령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과거에 가졌던 힘과 격은 무시할 수 없어서, 버려진 세계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선천적으로 물의 능력을 타고난 그의 존재는 절대로 세계 어딜 가도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거기서 더욱 강해져서, 정령의 존재로서 이제 신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는 존재로 격상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켈라우는 진정한 신을 만났다.
‘어찌 한 존재에게서, 저렇게나 엄청난 존재의 기운이 여럿을 풍긴단 말인가.’
신의 자리를 넘보는 켈라우조차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신들의 힘에, 그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겨우 넘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벽이 막아서는 아연한 기분.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없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이 낙하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걸…… 이길 수 있을까?’
처음에 느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부정. 그다음은 가짜일 거라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마지막은 진실임을 깨달은 절망. 켈라우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이 자리에 10명이 넘게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이쪽을 유리하게 쳐줘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하는가?’
싸우면 진다. 강자로서의 직감은 이미 미래를 결정짓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사고해도, 감성적으로 받아들여도 이 싸움은 이미 정해진 레일을 따라 달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당장에도 현찬이 내뿜는 기운을 견디는 것이 고작인 상황에서, 어찌 싸움이라는 걸 할 수 있겠단 말인가.
만약에 싸움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싸움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었다.
침략자를 향한 신이 내리는 일방적인 천벌이면 오히려 다행이다.
그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새로운 고향을 찾겠다는 꿈과 함께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도망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해도 그다음은?
결국, 도망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루하루를 고되게 만드는 틈새의 삶이 아닌가.
사랑을 나눠 태어난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함께 했던 동료들마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삭아서 사라져 버리는 그 끔찍한 곳에서,
언제쯤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빛만을 기다리며, 그 끔찍한 구덩이의 아래에서 고개만 들고 하늘을 올려다 봐야 한단 말인가.
그런 삶을.
이미 희망을 맛본 상황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절대로 없다!”
발작적인 켈라우의 외침에, 두려움에 떨던 그의 동료들이 정신 차렸다.
“우리는 여기서 물러서면…… 미래가 없다!”
“…….”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에 섰는가! 그냥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벌써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면, 우리들의 미래는? 우리의 아내와 자식들, 가족들의 미래는? 다시 그 끔찍한 곳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한 줌의 희망마저 붙잡고 있을 건가!”
켈라우의 말에 다른 자들의 눈동자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꺼져가던 희망이라는 불길은, 다시 일어나 뜨거운 화마가 되어 그들의 몸을 뜨겁게 지폈다.
“일어나서 싸워라! 우리는 지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멀리서 거대한 기척이 섬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현찬은 그것이 자신이 쓰러뜨린, 아지다하카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검은빛은 순식간에 섬을 둘러싼 현찬의 힘을 헤집고 현찬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에르카닐…….”
새 가면을 벗어던진 에르카닐은 현찬과 똑바로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예전에 봤던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아지다하카의 힘을 계승했구나.”
“…….”
에르카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또 다른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제우스으으으으!”
영혼마저 불사르는 뜨거운 증오감이 느껴지는 고함. 핏발이 선 눈동자로 빠르게 지구 반대편에서 이쪽까지 날아온 것은 한창 난동을 피우고 있던 튀폰이었다. 그는 다른 신들마저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튀폰의 눈에는 오직 제우스만 보였고, 제우스 또한 그런 튀폰만 보고 있었다.
[튀폰인가. 설마 이 지긋지긋한 운명을, 여기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제우스.”
새롭게 등장한 두 조력자에 의해서 켈라우는 자신을 억누르던 압력이 상당히 약해졌음을 깨달았다. 튀폰이라면 그들조차 긴장할 수밖에 없는 강자. 그리고 에르카닐은 처음 만나지만 분명 그들의 동료가 분명할 터.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현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거 참. 누가 선한 역이고, 누가 악역인지 모르겠네.”
저들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없애기 위해 찾아온 침략자들이다. 자신은 그런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세계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어째 저쪽의 사정을 보면 이쪽이 일족의 미래를 억압하는 악역처럼 보이지 않은가.
[계약자여. 세상에 선과 악은 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가 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브라흐마는 단아한 목소리가 조금 흔들릴 뻔한 현찬의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현찬의 관점에서는 침략자인 그들이 악이었고, 저들의 처지에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현찬이 악이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양보할 수 없이, 반드시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겠죠.”
그러니 싸워야만 했다.
상대방의 사정을 봐주면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모든 힘을 다해서 싸우고 승리해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야만 했다.
조금의 안타까움, 동정심에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현찬이 짊어지고 있는 것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누구의 신념이 더 강한지의 대결만이 남았을 뿐.
“너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또한 봐주면서 할 생각은 없어.”
봐주려고 했다면 이만한 신들을 부를 일도 없었다.
저들이 결사의 각오를 한 만큼 현찬 또한 그와 비슷한 각오를 끝마친 뒤였다.
무엇을 위해서 인간마저 벗어 던지고 이렇게 되었는가. 현찬의 각오 또한 저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신들 또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제우스는 번개를 꺼냈고 환인은 자신의 수하인 풍백, 운사, 우사를 불렀다. 브라흐마는 자신의 여러 개의 손으로 각자 인을 맺었으며, 라는 거대한 태양 함선을 꺼내 들었다. 마르두크는 의지만으로 마법들을 발현시켰다.
악신회 또한 반격에 들어갔다.
하늘의 길이 열리고, 무수한 별빛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거대한 화산의 짐승이 불길을 일으켰고, 주변의 파도가 수백 미터의 해일처럼 일어나 몰아쳤다.
신화 속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은 순식간에 그들이 딛고 있는 섬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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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회주는 눈을 뜬 채 세계와 세계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그가 그토록 바라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봐 온 풍경이었지만, 이때마다 그의 차분했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수차례나 실패했지만, 그는 절대 절망하지 않았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번에, 다음번에도 안 된다면 그 다음번에도.
그렇게 버티고 버틴 세월은, 도저히 그마저도 감당이 되지 않았었다.
그래도 버텼다.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그 세월을 넘어섰고.
결국에 마지막의 마지막 종착점까지 도달했다.
“이 세계는 이제 여기서 끝을 맺는다.”
세계는 언제나 그를 방해했다. 악신회주는 세계의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했고 몇 번이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악신회주의 마지막 도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아무리 너라고 해도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세계여. 나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을 깨부수고, 새것을 세울 테니까. 옛것인 너희들은, 저 나락의 아래로 떨어져 태초의 공허 속으로 사라져라.”
쿠구궁!
악신회주가 머무는 방이 떨렸다. 아니, 그의 방뿐만이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새에 숨겨진 그의 본거지가 떨리고 있었다. 이는, 차원이 흔들릴 정도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였다.
“과연, 너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구나.”
진원의 출처는 지구. 그것도 그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현찬이었다.
악신회주인 그가 모든 것을 다 한 만큼, 세계 또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싸움이니까.
“마지막에 어울리는, 큰 무대로군.”
그렇다면 기꺼이 거기에 올라서서 놀아주도록 하마.
악신회주의 의지에 따라 그의 본거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