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54화 힘의 전승 (2)
_
<버려진 세계>.
혹은 버려진 땅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름만 듣는다면 모든 것을 외면받은 세계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다르다. 이름에 ‘세계’가 들어가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부르기 민망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세계의 파편들이 차원의 틈새에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세상에는 많은 세계가 있고, 세계와 세계 간에는 차원의 벽이 막고 있다. 그러나 차원의 벽에도 틈새는 있고 그사이에는 온갖 별세계가 펼쳐져 있다.
다양한 세계가 있고, 그것이 생성되는 만큼 우주에는 다양한 세계들이 멸망을 맞이한다.
우주를 통틀어 몇 차례나 이어졌던 <대통합>.
그로 인해 소멸하거나 멸망한 차원은 조각조각 나 우주 곳곳에 흩뿌려졌다.
그 조각의 일부는 차원과 차원의 틈새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처음에는 틈새에 사라지는 족족 전부 사라졌지만, 세월이 흐르자 불안정한 틈새의 사이에서도 점차 땅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공간 내에서 생성된 땅은 주변의 대지를 불러들였고 점차 거대해졌다.
그렇게 멸망해버린 세계의 파편이, 하나둘씩 하나로 뭉쳐지며 생성된 곳.
그곳이 바로 지금의 <버려진 세계>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옛 <대통합> 시절 다른 차원에 침략을 받아 멸망하거나, 혹은 우주 자체의 재난으로 인해 사라진 세계의 주민들이 생존하고 살아가는 곳이었다.
약했기 때문에, 혹은 운이 없어서 이곳까지 떨어진 주민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적대했다.
자신의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믿을 수는 없었고, 서로를 향한 불신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무리 틈새 사이에서 안정된 <버려진 세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약간의 안정일 뿐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몰아치는 우주 폭풍과, 흔들리는 차원의 틈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방사능의 덩어리들은 생명체가 살기에 너무나도 험난한 환경이었다.
세계가 멸망하고, 운이 좋아서 이곳까지 넘어온 이들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일이 대다수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고 지옥 같은 세계는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생명이란 매우 끈질긴 것인지라,
이런 끔찍한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거친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며 더욱더 강해진 자들.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를 택할 수밖에 없던 자들.
자연스레 환경을 극복하고 스스로 지닌 한계마저 넘어선 자들
그들이 바로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이었다.
서로 종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사상조차 달랐지만, 그들은 생존이라는 이름의 아래에서 하나로 뭉쳤다. 하나로 뭉친 이들은 더욱 강해졌고, 그들의 의리와 정은 더욱 끈끈해졌다.
죽어가는 세계의 파편들을 기워서 만든 누더기 같았던 세계가 어엿하게 하나의 차원으로 성장하게 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차원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인지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은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주어진 환경이 너무나도 척박한 곳이어서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었다.
새롭게 유입되는 차원과 그곳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있었음에도 인구는 크게 늘지 않았다.
결국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은 하나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버리고, 새로운 고향을 찾으러 떠나는 것.
하지만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행동을 쉽게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원의 벽은 너무나도 튼튼하고 강했으며 틈새에서 벽을 넘어서서 다른 차원으로 갈 수는 없었으니까.
세계의 흐름에 따라 차원의 틈새로 떨어지는 것은 가능해도 틈새에서 다른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만약에 가능했다면 그들은 이런 힘겨운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닌,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 것은 결국 주어진 한계에 봉착한 탓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튀폰>이었다.
회주의 명령을 받은 튀폰은 직접 그들이 사는 세계로 내려갔다. 차원과 차원의 틈새, 모든 쓰레기가 버려진 곳으로 군말 없이 내려간 튀폰은 그들과 마주하며 단판을 벌였다.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새로운 세계를 열고 싶지 않나?’
그것은 버려진 세계 주민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말이었다. 그들도 사실은 바라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변화를.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대통합>에 의해 도태되고 버려진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고향을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악신회주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줬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줄 수 있다고, 더는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튀폰이 내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악신회주와 손을 잡고 지구를 침공한 것이었다.
“이곳 또한 아름다운 세계임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렇게 말을 하며 그림자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곳곳에 푸른 비늘이 나 있는 이국적인 종족이었다. 푸른빛 머리카락은 물처럼 찰랑거리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 주위에는 물이 중력을 무시하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 나름의 사정이 있기에, 이 세계를 파괴하는 데 일조할 수밖에 없지.”
“다른 녀석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현찬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은 모든 멸망한 세계에서 몰린 자들이라 그런지 전부 종족이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혼혈까지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종족들도 있었으며 온몸이 바위로 이루어진 종족도 있었다. 벌레처럼 생긴 자들도 있었고 덩치가 거대하며 팔이 10개나 달린 녀석이 있는가 하면, 몸이 기계로 이루어진 자도 있었다.
수는 많지 않았다. 수십만 단위로 침략을 개시한 다른 세계에 비하면 이들의 수는 1천도 되지 않았다. 이 거대한 섬에 모인 자들의 수를 다 합치면 300 정도. 어떻게 보면 매우 많은 수 같지만 한 세계의 인구로 따지면 엄청나게 적었다.
물론 모두가 넘어온 것은 아니었고 싸울 수 있는 자들만 온 것이지만 그런데도 3천은 적었다.
하지만.
[현찬아. 이 녀석들, 하나같이 다 범상치 않아.]
‘알고 있어.’
그들이 풍기는 기세는 전혀 적은 수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에 현찬의 정면에 서서 말을 꺼내는 물을 다루는 남성만 하더라도, 느껴지는 힘만 보면 이미 S랭크 헌터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녀석마다 악신회 신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거의 그에 웃도는 힘을 지니고 있어.’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질 수밖에 없던 존재들.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은 그들은, 아무리 현찬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에 현찬이 영령의 세계로 떠나기 전의 상태였다면, 50명도 상대하지 못하고 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저들은 강했다.
“솔직히 너희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일반 시민들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지. 그저 묵묵히 내 뒤를 쫓아왔을 뿐. 그 점을 가감해서 용서해 줄 테니까 이만 사라지는 게 어때? 아직, 너희는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어.”
현찬의 말에 선두에 선, 물로 이루어진 인간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들을 상대하지 않은 것은 그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니라도,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네놈만 죽이면 됐으니까.”
“그래서, 지금 날 죽이겠다고?”
“필요에 따른다면 그렇겠지. 그대는 이 세계의 가장 강한 자. 영웅으로 불리는 상징적인 존재겠지. 그대가 죽기만 한다면 이 세계는 이제 한 풀 크게 꺾이게 된다. 이런 아름다운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결국…… 생존의 문제 때문이라는 거겠네.”
이쪽이 더 좋은 조건을 내걸 테니 이쪽에 붙으라는 말은 아마 먹히지 않으리라.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족이었지만 신념이 있었고 의리가 있었다. 현찬이 제안해도 그것을 거절할 가능성이 컸다.
현찬은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었다.
“솔직히 악신회주라는 녀석과 싸우기 전까지는 힘을 되도록 빼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싸움을 피하고 싶었던 건데. 하. 뜻대로 되지는 않겠다는 거구나.”
“힘을 뺀다? 그것참 웃기는 말이구나.”
물로 이루어진 인간은 현찬의 말이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현찬이 하는 말은 마치, 자신들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이 솔직히 강하다고 어딜 가서 자부심을 막 부리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름 험난한 세상에서도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힘을 지니기도 했다. 그런 존재가 이 섬에만 무려 3백이나 있다.
현찬의 말이, 그런 자신들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지금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인가? 이 세계의 최강이라고 자부한다 하더라도, 너무 자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니. 자만하는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너희들을 인정하고 있는 거라고. 너희들이 강하니까, 나라도 쉽게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현찬은 대충 눈으로 가늠한 존재들만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살아있는 녀석들임에도 거의 영령에 준하는 존재들이 태반이었다. 특히나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들은…… 정말로 신급에 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아마 어지간한 세계로 간다 하더라도 그곳의 정점을 먹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내가 너희들을 강하다고 인정해준 거야. 아니. 내가 아닌 ‘우리가’ 인정하는 거겠지.”
“…… 아무래도 더 이상의 말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 같군. 그대의 오만함은 그대를 죽임으로 충분히 벌을 내리도록 하지.”
“안타까운 일이야.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부딪칠 수밖에 없던 거니까.”
현찬은 저들을 동정했다. 결국,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국>이나 <쉔니르>의 차원, 혹은 벌레들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의 강함만 보더라도 현찬은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아남고 생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어쩌면, 악신회가 먼저 접근하지 전에 서로 만났다면
분명히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야기는 끝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이 내뿜는 기세가 순식간에 섬 전체를 강하게 뒤덮었다.
쿠웅!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섬이 크게 주저앉았다. 콰아아아! 섬 주위의 바다가 바깥으로 밀려나다가 움푹 주저앉은 섬을 향해 다시 몰려와 쓰나미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해일은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이 뿜은 격에 의해 막히며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기세를 방출한 것만으로도 자연을 뒤흔드는 엄청난 힘이 몰아쳤다. 섬에 자라난 숲의 나무들이 순식간에 찌푸려졌고 바위마저 산산 조각났다. 그 거대한 압력을 견디며 현찬도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렇다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주지.”
봐주면서 싸우는 것은 저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게다가, 봐주면서 쉬엄쉬엄 싸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현찬은 검을 쥔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파앗!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현찬의 손에 쥐어진 테레이오스테가 여러 개의 빛의 조각으로 나뉘며 허공에 흩어졌다. 그 빛의 조각은 허공에 둥둥 뜬 채 강렬한 빛을 토해내고, 눈부신 광휘와 함께 새로운 존재들을 불러냈다.
“신들이시여, 계약에 따라 저에게 힘을 빌려주시기를.”
[알겠네.]
[계약에 따르는 바다.]
[우리가 원하던 일이었으니.]
[그대를 돕도록 하지.]
콰아아아!
하늘에 번개가 몰아치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의 빛이 몇 배는 강해졌으며 바닥에는 피부를 시리게 할 냉기가 스며들었다. 섬 바깥으로 튕겨 나가던 바다마저 두려움에 빠져 잠잠해졌다.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무시무시한 힘이, 섬 하나에 집약되었다.
[허허허. 설마 우리 정도나 되는 신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참 오랜만이지 않나?]
번개를 뿜는 제우스가 털털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동의를 구했다.
[이런 자리도, 썩 나쁘지는 않겠지.]
마르두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내 후손이 내린 땅에서 이런 기특한 인물이 태어나다니, 이 어찌 경사가 아닐 수 있겠는가.]
환인이 하얗고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 곁에서는 브라흐마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고 라 또한 위엄을 지키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