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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253화 (253/265)

# 253

253화 힘의 전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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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저는 이제 끝인 거로군요.’

현찬이 떠나버리고 홀로 폐허에 남아버린 아지다하카는 망하니 눈동자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눈부셨고, 시릴 정도로 밝았다. 그것은 현찬이 지구 곳곳에 설치한 마커를 제외하고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지다하카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부수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악이라는 낙인을 지고서 태어난 그는, 삶의 목적 자체가 <앙그라 마이뉴>의 의지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향해 악성의 포효를 내질렀다.

교활한 지혜를 활용하여 사람들끼리 이간질했고, 그것이 먹히지 않는다면 힘을 이용해 전부 찍어 눌렀다.

그 악행의 끝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지다하카는 파멸을 맞이하고 말았다.

육신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미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덩치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흘러나오는 피도 많았다.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평야의 중심에, 붉은 웅덩이 위에 누워있는 백색의 삼두룡은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광경을 연출했다.

아지다하카는 자신이 이제 곧 죽는다는 걸 깨달았다. 육신을 가지고 하계에 내려온 이상 그 또한 피륙으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피를 많이 흘리고 상처가 심하면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 죽음이 그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의 진체는 영령의 세계, 그것도 아주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으니까. 여기서 죽으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정신이 돌아가는 것뿐이다.

유일한 단점이라고 한다면 상당한 힘을 가지고 하계에 강림한 만큼, 진체에 큰 손실이 가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그마저도 결국 시간이 흐른다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지다하카는 이 차오르는 슬픔과 서러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분하네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현찬을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현찬은 아지다하카를 보란 듯이 때려눕히고 그의 목숨을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고 자리를 뜨기까지 했다.

아지다하카가 이런 취급을 받을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모욕적인 처사였다.

그러나 아지다하카는 현찬의 이 행동 자체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부분에서 크게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가 화가 나는 것은 그저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했다는 것과.

‘그분의 곁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것…….’

영령의 세계로 가게 되고 <앙그라 마이뉴>에게서 벗어나 완전한 자신만의 자유를 되찾은 아지다하카는 삶의 목적을 상실했다. 만들어진 레일을 따라 달리는 삶이었음에도 거기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자유를 찾은 뒤에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 동안 무료한 시간을 잠으로 보냈던 그가, 하계로 내려와서 처음 만난 것이 바로 그가 모시는 주인이었다.

악신회주.

악신회의 주인이자 아지다하카가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존재.

그는 애초에 이름이 없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아지다하카에게 자신은 지금 움직일 장기 말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함께 이 세계를 뒤엎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자존심이 높은 악신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악신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무지였을까.

아지다하카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짙은 어둠에 잠겨있던 그는, 그제야 빛이라는 것을 본 것 같았으니까.

‘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아지다하카는 악신회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악신회주라는 이름조차도 아지다하카가 지은 것이었다. 다른 악신들까지 모인다면 그들을 통솔하고 통제할 이름은 필요했고 악신회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주인이시다.

그 무엇의 명령으로 인한 것이 아닌, 나의 순수한 의지로 선택한,

나의 진짜 주인.

아지다하카는 모든 열성과 정성을 다하여 악신회주를 모시기로 다짐했다.

그의 곁에 서지 못해도 좋았다. 그의 뒤에 서서라도 그가 이루고자 하는 세계의 끝을 바라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의 명령을 들었다.

그렇기에 슬픈 것이었다.

자신의 여정은 결국 여기서 끝이라는 사실이.

철벅!

그 순간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 웅덩이를 헤치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 아지다하카는 반쯤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소리의 주인은 기척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현찬이 다시 그를 마무리하러 온 건 줄 알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는 순간 아지다하카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에르카닐.”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열어 겨우 그 이름을 불렀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에르카닐이었다. 신들로 이루어진 악신회에서도 유일하게 신이 아닌 인물.

이미 멸망해버린 세계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여기에는 어쩐…… 일이죠.”

에르카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악신회의 멤버들은 에르카닐을 싫어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세트의 경우에는 대놓고 에르카닐을 적대하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는 애초에 이쪽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있지만, 신들보다 나약한 주제에 악신회주의 비호를 받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 점이 어쩌면 다른 신들에게 괘씸함을 불러일으켰던 걸 수도 있었다.

“아지다하카 님이 돌아오시지 않아서 직접 찾으러 왔습니다.”

에르카닐은 아지다하카가 거의 반죽음 상태로 이렇게 누워있음에도 놀라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그의 미성은 차분했고 듣기 좋았다. 아지다하카는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회주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겁니까?”

“아닙니다. 회주님께서는 이제 거사에 직접 들어가셨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으십니다. 제가 직접 찾아온 겁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게도, 저는 패배했습니다.”

아지다하카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음에도 현찬에게 패배했고, 이렇게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불씨마저 거의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렇게 에르카닐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쩌면 그의 강렬한 의지가 힘을 내서인 걸지도 몰랐다. 촛불도 꺼지기 직전에는, 가장 뜨겁게 타오르니까.

“회주께서는…… 무사히 거사에 들어가시는 거겠죠?”

“그분께서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의심이란 추호도 섞이지 않는 신뢰의 대답에 아지다하카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자신조차 의심한 회주의 능력을, 에르카닐은 한순간도 그 믿음에 배신을 새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에르카닐의 모습 때문에 회주가 그를 가장 아꼈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야말로 가장 그분을 옆에서 잘 지켜본 걸지도 모르겠어요.”

아지다하카도 사실 에르카닐을 질투했다. 자신보다 격이 떨어지는 존재가 그분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도 우스웠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꼬웠다.

다른 신들이 그를 대놓고 조롱했을 때 겉으로는 행동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악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품기도 했다.

아지다하카는 눈을 감았다.

“에르카닐. 저의 힘을 받으세요.”

“…… 아지다하카 님.”

에르카닐은 아지다하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의 힘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계승한다는 소리였다. 신이, 그것도 하계에 내려온 악신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심각할 경우 아지다하카는 죽을지도 모른다. 하계에서의 육신의 죽음이 아닌, 영령의 세계에서도 사라지는 완전한 소멸을. 아지다하카는 그것을 감안 하고서라도 에르카닐에게 자신의 힘을 계승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신이기에,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회주님을 믿고 따르는 당신이라면, 회주님께서 신뢰하는 당신이라면…… 어쩌면 제가 해내지 못한 일들도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 해도 아지다하카 님이 위험하게 됩니다.”

최소 힘의 영구결손에서 최대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는 무모한 도박. 심지어 에르카닐이 그 힘을 제대로 계승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아지다하카는 완고했다.

“당신도 알 겁니다. 강현찬이라는 인간과 싸울 경우, 당신은 반드시 패배할 거라는 걸요.”

“…….”

“저희에게는 아주 약간이지만 가능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0이 아닌 이상 저희에게는 길이 열려있는 거니까요.”

막상 그렇게 말하니 아지다하카는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누구보다도 가능성을 믿고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은 하찮은 인간들이었다. 악신들은 그런 인간들을 조롱해 왔었다.

그랬는데 그의 입에서 가능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다니.

‘어쩌면 저도,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바뀐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것은 전부 회주님의 덕분이었다.

아지다하카는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 우주에서 자신의 족적을 완전히 지우는 조건이 회주의 도움이라면 아지다하카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내놓을 의향이 있었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져도 그는 항상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쩌억!

아지다하카는 자신의 입을 벌렸다. 동굴과도 같은 그의 목구멍과 거대한 혀끝에는 검은 구슬이 하나 달려 있었다.

“받으세요.”

“아지다하카 님…….”

“저의 힘을 계승하세요. 그리고…… 부디 그분의 비원을 함께 이루시길.”

에르카닐은 가만히 아지다하카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거대한 악룡의 모습으로 바뀌었음에도, 차분한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스스로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결국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에르카닐의 망설임을 바로잡았다.

에르카닐은 손을 뻗어, 아지다하카가 내민 검은 구슬을 쥐었다.

&

쿠웅!

하늘에서 떨어진 빛의 기둥은 사람들이 없는 외딴 섬의 중앙에 떨어졌다.

북태평양 어딘가에 있는 거대한 무인도. 그곳의 중심에 내려선 현찬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섬에는 확실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현찬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태양 빛이 강렬하게 떨어지며 피부를 찔렀지만, 현찬은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워도 현찬은 더위를 느끼지 않고, 혹한의 냉기 속에서도 현찬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서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이 옷이 있어서 사실상 현찬은 모든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슬슬 그만하고 모습을 드러내지그래?”

현찬은 아무도 없는 숲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주위에는 여전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간혹 짐승들이 우는 소리와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는 것 빼고는 무인도는 고요했다.

현찬은 다시 입을 여는 대신 자신의 기세를 강하게 방출했다.

쿵!

현찬이 뿜어낸 기세는 순식간에 무인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드디어 반응이 왔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군.”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찬은 저들이 누구인지 안다. 그가 마커를 통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때도,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현찬의 존재를 인지한 녀석들이었으니까.

심지어 무슨 사술을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찬을 계속 쫓아온 녀석들이기도 했다.

현찬이 혼자 있는 걸 확인한 녀석들은 본격적으로 기척을 하나둘 드러내기 시작했다.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은 녀석들은 숲의 어두운 그림자에 숨어서 현찬을 주시했지만, 기척을 숨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버려진 세계>의 주민들.

누구보다도 험한 환경에서 살아왔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온 차원의 생존자들.

다른 차원의 침략자들이 지구를 헤집고 다닐 때도 정체를 숨긴 녀석들이, 현찬을 상대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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