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250화 일인 군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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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아아!
현찬에게 목이 베인 브리트라의 몸이 모래로 변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하늘의 물을 받아먹고 지상에 가뭄이라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 뱀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그만큼 현찬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아. 힘 빌려주신 분들은 모두 고마워요.”
현찬에게 검을 휘두르는 힘을 빌려준 여러 신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계약을 맺었지만 ‘갑’은 현찬의 것이었다. 그들이 다시 하계로 놀러 오기 위해서는 현찬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기서 배짱을 부리며 떼를 썼다가는 다시는 하계의 모습을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신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약을 해지해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현찬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그랑데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공주님 안기’ 형태로 리네넷을 품에 안고 있었다.
리네넷은 힘이 빠진 상태라 저항하는 것을 멈추고 그랑데우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저렇게 보니 참 기묘한 광경이었다. 무지갯빛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여인이, 갈색 피부 소녀를 공주님처럼 안고 있다니.
“와. 벌써 끝냈어? 엄청 빠른데?”
“우와.”
리네넷도 모래로 변하며 사라지는 브리트라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저런 괴물을 상대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끈 자신이 대단했고, 저런 괴물을 순식간에 죽여 버린 현찬의 무력에 경외심을 품었다.
“아직 놀라기엔 일러.”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테레이오스테를 집어넣었다. 검은 황금색 입자로 변해 현찬의 손바닥으로 흡수되었다. 현찬은 눈을 감고 기운을 집중하며 테레이오스테를 흡수한 손 위로 자그마한 빛의 구체를 생성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하늘 높기 치솟아 오르더니, 이내 폭죽처럼 터지며 수백 개의 조각으로 흩어졌다. 각 조각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대낮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광경에 리네넷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저 빛이 무엇인지 짐작한 그랑데우스는 혀를 내둘렀다.
“설마 자신의 기운을 저렇게나 압축해서 세계 곳곳에 뿌린 거야?”
현찬이 쏘아낸 빛의 구체는 야구공만큼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무시무시했다. 리네넷은 몰랐지만 그랑데우스는 확실히 느꼈다. 수백 개로 갈라져 세계 곳곳으로 퍼진 빛의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건 이제 세계 곳곳을 확인할 나의 표식이야.”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떴다.
새롭게 각성하며 지니게 된, <헤르메스의 눈>보다 훨씬 더 상급의 힘인 <진실의 눈>.
이것을 사용한 현찬은, 지금 자신이 뿌린 빛을 통해서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에 적들이 있고, 어떤 곳이 지금 위급한 상황인지 전부 읽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흠. 아무래도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다르게 움직여야겠는데.”
원래 현찬은 빠르게 다른 오버랭크 헌터들을 지원하고, 그 이후에 악신회주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악신회주는 다른 세계와 지구를 강제로 연결해 거기를 통해 무수히 많은 적을 쏟아내 버렸다.
‘아마 사용한 건 옛날에 철 가면을 통해 <심연>을 연 것과 비슷한 거겠지. 씨앗 같은 걸 심는다고 했던가.’
그런 씨앗 수십 개가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발아해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오버랭크 헌터들은, 역으로 악신회의 신들에게 묶여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야지.”
오히려 오버랭크 헌터들은 악신들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리네넷이야 힘들어했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달랐다. 유럽 지중해에서 싸우고 있는 현지와 안드레이 조합은 튀폰을 잘 막아내고 있었으며 미국의 알렉세이와 샤 또한 트랄텍트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심지어 베이징에서 진 차이와 양 리화를 상대하는 세트는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했으며, 일본에서는 미즈호가 야마타노오로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랑데우스. 너는 지금 바로 일본으로 가서 미즈호를 지원해줘.”
한성주가 원거리에서 예지를 통해 곳곳으로 지원하고 있겠지만, 그것도 아마 얼마 가지 않아서 한계를 맞이할 것이다. 야마타노오로치 또한 오랫동안 역사를 쌓아온 괴물이기에, 엔도 미즈호 혼자서 싸우는 데 무리가 있었다.
“알았어.”
그랑데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리네넷을 바닥에 놓았다. 모래로 이루어진 지면이 움직이더니 리네넷을 포근하게 받아냈다. 그랑데우스는 무지갯빛 잔상을 남기며 떠나갔고, 리네넷은 현찬을 올려다보았다.
“어쩌시려고요?”
“다른 곳을 지원해 줄 필요는 없어. 이미 그들은, 내가 없어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내면서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으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도시를 침략한 다른 차원의 적들과 몬스터들이었다.
몬스터들이야 헌터들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서 몰아내고 있었지만, 다른 차원의 적들은 달랐다.
거대한 기갑 마도 병기를 사용해 탱크처럼 모든 것을 밀어버리는 <제국>.
말을 타고 선조의 힘을 빌리며 그야말로 무차별로 세계를 누비고 있는 <기마병>.
생긴 것도, 종족도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방해하는 일 없이 그림자에 스며들며 사람들을 죽이는 <짐승>.
현찬이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총 셋이었다.
우선 막아야 하는 놈들은 바로 저 세 집단이었다.
‘우선 가장 가까운 놈들부터 막아야 한다.’
현찬은 마음속으로 헤르메스를 불렀다.
[응. 준비 다 됐어.]
현찬이 세계 곳곳으로 뿌린 빛은, 헤르메스도 느끼고 있었다. 현찬과의 계약이 더욱 강해진 지금, 현찬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장 가까운 녀석들이 있는 곳의 마크를 가동할게.]
“그래. 고마워.”
현찬은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네넷을 보며 피식 웃었다. 리네넷은 손에 모래를 꽉 쥐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도 도울게요.”
“됐어. 이미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지친 거 알아. 아마 다시 회복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그때까지는 푹 쉬고 있어.”
현찬은 리네넷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리네넷은 눈을 감고 그 감촉을 음미하다가, 고양이처럼 다시 고개를 확 들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현찬을 보았다. 자신을 너무 애 취급하지 말라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고생했어.”
리네넷은 현찬의 그 말에 어깨를 푹 떨굴 수밖에 없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자신이 했던 힘든 고생이 현찬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난 이만, 세계를 구하러 갈게.”
“네. 저도 금방 회복하고 뒤따라갈게요.”
현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기특한 말을 하는 리네넷이 귀엽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려 빛과 함께 그대로 사라졌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새하얀 빛은, 엄청난 속도로 각 마크를 타고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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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도, 도망쳐!”
“으악! 밀지 말라고!”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런 시민들의 뒤로 기계의 구동 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히익! 노, 놈들이다!”
지금 가까이 접근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공포심에 휩싸였다. 검은 구동 기사들이 벌써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놈들은 매우 강했다. 아무리 달인급이라고 하지만 영령들과 계약한 시민들마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름대로 실력이 있다던 헌터들은 적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구동 기사에게 잔인하게 찢겨 죽었다. 산 채로 죽어가며 살려달라고 피를 토하던 헌터들의 모습이, 시민들의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으아악!”
계속 도망치던 사람들은, 갑자기 땅을 뚫고 정면에서 튀어나오는 구동 기사를 보며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에서 막 사람들을 학살하고 튀어나온 구동 기사들의 갑옷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더 사람들의 공포심을 부추겼다.
잔혹한 <제국>의 병사들은, 그런 시민들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그야말로 광신에 가까운 그 믿음은, 절대로 그들을 흔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제국을 위해서라면, 이런 인간들은 몇이고 죽일 수 있었다. 구동 기사를 탄 제국의 병사들은 검을 뽑아 들며 시민들을 향해 겨누었다.
앞뒤로 구동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오자 사람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서로 밀고 밟으며 어떻게든 구동 기사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발악은, 그야말로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사, 살려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구동 기사의 검에 거침없이 베어져 나갔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사람들은 더욱더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아무리 영령과 계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싸움조차 모르는 일반인일 뿐이었다.
비록 영령과 계약하며 각성자라는 타이틀을 다는 순간부터, 기존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싸움에 대한 본능을 생성하지만, 제국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 정상의 자리까지 올라온 제국의 병사들은, 고작 각성해서 강해진 일반인들을 상대로 밀릴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조종하는 구동 기사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탱크나 다름없었다.
[네놈들은, 우리 위대한 제국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목을 내밀어라.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고통 없이 보내주도록 하마.]
[킥킥. 겁에 질린 모습이 영락없는 새끼사슴이구먼.]
[아아. 예쁜 여자 몇 명 가지고 놀고 싶은데.]
몇몇 제국의 병사들은 그런 추악한 심성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곳은 전시. 승자가 패자를 짓밟는 것은, 그들에게 허락된 쾌락의 행위였다.
제국은 강했고, 그들은 언제나 승리했다.
앞길을 막아서는 적들은 그게 누구라도 전부 짓밟았다. 그들의 원래 세계에서도, 구동 기사의 아래에 무너진 나라와 이종족들만 해도 수를 셀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앗!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빛의 기둥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빛의 기둥이 떨어진 자리에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코트와 그 위에 걸쳐진 갑옷. 한 손에 쥐고 있는 황금빛 검은 보기만 해도 성스러워 보였다. 피에 절어 검붉은 빛을 띠는 구동 기사들과 완벽하게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그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
“가, 강현찬 헌터다!”
“그가 우리를 구하러 왔어!”
시민들이 기쁨에 겨워 소리 지르자 제국의 병사들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려달라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던 녀석들이,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져서 뭐라고 외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건 또 뭐야?]
[혼자 갑자기 나타났다고? 다른 지원군도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천부장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병사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계급을 지닌 천부장이라서 그런지 그가 타고 있는 구동 기사는 다른 병사들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랗고 무장도 튼튼해 보였다.
[네놈은 누구냐. 아니, 이런 질문도 의미 없나. 대화도 통하지 않고, 어차피 전부 죽일 녀석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무의미한 짓이겠지.]
“글쎄. 과연 그것이 무의미한 짓일까.”
[……!]
현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제국의 언어에 병사들은 당황했다. 설마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천부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무의미한 짓이라니. 그건 또 대체 뭘 뜻하는 거지?]
“너희들은 내 이름을 알아도 돼. 아니, 반드시 알아야만 하지.”
[네놈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하! 우습구나! 이 얼마나 건방진 녀석이란 말인가!]
현찬의 당당한 태도에 천부장은 기가 찼다. 이곳에 모인 구동 기사의 수만 해도 이미 300을 넘어섰다. 심지어 백부장도 여럿 있으며 천부장인 자신까지 있다.
반면에 현찬은 고작 혼자. 그것도 검 하나 쥔 맨몸의 인간이었다. 입고 있는 코트가 범상치 않아 보이지만 과연 저것이 구동 기사가 휘두르는 대검을 막아낼 수 있을지조차 의심이 갔다.
현찬은 그런 천부장을 향해,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아니. 너희들은 내 이름을 알아야 해.”
그런 현찬의 등 뒤로, 빛으로 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것은 차원과 차원을 잇는 게이트였다. 그 안에서 척척 발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빛의 마법진의 안에서 순백의 갑주를 입은 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상대가 군단이라면, 이쪽도 똑같이 나서줘야 하지 않겠는가.
“너희들을 누가 죽였는지, 저승에 가서도 궁금해하지 않도록.”
마법진의 안쪽에서는 현찬의 용기병들이 무수히 튀어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