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245화 눈을 뜨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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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회주는 어두운 자신의 방에서 가만히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의 주변은 전부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없이 일렁이고 흔들거리는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작은 우주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쿠웅. 쿵.
악신회주는 세상의 움직임을 읽었고, 세상의 떨림을 감지했다. 그의 오감은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모든 상황을 손바닥 위에서 보았다. 악신회의 신들은 강현찬 헌터가 키운 오버랭크 헌터들과 싸우고 있었다.
개인적인 무력의 측면에서는 악신회의 신들이 더 위였지만, 오버랭크 헌터들의 수는 더 많았다. 심지어 상성 측면에서도 오버랭크 헌터들이 더 우위였다. 이러한 점에서 악신회의 신들이 제대로 몰아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노린 건가?’
현찬은 항상 자신의 움직임을 예견했다는 듯 행동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세계연합은 악신회가 언제 어디서 침략을 개시할지 알고서 대비하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지 못해 완벽하게 대처하지는 못했지만, 준비한 것만 해도 이쪽의 입장에서는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악신회주는 지구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오버랭크 헌터들이 움직였다면 반드시 현찬도 나타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찬의 모습은 지구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는 자신의 능력이 순간이지만 약해져서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헤르메스의 계약자인 현찬이라면, 자신의 눈을 순간이나마 속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만전을 기한 상황에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구뿐만이 아니라, 그와 인접한 다른 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머나먼 곳에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세상의 근간을, 마치 고요한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동심원으로 흔드는 느낌.
그것은 어떠한 존재가 차원의 벽을 넘을 때 자연스레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악신회주가 눈을 떴다.
검은 실루엣으로 가득한 얼굴에, 동공이 없이 그저 새하얗게 점칠 된 눈동자가 빛났다.
“왔구나.”
악신회주는 지금 차원을 넘어오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대체 어디에 가서 그의 시선을 피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찬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알 수 없는 기운을 풀풀 풍겨대며 말이다.
악신회주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계속 앉아서 세상을 훑어보았지만, 이제 그가 직접 움직일 시간이 도래했다.
“정말로 긴 세월이었다.”
오래된 추억을 곱씹고 음미하듯이, 악신회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잘라내서 떼어버리고 싶은, 끔찍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극한까지 몰아붙이기 위한 심산이기도 했다.
이제는 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삶이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오직 앞에 놓인 목표만을 위해 달려왔다.
더 이상의 실패는 없다.
“나는 오늘, 이 세상의 근간을 전부 바꿀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해, 지금까지 숱한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왔다.
이 모든 것을 거의 다 이루어가는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방해물은 현찬뿐이었다.
악신회주는 양팔을 좌우로 넓게 펼쳤다. 어둠으로 휩싸인 그의 양팔에서 무수히 많은 어둠이 나뭇가지처럼 줄기를 사방으로 뻗쳤다. 그것은 방 안쪽의 어둠과 동화되었고, 검은 가지를 통해 악신회주의 힘이 세계로 전달되었다.
파아앗!
음울하고 끈적거리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어둠이 지구 바깥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커다란 알을 소리 없이 집어삼키는 뱀처럼, 악신회주의 힘은 지구 바깥쪽, 차원과 차원의 칸막이를 건드렸다.
차원을 가르는 벽이 악신회주의 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원래부터 있었던 자그마한 틈은 순식간에 커다란 통로로 변모했다.
“오너라.”
악신회주의 말과 동시에 지구 곳곳에 무분별한 게이트가 무수히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고, 등장하는 장소마저도 가리지 않았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
파아앗! 게이트로부터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다른 차원과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증거. 갑자기 등장한 게이트에 시민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곳에서 검은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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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저게 대체 뭐야?”
“게이트? 이곳에 게이트 현상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도심의 한복판에 생성된 게이트에 시민들은 당황했다. 그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게이트는 자신의 안쪽에 담아놓았던 것들을 무수히 토해내기 시작했다.
쿠웅! 아스팔트 도로가 거칠게 울리며 그것은 몸을 일으켰다. 묵 빛으로 이루어진 투박한 색상과 기계가 맞물리는 관절 그리고 등 뒤에서 뿜어내는 뜨거운 증기까지.
그것은 흔히들 말하는 로봇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지구의 로봇과는 다르게 어딘가 많이 투박했으며,
거대했다.
크기는 지면으로부터 약 5m 정도.
기사의 갑주를 닮은 디자인의 그것은 지나다니는 자동차보다 훨씬 더 컸다.
그 구동 기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민들을 공허한 붉은 안광으로 내려다보았다. 철컹. 팔의 관절이 움직이더니 등에 매달린 거대한 태도를 뽑아 들었다.
“우, 움직인다.”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움직이는 구동 기사를 보며 시민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구동 기사가 움직였다.
파앗!
거대한 덩치와 둔중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상반되는 속도로, 구동 기사는 태도를 휘둘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구동 기사의 크기는 5m다. 등 뒤에 달린 태도의 길이는 약 4m 정도 된다. 구동 기사의 팔길이까지 고려하면 범위는 훨씬 더 늘어난다.
구동 기사의 반경 수 미터 이내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토막 났다. 무언가 반응할 틈도 없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시체들이 지면에 깔렸다. 피와 내장이 인도를 가득 메웠다.
꺄아아악! 그 광경을 지켜보던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기점으로, 일대에 혼란이 찾아왔다. 키잉! 구동 기사는 고개를 돌려 도망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훑었다.
그런 구동 기사의 뒤로 그와 같은 구동 기사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명령을 하달한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인간을 말살하라.]
선두에 선 구동 기사, 대장이 타고 있는 기갑 마도 병기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구동 기사보다 1.5배는 더 크며 훨씬 더 화려한 장식을 달고 있는 녀석은 각 손에 태도를 하나씩, 총 2개를 쥐고 있었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명령을 받은 구동 기사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자동차는 무참히 짓밟혔고 그대로 폭발했다. 뿌연 먼지구름을 헤치며 구동 기사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움직였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떤 곳은 거대한 기갑 병기가 시민들을 학살하며 도시를 파괴했고,
어떤 곳에서는 말을 탄 기병들이 활을 쏘며 일대를 휩쓸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보랏빛으로 꿈틀거리는 벌레 떼가 출몰하여 가리는 것 없이 전부 먹어 치우기까지 했다.
<세계연합>은 비상이 걸렸다.
“젠장! 당장 남은 인원 끌어모아서 현장에 투입해!”
“그, 너무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어서 그래도 인원이 부족한…….”
“그럼 당장 놔두자는 거야?! 한 명이라도 좋으니 능력 있는 헌터들 싹 다 보내! 시민 중에서도 나름대로 수준 있는 영령과 계약한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민간 길드 업체는 뭘 하는 건데!”
“다른 데서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쪽도 지금 게이트 현상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최소 인원만 남기고 전부 다 현장으로 투입해! 최대한 버텨야 한다!”
오버랭크 헌터들이 없는 사이에 발생한 이계의 침략.
악신회의 신들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가해진 이번 기습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벌써 도시 몇 군데는 함락당했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이 전국,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당연히 그 피해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뒤늦게 S랭크 헌터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과연 그사이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까.
“이, 이건…….”
이계의 침략을 알아차린 것은 현찬의 곁을 지키던 황설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현찬을 지키기 위해 주위에 진을 치고 있던 도깨비들도 이변을 알아차렸다.
이곳 강원도의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게이트가 발생하고 있었다.
열린 게이트를 통해서 보라색의 무언가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보라색 액체처럼 보였지만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자그마한 벌레들로 이루어진 무리라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벌레들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나무와 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벌레떼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점점 더 세력을 넓히며 게걸스럽게 주변을 마구잡이로 탐했다.
“이, 이건 뭐야!”
“으아악!”
방심하던 도깨비들을 향해 벌레들이 들이닥쳤다. 도깨비들은 각자 무기를 휘두르며 저항하려고 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도깨비 하나가 벌레 떼에게 집어 삼켜졌다.
귀를 찢을 것만 같은 끔찍한 비명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벌레들이 뒤덮은 도깨비의 실루엣은 파도를 맞이한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뼛조각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혀버린 것이었다.
동족이 잡아먹히는 모습을 본 다른 도깨비들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겁먹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우리가 밀리면, 우리의 은인도 위험하다!”
도깨비들의 뒤에는 현찬이 있었다. 여기서 도깨비들이 도망친다면, 저 벌레들은 현찬의 육신을 뜯어먹을 것이다. 마을을 구원받은 도깨비들은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았다. 이 자리를 지키기로 한 전사들은 모두 결사의 의지를 품은 채 벌레떼를 막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깨비불을 이용해 벌레들을 어렵게나마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도깨비들이 뿜어내는 불꽃보다도 늘어나는 벌레들의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설영과 주현창도 움직였다.
황설영은 도깨비들이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그녀도 발 벗고 나섰다. 바닥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이 움직이나 싶더니 거대한 뿌리들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벌레들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직! 콰지직!
거목에 얻어맞은 벌레들이 체액을 흩뿌리며 터져나갔다. 벌레들은 죽어 나간 동료들의 시신을 먹어치웠고, 나무에 달라붙어 빠르게 나무를 갉아 먹기 시작했다.
주현창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도 나서야 하나 고민했다.
‘여기에 있으면 개죽음이다.’
저 보라색 벌레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몬스터인 것 같지만 정보가 부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와 이 자리에서 바로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주현창은 가만히 누워있는 현찬을 보았다.
황설영이 벌레들을 막으러 나섰기에, 현찬의 곁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현찬을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가장 증오스러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어차피 놔두면 알아서 벌레들에게 먹히겠지만, 주현창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죽인다면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그런 생각을 품으며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신력을 머금었다.
‘고통스럽지 않게, 깔끔하게 끝내주지.’
심장에 찔러넣을 손을 날카롭게 모으는 순간이었다.
파아앗! 하늘에서 거대한 황금빛이 현찬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풍압이 몰아치며 주현창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강렬한 바람에 무리를 지어 다니는 벌레들도 공터의 바깥쪽으로 튕겨 나갔다. 황설영은 익숙한 기운에 화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상처투성이의 도깨비들도 기뻐서 소리질렀다.
“은인께서 돌아오셨다!”
현찬이 잠에든지 어언 10일.
오랜 기다림 끝에, 현찬은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