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244화 복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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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지체됐어.”
너도나도 현찬과 계약을 맺겠다는 신들의 성원에 상당한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반응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그냥 적당한 신 중 몇 명과 계약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예상했던 수의 10배는 아득히 넘는 신들이 몰려서 문제지.
그렇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신들도 아니었다.
주신 급만 아니었을 뿐이지, 어지간한 각성자들은 계약을 바라 마지않는 신 급이다. 그들과의 계약이 좋으면 좋았지 절대로 현찬에게 손해가 아니었다.
“어쨌든. 빨리 움직이자.”
“다시 돌아가려면 좀 멀리 가야 하는데.”
아스가르드에서 하계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멀다. 그것은 헤르메스의 [탈라리아]를 신어도 마찬가지다. 너무 넓은 신역은 아무리 빠르게 날아도 가로지르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출구로 가려면 상당히 멀어. 지금 출발한다고 해도 꽤 시간을 잡아먹을 거야. 우선 비프로스트를 통해 빠르게 미드가르드로…….”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익숙한 목소리는 헤임달의 것이었다.
비프로스트를 지켜야 할 그는 현찬과 헤르메스가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는지 그 길목의 한편에 앉아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비프로스트를 지키지 않아도 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오딘도 사라졌고, 심지어 지켜야 할 적들도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보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그쪽을 도와주는 겁니다.”
“어떻게?”
“<출구>로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영령의 세계에는 총 3개의 출구가 있다.
하나는 신계인 상계에서 다른 영령들이 머무는 중계로 내려가는 출구.
하나는 중계에서 지구인 하계로 내려가는 출구.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신계에서 바로 하계로 내려가는 출구였다.
현찬과 헤르메스가 가려고 하는 곳이 바로 세 번째 출구였다. 헤임달은 자신이 거기까지 빠르게 모실 수 있다고 말했다. 헤르메스는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다.
“비프로스트가 아무리 대단한 물건이라고 하지만, 출구는커녕 멀리 있는 다른 신역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확실히 그렇죠. 비프로스트를 사용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가 듭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북유럽 신역에서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 신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제곱이 되는 힘이 드는 것이죠. 조금 전까지는 말이죠.”
헤임달은 손을 들어 여전히 솟아오르는 빛의 기둥을 가리켰다.
현찬이 발드르의 힘을 각성한 이후로 과거의 위용을 되찾은 <브레이다블릭>이었다.
“지금까지 축적되었다가 해방된 <브레이다블릭>의 에너지라면, 두 분만이라도 빠르게 <출구>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물론 저곳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요.”
헤임달은 그렇게 말하며 현찬에게 대답을 넘겼다.
<브레이다블릭>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오롯이 현찬의 소유다. 그것을 다루는 것도 현찬이며 그 권한도 현찬이 지니고 있었다. 헤임달은 그 주인에게 의중을 묻는 것이었다.
내가 저것을 사용해도 되냐고.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상관없어요.”
“관대한 허락에 감사드리죠.”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뭔들 못할까요. 오히려 해결책을 제시해준 점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고맙게 생각합니다.”
현찬의 겸손한 대답에 헤임달은 웃었다. 저런 대답은 과거에 발드르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자주 듣던 말이었다.
항상 무표정하다고 알려진 헤임달이 웃는 모습은 지극히 희귀했지만, 헤르메스와 현찬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둘은 무지개의 다리의 끝에 섰다.
“에너지의 양이 많은 만큼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더 클 것입니다. 조심하시길.”
헤임달은 그렇게 경고하며 비프로스트를 발동시켰다. 브레이다블릭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에너지는 지면을 타고 비프로스트에 흡수되었다. 빛의 흔적은 땅에 빗줄기처럼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은 통로가 되어 비프로스트에 끝없이 에너지를 공급해주었다.
계속해서 공급해도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나는 빛을 보며, 헤임달은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 눈 부신 빛이 무지개의 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아름답게 비추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헤임달은 마지막 안녕의 말을 건네며, 그대로 비프로스트를 발동시켰다.
파앗! 천리 바깥의 세상을 보는 헤임달의 눈마저 한순간이나마 멀게 하는 강렬한 빛이 터졌다. 소리는 없었다. 단지 이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듯 사라진 빛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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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로 내려가는 <출구>라 불리는 곳은, 신들이 사용하는 것답게 매우 크고 웅장했다.
동서양의 모든 건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자리 잡은 거대한 건축물은, 신화 속에서 물건을 만드는 데 정평이 난 모든 존재가 합심해서 만든 것이다.
‘즉 헤파이스토스도 저걸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소리겠지.’
현찬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출구>를 올려다보았다.
정해진 이름은 없이 그저 다른 세계로 향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출구>라 불리는 통로.
웅장한 크기보다 주변에는 그 어떠한 신들도 없었다.
원래부터 이곳을 찾아오는 신들이 거의 없는 것도 있었지만, 북유럽 신역에서 터진 온갖 사건들 때문에 신들이 그곳으로 몰려간 것이 컸다.
덕분에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현찬은 헤르메스와 함께 <출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출구>를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네.”
“두 번째?”
“처음은 현찬이 너와 계약했을 때 불려간 거였으니까.”
“아아.”
현찬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참 먼 추억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사는 것이 싫었던 청년은 헤르메스와 만나 어엿한 영웅으로 거듭났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적과 싸웠다.
그래도 현찬은 알고 있다.
그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여정의 끝은 아직 멀었다는 것을.
“그때 현찬이 네 모습을 보면 참 어벙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시간 참 빠르지. 어느덧 너와 같이 신역까지 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운명의 여신들조차, 네 앞에 펼쳐진 운명을 읽어내지 못했을걸?”
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시, <출구>가 ‘우우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처럼 온 손님을 반기듯이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찬과 헤르메스는 거대한 건축물 안으로 들어갔다.
쿠웅. 문이 알아서 닫혔고 주변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아니,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현찬과 헤르메스의 주위로 펼쳐진 것은 끝없는 무한한 우주였으니까.
다양한 행성과 차원, 수억 수조 개의 별들이 흐르는 은하수까지.
그 풍경의 속에서 현찬과 헤르메스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떴다.
“이대로 바로 직행하면 지구에 도착이야.”
“그건 알 것 같은데 말이지.”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어둡지만 빛나는 우주의 풍경 속에서, 새까만 구멍 같은 것이 하나 보였다. 그것은 주변의 빛을 집어삼키며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해꾼이 우리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는 않은데.”
현찬이 이곳으로 왔을 때 집요하게 뒤를 추격했던 <심연>이, 여전히 현찬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헤르메스도 그 광경을 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저 녀석은 질리지도 않나. 설마 쫓아왔을 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거야?”
“자식을 잃었으니 제대로 된 복수라도 할 생각이겠지. 그놈이 먼저 달려들어서 죽은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아직 녀석은 우리를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귀찮지만 조금 돌아서 갈까?”
“아니.”
현찬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서 가면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된다. 이미 시간을 지체한 만큼 여기서 더 미룰 수 없었다.
“돌파할 거야.”
“아아, 증말.”
헤르메스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머리가 아픈 기분이었다. 당장에 저 <심연>을 어떻게 뚫고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후유. 그래도 올 때와 비교하면 몰래 다니는 게 아니라 정식 루트를 밟고 움직이는 거니까, 어쩌면 <심연>도 우리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거야.”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근처를 배회하며 현찬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녀석이다. 과연 공격이 잘 먹히지 않는다고 포기할까? 헤르메스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저 끔찍한 괴물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상이 안 갔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헤르메스의 걱정은, 현찬의 표정을 본 순간 싹 날아가 버렸다.
자신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걱정 따위는 담겨있지 않은 단호한 눈빛에, 헤르메스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자 가.”
“헤르메스. 최대한 가속 부탁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
정면돌파를 하기로 한 이상, 중요한 것은 녀석에게 절대로 따라잡히지 않을 속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헤르메스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그의 신화 속에서도, 태양 마차를 탄 아폴론이 아니면 헤르메스를 쫓아올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가자!”
헤르메스가 기합 가득 소리 질렀다. 현찬과 헤르메스의 등 뒤로 황금빛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정면을 향해 우주를 가로지르는 통로가 생겨났다. <출구>를 통해서 지구로 향하는 통로. 외부적인 충격을 보호해주는 방어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쿠오오오오!
심연도 현찬의 등장을 알아차렸는지 거대한 촉수를 무수히 많이 뻗었다. 그것은 통로를 거칠게 두들겼지만, 통로는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그러나 심연은 집요했고 촉수는 많았다.
콰득!
통로를 두들기는 집요한 심연의 공격은 결국에 빛을 보았다. 몇 개의 굵고 단단한 촉수가 통로를 뚫고 그 아가리를 들이민 것이었다. 검은 촉수의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꽃봉오리처럼 펼쳐졌다. 그 안쪽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별빛을 받아 번뜩였다.
“현찬아! 조금만 버텨줘!”
“알아!”
어차피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찬은 각성하고 나서 사용하지 않은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현찬을 중심으로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태초에 어둠만 가득했던 혼돈에, 강렬한 폭발과 함께 우주를 창조한 빅뱅과도 같았다. 그 강렬한 빛이 뿜어내는 열은 현찬에게 아가리를 들이미는 모든 촉수를 태웠다.
크오오오오!
촉수들이 타오르는 고통에 심연이 비명을 질렀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본체에서 직접 뽑아낸 촉수이니만큼, 그것의 손실은 심연에도 직접적인 타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심연은 계속해서 촉수를 뻗으며 통로 속의 현찬을 공략했다.
그 모습은 마치, 반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의 먹잇감을 꺼내려는 거대한 문어 같았다.
물론 그냥 문어와는 비교하기 무서울 정도로 촉수의 개수가 많았다.
현찬은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촉수들을, 힘의 방출만으로 모두 태워버렸다.
‘가능해.’
그야말로 태양에 가까운 열을 뿜어내면서도 현찬은 지친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뿜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현찬이 기운을 뿜어낼수록 촉수를 막아내는 게 수월해지지만 그만큼 현찬을 보호해주는 통로에도 피해를 주었다.
‘아쉽지만, 안전하게 지나가는 수준에서 만족하자.’
현찬은 기운을 최대한 조절하여 자신과 헤르메스의 주위에 막처럼 둘렀다. 통로를 뚫고 들어온 촉수가 빛의 장막을 두드렸지만, 장막은 부서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드린 촉수가 장막에 닿는 순간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헤르메스.”
“준비됐어!”
현찬이 방어에 집중하는 사이 헤르메스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둘의 몸이 거의 빛의 입자로 변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심연을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