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242화 복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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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던 신들은 경악했다.
아무리 빛의 신 발드르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오딘은 북유럽 신역의 주인이다. 그런 오딘에게 현찬이 죄를 묻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다.
“자신의 주신을 몰아내겠다는 소리인가?”
“이 자리에서?”
그 발언에 놀라거나 경악하는 신들이 있지만,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는 신들도 있었다.
결국, 모든 신의 반응은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기들은 북유럽 주민도 아니었으며 사실상 구경하러 온 손님들이다. 멋대로 내정간섭을 할 생각도 없었으며, 오딘이 지탄받는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오히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으니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최우선으로 지루함을 씻어줄 유희였으니까.
신들의 시선이 현찬의 입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현찬이 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벌써 예의주시 중이다. 현찬은 등골부터 짜릿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든 신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기분이었다.
세상 어떤 인간이 신들에게 이런 과분한 관심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오직 현찬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일 것이다.
현찬은 목을 가다듬고, 오딘이 지금까지 벌여왔던 일들을 전부 만천하에 떠벌렸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권위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가 어떠한 진실을 은폐했는지.
오딘은 어떻게든 현찬을 막으려 했지만, 그의 곁에서는 펜리르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허튼짓하는 순간, 목을 물어뜯겠다는 협박에 오딘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현찬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신들은 오딘을 보며 분개했다.
“저런 나쁜 녀석!”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죽여?”
“같은 신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
선한 신들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우스는 작게 헛기침을 했고 포세이돈과 하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신화 속의 모든 신이 전부 떳떳한 것은 아닌지라, 저러한 비난 속에 찔리는 신들이 몇 명 있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손을 흔들며 외치는 현찬의 말에 좌중에는 또다시 고요의 여신이 스쳐 지나갔다. 그 광경에 현찬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들은 또 현찬이 무슨 말을 할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인간의 인지를 초월하는 힘을 지닌 신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결국에는 감정이 있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인간과 다르면서도 인간과 가장 유사한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 특이한 감상을 하면서 현찬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잘못한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인의 죄가 탄로 났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죠. 그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아무리 주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죠.”
현찬의 말에 어떠한 신도 반박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딘을 섬기고 모셔왔던 다른 아스가르드의 신들마저도 전부. 사실 누구보다도 오딘에게 분노하고 실망한 쪽은 그들이었기에, 이 합당한 처벌을 바라는 마음이 가장 강했다.
“단. 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응?”
“아니 왜?”
신들은 오딘의 처벌을 기대하는 와중에, 현찬이 갑자기 발을 빼려고 하자 김이 팍 식어버렸다. 몇몇 신들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왜 하지 않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아니 왜 하질 않는 거지?”
“그 사이에 아버지를 향한 정이라도 든 것일까?”
“이게 그 하계에서 말하는 고구마 왕창 먹이기냐?”
신들의 그런 불만이 터져 나오기 직전, 현찬은 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물론,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죠. 다들 섣불리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일에 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있으니까요.”
“스페셜리스트? 그게 대체 누군데?”
“바로 나지롱!”
목소리는 요르문간드로부터 들려왔다. 광장을 굽어보는 거대한 흰 뱀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신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요르문간드는 거대한 머리를 광장의 중심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올라타 있던 신이 가볍게 오딘의 곁으로 뛰어내렸다.
“어? 누구지?”
“저렇게 예쁜 신이 있었나?”
신 대부분은 여자로 변한 로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아스가르드의 신들만이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고 눈을 부릅떴을 뿐이었다.
“로키!”
“응? 로키? 로키라고?!”
“신계 최고의 사고뭉치?! 저 미인이?!”
한 신의 외침에 다른 신들도 미모의 여신이 로키라는 사실이 순식간에 퍼졌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닮기는 닮았다. 특유의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라거나, 로키 자체가 풍기던 기묘한 분위기까지.
나름대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신들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로키는 성별에 제약이 없었다고 했지. 으아아! 순간 로키의 외모에 혹한 남신들은 그런 자신을 저주하며 머리를 쥐어 싸맸다.
로키는 그런 남신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찬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으려고 했다.
“발드르~. 아니, 이제 현찬이려나? 아니면 둘 다?”
“현찬이야.”
현찬은 그렇게 대답하며 로키의 손짓을 가볍게 피했다. 로키는 현찬의 매정한 태도에 눈을 흘기며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현찬이 그 장난에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그 틈에 현찬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난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발드르에게 뭐 하는 짓이에요?! 다, 당장 떨어지세요!”
“흥. 남 이사. 이제 발드르 아니거든? 현찬이거든?”
난나가 현찬의 반대쪽 팔을 잡아당기자 로키도 지지 않고 현찬의 팔을 잡았다. 두 미모의 여신이 현찬을 양쪽에서 당기는 모습은 다른 남신들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아니 그런데 뭐, 한쪽은 전 부인이었고.’
‘다른 한쪽은 심지어 성별이 모호한 녀석이고.’
‘정작 발드르라는 신은 여전히 인간인 채인 거 같고.’
‘관계가 참…….’
아침 드라마를 뺨치는 기묘한 족보에 신들도 미묘하다는 반응이었다.
보다 못한 헤르메스가 참전해서 이 상황을 끝냈다.
“우리 현찬이한테 둘 다 손 떼!”
캬악! 화를 내는 헤르메스의 모습을 보며 신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본처의 등장인가?’
‘잠깐만. 그런데 헤르메스는 예쁘게 생겼지만 남자잖아.’
‘전 부인. 성별 모호. 남자. 대체 어떻게 돼먹은 관계야?’
크흠.
다들 그 기묘한 콩트를 지켜보는 와중에 현찬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상하게 신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니 목이 탔다.
“우선, 오딘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순전히 로키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애석하게도, 제게는 시간이 많이 없거든요.”
“시간이 없다니. 어디를 가야 한다는 소리인가?”
신들의 인파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우스였다. 심지어 포세이돈과 하데스도 있었다. 엄청난 신력을 지닌 제우스의 등장에 다른 신들이 웅성거렸다.
같은 신이라 할지라도 제우스는 격이 달랐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물론입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온, 불청객인 만큼……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주신 제우스를 상대로도, 심지어 포세이돈과 하데스를 끼고 있는데도 현찬은 주눅 들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깡이 있는 모습에 많은 신이 속으로 감탄했다.
“흐음. 이미 그대는 이 자리에서 신이 되지 않았는가. 주인이 없어져 잊혀가던 빛의 신전의 주인이 되었고, 그것을 인정받았지. 더는 이 세계에 그대는 침입자가 아니야. 이제 어엿한 이곳의 일원이지. 그런데도 떠난다고?”
“예.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서요.”
“하계의 상황을 내가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이 엄청난 혼돈이 오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곳에 간다면 필시 힘든 일들만 가득할 텐데. 반면에 이곳에 머문다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도 있지. 그래도 갈 생각이란 말인가?”
떠보는 제우스의 말에 현찬은 씨익 웃었다. 이것은 순전히 보여주기식 답변이었다. 그런 대답을 유도하는 것은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의도적으로 현찬을 떠보는 척하면서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이죠.”
“좋군. 젊은이의 의지를 멋대로 꺾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가게나.”
제우스가 이렇게 말을 꺼내버렸으니, 현찬을 탐내던 다른 신들은 거기서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게 되었다.
현찬이 발드르가 아닌 다른 개별적 존재인 상태에서 영령이 된 시점에서, 신들은 현찬을 탐냈다.
자신의 신역에 부르기만 해도 신역의 가치가 상당히 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잔뜩 눈을 부라리고 현찬을 노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제우스가 끼어들어서 전부 무산된 것이었다.
현찬이 저렇게 의지를 꺾지 않고 자신의 뚝심대로 밀고 나가겠다고 하고, 제우스가 손을 들고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 광경을 다 지켜봤는데도 억지로 현찬에게 자신의 신역으로 오라고 강요할 수 있는 간 큰 신들은 없었다.
그렇다고 제우스에게 따질 수도 없어서 신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로키. 나는 먼저 가 있을게.”
“응! 나도 오딘한테 당했던 거 갚아준 뒤에 바로 따라갈게!”
“발드르! 정말로 가시는 건가요?”
“난나…….”
현찬은 오랫동안의 독수공방으로 너무나도 지쳐버린 식물의 여신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현찬으로서는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발드르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를 향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정에 휩쓸릴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 발드르가 아니라 현찬입니다. 제가 그에게서 파생되기는 했지만 같다고 보는 건 실례입니다.”
“그, 그런……. 그렇다면 발드르는…… 그는 죽은 건가요?”
“…… 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주 깊은 잠에 빠졌을 뿐이죠.”
현찬이 원한다면 발드르의 인격을 꺼낼 수는 있었다. 다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이제 막 각성한 현찬이 아직 그 정도의 힘을 다루기엔 시간도 부족했고 상황이 몹시 촉박했다.
현찬이 떠나려고 하는 순간 난나가 현찬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뜨거운 슬픔이 맺혀 있었다. 일그러진 입술에서는 참을 수 없는 비애가 흘러나와 바닥을 잔뜩 적시는 것 같았다.
“가지 마세요.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그 말에 현찬은 순간 멈칫했다. 난나의 목소리는 현찬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렸다. 현찬의 가슴 속에 잠든 발드르의 기억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현찬은 이를 악물고 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안타깝지만, 저는 가야만 해서요.”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거잖아요!”
“누가 안 돌아온대요?”
“네?”
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찬이 떠나면 다시는 이곳으로 못 올 거로 생각했는데 정작 돌아오는 답변은 가관이었다.
“저 원하면 여기 다시 올 수 있어요.”
“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그쪽이 저랑 계약해서 하계에 내려올 수 있고요.”
“어……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여기서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난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설마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 전까지 영영 헤어져서 보지 않을 사이처럼 굴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요?”
“몰라요오.”
그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발드르의 기억 속에서, 지금 이 상태의 난나는 가만히 놔두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현찬은 때마침 떠올랐다는 듯 주변 신들을 둘러보았다.
“아 참. 저 하계에 내려갈 건데, 혹시 저와 계약을 맺을 신들 있나요?”
이왕 신들이 이 자리에 모였으니, 현찬은 직접 신들을 찾아다닐 수고를 덜어서 자신과 계약을 맺을 신들을 찾았다.
발드르가 아닌, 영령의 현찬으로서 지닌 그의 권능은 헤르메스의 것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심화한 것이었다.
이제 완전히 각성한 현찬은, 심지어 하계에서도 많은 제약을 벗어던진 상황.
현찬의 말에 신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런 신들을 향해 현찬이 결정타를 날렸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싫으면 말던가.”
그 말에 신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