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238화 아스가르드의 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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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고개를 들어 높은 자리에 있는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의 모습.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꼼꼼히 살폈다.
머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짙은 회색빛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길게 자라나 있었고 몸에는 활동하기 편한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길을 가다가 흔히 보이는 목동 노인처럼 보이겠지만, 그의 근엄한 얼굴을 보면 절대로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으리라.
저 노인이야말로 북유럽 신화에서 지고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주신 <오딘>이었다.
<오딘>.
북유럽 신화의 주신이며 그를 수식하는 말은 매우 많다.
처음에 그는 대기의 움직임, 즉 기류를 인격화한 폭풍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폭풍을 부르고 바람을 타며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옛사람들이 생각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광란’ 또는 ‘격노’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전사들에게 그러한 감정을 불어 넣어 전투하게 만드는 ‘싸움의 신’이라는 성격도 있었다.
심지어 창조의 신, 죽음의 신, 지혜의 신이라는 수식어까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오딘의 가장 뛰어난 점은 전사들을 마음껏 부리며 전장을 휘젓는 게 아니었다.
그를 대표하는 능력은 바로 지식과 마법을 향한 끝없는 욕망과 탐구심이다.
오딘은 마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치스러운 일조차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을 향한 강렬하고도 순수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이 실명된 이유도 미미르의 샘에 자신의 눈을 대가로 바쳤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오딘은 남들이 볼 수 없는 다른 세계를 저 안대에 가려진 눈으로 보는 힘을 얻었다.
현찬의 몸은 저절로 긴장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성으로는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아직은 인간인 현찬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오딘은 절대로 선한 신이 아니다.
그는 북유럽 신역의 주신이지만, 그의 성격은 다른 주신들과 매우 다르다고 봐도 좋다.
물론 온갖 추태를 부리고 다니는 제우스보다는 얌전하다.
하지만 오딘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오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나 가족이 어떻게 되더라도, 마력만 얻을 수 있다면 전부 버릴 수 있는 신이었다.
심지어 오딘의 축복을 받은 전사는, 반드시 오딘에게 배신당해 발키리에 의해 끌려가고 만다.
괜히 그가 죽음의 신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게 아니다.
그가 지닌 힘, 그가 지닌 권능, 그가 지닌 의중을 알 수 없는 책략까지.
그 모든 것이 상대방에게 경계심과 두려움을 품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후긴과 무닌은 없는 건가.’
현찬은 눈동자를 굴리며 홀 안에 혹시 다른 존재가 있는 게 아닌지 확인했다.
주신 오딘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후긴과 무닌이라는 까마귀를 대동하고 다녔다. 간혹 전쟁터를 나설 때는 게리(Geri : 탐욕스러운 자)와 프레키(Freki : 굶주린 자)라는 늑대를 대동하고 다녔지만, 그 늑대마저도 없었다.
이 홀에 있는 존재는 오직 현찬과 오딘.
단둘뿐이었다.
“오오. 내 아들아.”
오딘은 근엄한 분위기를 풀고, 그야말로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아들이자, 너무나도 안타까운 운명을 지녀서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 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만 <발드르>.
오딘은 현찬에게서 그 <발드르>의 존재를 이미 읽어낸 것이었다.
“제게 발드르의 기억은 있지만, 전 완전한 그가 아닙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제게 조금은 익숙하지 않네요.”
진짜 가족이 지구에 있는 현찬으로서는 오딘의 저런 태도는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현찬의 말은 타당했지만, 오딘은 자신의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오딘은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구부러지고 짙은 회색을 띤 수염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태풍처럼 생겼다.
“아니. 네가 그렇게 거부한다 하더라도, 네가 내 아들임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나의 아들 발드르야. 너무나도 끔찍한 운명을 겪은 내 아들아. 어째서 편해질 수 있는 미래를 놔두고, 다시 그 고행의 가시밭길을 걸으려고 하는 거냐.”
“…… 그것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요.”
현찬은 발드르에게 들었던, 그리고 그에게 이어받은 기억을 토대로 오딘에게 설명해 주었다.
지구는 멸망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지구에 머무는 인류와 그들이 쌓아온 모든 신화와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나서야만 했다고.
현찬의 이야기를 들은 오딘은 감복했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발드르. 역시나 모두에게 상냥한 내 아들답구나.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못해 자기 스스로가, 격을 떨어뜨리는 일마저 자행하며 하계로 내려가다니. 허나, 너의 행동은 틀렸단다. 발드르야.”
“틀렸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하계가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 세계마저 사라질 거로 생각했느냐. 아니다. 이곳, 영령의 세계는 지구의 존속과 멸망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곳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세계는 이대로 쭈욱 유지된다는 소리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발드르는 이곳마저 사라지는 미래를 봐왔어요. 그가 틀렸다는 겁니까?”
“완벽하지 못한 예지는, 때로는 잘못된 환상을 보게 하지. 발드르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나 또한 처음 알았지만, 과연 그게 정말로 확실한 미래를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딘은 그렇게 말하며 황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덩치도 그렇게 커 보이지 않으며, 딱히 그럴듯한 근육조차 없는 노인의 몸이었다.
그런데도 오딘에게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한 신화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주신의 위엄.
현찬은 입을 꾹 다문 채 오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완벽하게 틀린 생각이지. 아들아. 나는 미미르의 샘에 이 눈을 바쳐 남들보다 더 다양한 지식과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단다. 그런 내가, 네가 봤던 것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오딘은 고개를 저었다.
뚜벅뚜벅. 오딘이 옥좌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넓은 홀을 적막하게 울렸다.
“아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단다. 그렇기에, 이 세계가 하계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 하계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우리 세계는 절대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많은 것을 알고 계셨군요.”
“그래.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단다.”
오딘은 현찬의 앞까지 다가왔다. 둘의 거리는 1m도 되지 않았다. 오딘은 현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들아. 이쪽으로 오거라. 다시 예전으로 가자꾸나. 너를 노리는 수호자들은, 내가 막을 수 있다. 그들의 감시망으로부터 내가 너를 비호하며 지켜주마. 그러니 다시 그때의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오너라.”
현찬은 오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지고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그 손을 보았다.
이 손을 잡으면 현찬은, 아니 발드르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
현찬은 가라앉은 시선을 다시 들어 올리며 오딘의 얼굴을 주시했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오딘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속마음을 절대로 읽을 수 없는, 진실을 가린 투명한 막과도 같았다.
“함께 가자꾸나.”
현찬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잔잔한 수면에 돌덩어리를 던지듯 질문했다.
“오딘께서는, 미래를 예지하고 운명을 읽으실 수 있으셨죠.”
그렇기에 그는 라그나뢰크를 예지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위대한 전사들을 한데 모았었다.
결국에 실패했지만, 오딘이 지닌 권능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무슨 대답을 할지도 알고 계시겠죠?”
“우스운 말이구나. 내가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너는 반대로 행동하면 그만인 것을. 미래는, 확정되지 않는다. 가변적인 것이지. 그러니,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신중하고 차분해야 하고.”
“그렇겠죠.”
“그러니…….”
“이게 참 이상하단 말이죠. 왜 북유럽 최고의 신이 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손을 내미는데, 이렇게나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걸까요.”
인자하게 웃던 오딘의 표정에 미약하게 금이 갔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은,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제거해왔다. 그는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앞에서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고 또 그것을 이용해왔다.”
“발드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적들을 제거해왔다. 아스의 신족도, 거인도, 심지어 자신의 혈육마저도.”
“발드르!”
오딘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쳤지만, 현찬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아무리 너라 하더라도, 이 아비를 모욕할 수는 없다!”
“과연.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딘이시여. 저 또한 묻도록 하죠.”
현찬은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왜 다른 신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어째서 헤임달은 현찬만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이지 않은가.
쿠르르릉!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천둥이 아님을 증명하듯 거대한 황금의 홀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오딘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다급해진 표정으로 현찬을 바라보았다.
현찬은 오딘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째서 당신은, 자식의 앞에 섰음에도 [궁니르]를 손에 쥐고 계신 겁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딘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는 내밀지 않은 왼손을 현찬을 향해 뻗었다. 그 순간 모습을 감추고 있던 오딘의 창, [궁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지금까지 죽인 모든 생명체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불길한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이 창이야말로, 오딘이 가장 애용하는 무기였다.
[궁니르].
찌르는 창이 아닌, 투창이며
던지는 순간 목표로 한 대상은 반드시 맞는 효과를 지닌 최강의 창이다.
오딘은 그것을 현찬에게 내질렀다.
아무리 긴장하고 있다고 해도, 거리가 이렇게 가까우면 절대로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
애초에 [궁니르]는 그 정도로 막아낼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푸욱!
궁니르는 그대로 현찬의 복부를 꿰뚫었다.
꽈르릉! 멀리서부터 치던 번개의 소리가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덧 피부를 울릴 정도로 가까워졌고, 그 벽력 성의 틈새로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딘!”
가느다란 팔다리에, 여자처럼 어여쁜 외모를 한 토르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는 복부에 궁니르가 박힌 현찬에게 고정되었다.
자신의 본모습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토르는, 이를 악물고 분노를 터뜨렸다.
오딘은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룬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의 주위에 물의 장막이 펼쳐지며 토르의 번개를 바깥으로 흘러내기 시작했다.
“큭!”
그런데도 토르의 분노가 실린 일격은 너무나도 강해서, 오딘은 뒤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토르는 오딘을 번개로 밀어낸 후 바닥에 쓰러질 뻔한 현찬을 부축해 주었다.
“발드르! 정신 차려!”
“토르……?”
“그래. 나야. 정신이 들어?”
토르는 안색이 창백해지는 현찬의 몸을 바닥에 조심스레 눕혔다. 쿨럭! 기침과 동시에 현찬의 입에서 한 사발의 피가 튀어나왔다. 토르는 어쩔 줄 모르면서 가녀린 손으로 현찬의 입가의 피를 닦아주었다.
그는 싸움밖에 하지 못하는 신이다. 누군가를 치료하는 방법은 하나도 몰랐다.
그 사실은 지금 이 상황에서 토르에게 후회를 몰고 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간단한 치료 룬 마법이라도 배웠어야 했다.
“치료하려고 해도 소용없을 거다. 궁니르를 맞았으며 상처 악화의 저주까지 담겨 있으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테지.”
회수한 궁니르를 손에 쥔 오딘은 그렇게 말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토르는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묠니르를 손에 쥐었다.
으드득! 토르의 손아귀와 묠니르의 손잡이가 맞물리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오딘. 안 그래도, 옛날에 날 물 먹였던 일에 대해서 한번 따지고 싶었지.”
토르의 주위로 제어하지 못한 전기가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뻗어져 나와 주변 공기를 태웠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넓은 홀 전체에 번개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쿠르르릉! 아스 신족들이 한곳에 모여 연회를 벌이던 거대한 홀이 단 한 명의 신에 의해서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 무너져 내리는 홀의 중심에서 오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창을 쥐었다.
토르와 오딘.
북유럽 신화 최고의 두 신이 본격적으로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