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37화 아스가르드의 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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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너희는 대체 뭐냐?”
모래를 일으켜 사람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세트는 자신의 등 뒤에 내려앉은 기척에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미 주변에는 시체로 가득했고 피가 바다를 이루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세트의 모래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들이며 점점 붉게 변하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세트의 앞을 막아선 두 명의 사람 중 한 명이 ‘히익!’ 하고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이, 이건 대체…….”
[겁먹지 마라, 진 차이! 여기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적이 원하는 바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평정심을 잃지 말라고!]
어린 소년 진 차이는 나타의 호통 어린 조언에 숨을 크게 들이쉬며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참았다. 나타의 힘 덕분인지 아니면 그의 조언 덕분인지 진 차이는 조금 전에 느꼈던 두려움이 상당히 가신 것을 느꼈다.
“괜찮아. 이 누나가 다 해 줄게.”
그런 진 차이의 곁에 서 있던 양 리화가 앞으로 나섰다. 세트는 양 리화를 보더니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호오. 이게 누구야. 오버랭크 헌터 중 하나…… 양 리화였나? 그 년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여기가 너희 조국의 땅이었나? 하핫! 이거 참 미안하군, 그래. 워낙 벌레 떼처럼 많아서 일단 다 죽이고 봤단 말이지.”
“그러는 그쪽이 세트?”
“오. 잘 알고 있잖아? 그래. 내가 바로 이집트 신화의 최고 신 세트다.”
“최고신은 무슨. 라가 최고신이잖아요.”
신화에 관한 이론과 지식이 빠삭한 진 차이가 끼어들었다.
라를 언급하는 순간 도발적인 세트의 미소가 허상처럼 사라졌다. 세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꼬맹아. 죽고 싶냐?”
“…… 저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진 차이는 그렇게 말하며 나타의 신력을 끌어올려 세트의 기운에 저항했다. 세트는 저렇게 어린아이가 자신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고도 멀쩡하고, 심지어 아주 약간이지만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이 녀석도 신급 영령의 계약자란 말인가?’
양 리화까지는 알았지만 진 차이는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었다.
애초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오버랭크 헌터는 딱 네 명뿐이었다. 그 뒤에 새롭게 생긴 차기 오버랭크 헌터들은 나름 유명하기는 했지만, 악신회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지식이 미약한 세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세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뭐 됐어. 어차피 하나나 둘이나 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애초에 세트가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존재는 오직 현찬뿐이었다.
그때의 패배, 그때의 치욕을 갚아 주기 위해 세트는 근신하는 동안 수 없이도 많은 증오심을 쌓아왔다.
그것은 곧 자신의 힘이 되었고, 세트는 현찬을 만나면 아주 잔인하게 죽여줄 생각이었다.
“너희 버러지 녀석들에게는 관심 없다. 강현찬이라는 인간은 어디 있지? 왜 녀석이 나에게 오지 않은 거지?”
“그분은 너 따위에게 신경을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진 차이의 발작적인 외침에 세트의 표정이 더 구겨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애송이가 멋대로 떠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설마 자신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고 있는데도 현찬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뭐. 좋다. 어차피 계속 죽이고 죽이다 보면 녀석도 내 앞에 나타나겠지.”
피를 머금어 붉게 변한 모래가, 세트의 주위에서 의지를 갖고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너희의 피로 일단 이 분노를 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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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나 브리트라와 마찬가지로 세계 곳곳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악신회의 신들은 각자 방해꾼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젊은 아가씨께서 너무 무섭게 쿵쿵거리는걸? 그렇지 않나? 샤?”
“네, 넵! 맞습니다! 윌터 씨!”
뉴욕을 반쯤 붕괴시킨 트랄텍트리의 앞에는 <글루스카베>의 계약자인 알렉세이 윌터와 <가루다>의 계약자인 아흐메드 알리 샤가.
“흠. 설마 저 신화 속의 저 뱀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슴다.”
“헤에. 저게 그 오로치라는 뱀이구나. 되게 신기하네.”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야마타노오로치의 앞에는 <타케미차즈치>의 계약자인 엔도 미즈호와 <엘 드라코>의 마지막 남은 드래곤인 그랑데우스가.
“으음. 저 악신에게는 아르테미스가 꺼리는 기운이 느껴지네요. 안드레이 오빠.”
“…….”
“나 참. 무슨 얼음장처럼 남자가 반응이 없어요?”
시칠리아섬을 없애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튀폰의 앞에는 <아르테미스>의 계약자인 강현지와 <스카디>의 계약자인 안드레이 다니엘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한 악신들과,
세상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안배가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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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님. 아무래도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현찬은 더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애초에 여유를 부린 적도 없었지만, 더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었다. 구름을 가르며 움직이는 나글파르는 순식간에 아스가르드에 가까워졌다.
“드디어 도착했네.”
로키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때 그녀가 멸망시켰던 세계에서 가장 높고 고귀한 존재들이 머물었던 곳이다. 그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폐허가 된 모습을 그녀는 죽기 직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 유구한 신화의 세계가, 다시 이 자리에 재현된 것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조용하네?”
현찬은 아스가르드에서 느껴지는 기척들을 감지하며 의아했다.
나글파르가 부두에 정박했음에도 아스가르드의 그 어떠한 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현찬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신은 자신의 권능이나 마법의 도구를 이용해서 이쪽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그 시선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러나 직접 나서는 신들은 그중 아주 극히 일부였다.
“저쪽도, 서로 의견이 갈린다는 거겠지.”
로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배에서 뛰어내려 부두에 착지했다. 현찬과 헤르메스도 그 뒤를 따랐다.
“고마웠어. 우리 딸.”
“징그럽게 딸 딸 거리지 마요. 언제부터 그렇게 가족애가 넘쳤다고.”
“그래서 싫어?”
“흥!”
헬은 콧방귀를 뀌며 배의 조타를 잡았다. 나글파르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올 때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며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로키는 그런 헬의 뒷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해도, 헬은 로키에게 단 한 번도 미워한다거나 증오하는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로키의 부드러운 태도가 적응되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 거부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로키는 길게 늘어진 부두를 거침없이 걸었다.
현찬이 물었다.
“의견이 갈린다는 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의미야. 아스가르드 신 중에서도, 너를 막으려는 자들이 있거나 너를 보호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소리겠지.”
“그쪽에서 나를 좋게 봐 줄 신들이 있으려나.”
“너는 의외로 신들에게 평판이 좋거든. 지금쯤이면 침입자의 정체가 너라는 것도 다 퍼졌을 테니, 당연히 너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신들이라면 널 비난하는 다른 신들을 막아주겠지.”
“흠. 대충 찬성파와 반대파가 갈리니까, 결국 서로 합의하고 가만히 있겠다는 건가.”
“뭐. 그런 거지.”
하지만.
로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대한 성벽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꾹 닫힌 성문의 뒤에서는 한 신의 기운이 댐이 방류한 것처럼 콸콸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냥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는 녀석들이 있거든.”
저렇게 대놓고 가는 길목을 막아섰다는 건, 현찬을 반드시 막으려는 신이 분명했다.
로키는 그 기운이 누구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어쩌면 가장 상극의 존재가 바로 저 신일지도 몰랐다.
현찬도 그 기운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헤임달>.”
“맞아.”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과 아홉 바다의 사이에서 태어난 헤임달은 에시르 신족 중에서도 훌륭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무지개의 다리 비프로스트를 지키는 그는 너무나도 뛰어난 시력과 청력 덕분에 북유럽 신역에 그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헤임달은 신화 속에서 로키와 악연이 깊은 사이기도 했다.
라그나뢰크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고 로키의 간계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움직인 것도 헤임달이었으며, 그 전쟁의 끝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동귀어진한 장본인도 헤임달이었다.
여러모로 로키의 반대에 서 있는 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헤임달이, 현찬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고지식하고 외골수적인 녀석이라면 확실히 막을 만도 하지. 뭐. 녀석 능력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도 다 듣고 있겠지만.”
“이거 참 곤란하네.”
“곤란할 필요 없어. 어차피, 막으면 뚫고 가면 그만이니까.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경우, 수호자들이 비프로스트를 타고 이쪽으로 오게 돼. 그렇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걸.”
로키의 말이 맞았다. 현찬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정면돌파를 감행해야만 했다.
앞길을 막아서는 상대가 그 누구일지라도 멈춰 서거나 돌아서 가는 일이 없어야 했다.
시간은 현찬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가자.”
현찬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는 고요했다. 다른 에시르의 신족들은 모두 현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과연 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그들은 모두 이 지루한 신계의 일상에서 벗어난 지금의 유희에 크게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쿠궁!
현찬이 다가오자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성문이 굉음을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우 너비만 수백 미터, 높이까지 하면 그 배는 될법한 거대한 성문이 열리며 안쪽에 있는 아스가르드의 성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황금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조형물을 눈에 담으며, 현찬은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신을 주시했다.
황금색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신은 현찬의 일행을 보며 가볍게 목례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이 문을 지키는 <헤임달>이라고 한다.”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잘 알 거라고 믿지.”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는 건가.
현찬이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헤임달이 옆으로 살짝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나가라.”
“…… 정말입니까?”
“나는 누구처럼 남을 속이지 않는다.”
헤임달의 뼈가 어린 말에 로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딱 봐도 헤임달은 로키를 저격하고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헤임달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현찬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단. 지나갈 수 있는 건 오직 너. 강현찬 뿐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거 아니야?”
헤임달의 말에 헤르메스와 로키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헤임달은 대답 대신 창대를 세워 이쪽을 겨누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이쪽을 막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현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기서 헤임달과 싸우며 시간을 소비했다가는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된다.
“내가 갈게.”
“현찬아!”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현찬은 씨익 웃으며 헤르메스와 로키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목적지가 코앞이야. 이제 거의 다 왔잖아?”
“하지만…….”
“괜찮아. 알잖아? 내가 이런 곳에서 쓰러질 남자로 보여?”
헤르메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푹 떨구었다.
“그래. 알았어. 우리도 최대한 빨리 뒤따라 갈게.”
“걱정하지 마.”
현찬은 앞으로 나서며 헤임달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헤임달은 창대를 내리며 현찬이 지나가기 편하게 길을 비켜주었다.
“가라. 오딘께서 기다리신다.”
“오딘이……?”
북유럽 신화의 주신인 오딘이 그를 기다린다니.
주신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 어떤 신보다도 이득에 민감하고 교활한 신이 바로 오딘이다.
그가 현찬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히 무언가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현찬은 불안감이 들었다.
단지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기에, 미심쩍지만 헤임달이 비켜준 길을 따라 오딘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과 순백의 성안으로 들어선 현찬은, 어지간한 운동경기장보다 더 거대하고 넓은 홀에 도달했다. 바닥에 길게 깔린 붉은 카펫의 끝에는 황금의 옥좌가 있었고, 그곳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현찬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거라. 내 아들. <발드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