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236화 악의 태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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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글파르는 우주를 향하는 로켓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르며 엄청난 속도로 상승했다. 순식간에 니플하임을 벗어나 미드가르드를 지나쳤다. 현찬은 더욱 높이 솟아오르는 니글파르의 난간을 붙잡은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먼 곳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니플하임의 아래에서 보이지 않았던 북유럽 신역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아지는 고도에 기온이 낮아져 한숨을 내쉴 때마다 한기가 입가에 맺혀 허공에 녹아들었다. 현찬은 그 추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위그드라실의 모습에 모든 정신을 빼앗겼다.
그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는 단순히 뿌리만으로 여러 개의 세계를 얽어매 하나로 이어주고 있었다. 하나의 뿌리만 해도 두께만 수십 킬로미터, 길이는 수백 킬로미터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나무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상징할 정도로 거대해서 분명히 멀리 떨어져서 보는데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신기해?”
나글파르를 조종하는 헬은 바깥 풍경을 보며 신기해하는 현찬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그렇게 물었다. 현찬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으로 살면서도 다양한 차원과 세계를 돌아다녀 남들이 보지 못한 풍경을 봐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현찬조차 이 신역의 모습을 보고는 감히 이제껏 남들이 보지 못한 풍경을 봐왔다고 자부할 수 없었다.
신들이 직접 빚어서 만든 세계에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웅장 미가 서려 있었다.
그것에 압도되고 감탄하며 경외심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심리일지도 몰랐다.
“이 세상은 신기한 것투성이네요. 이렇게 배가 빨리 움직이는데도 바람은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데도, 목적지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세상은 넓어요.”
“신들이 사는 세계란 것이 바로 이런 거지. 무엇보다 이 나글파르는 신들이 사용하는 비프로스트만 갈 수 있다는 아스가르드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배다. 평범한 배와 비교하면 곤란해.”
“뭐. 하늘을 난다는 시점에서 이미 평범한 배는 아니지만요.”
현찬은 순박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헬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반쪽만 드러난 얼굴에는 어딘가 그리움이 사무쳐 있었다.
“왜 웃으세요?”
“모습과 존재가 달라졌지만, 그 웃는 얼굴을 보면 확실히 발드르가 맞는구나 싶어서.”
“아. 그런가요. 근데 좀 아쉽기는 하네요. 비프로스트는 한 번쯤은 타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걸 한 번 정도 타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비프로스트는 헤임달이 지키고 있거든. 다른 녀석이 타려고 하는 순간 추방당한다. 애초에 어지간한 존재는 비프로스트를 타지도 못하겠지만.”
헬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다시 배의 정면으로 향했다.
미드가르드를 지나치고 더 높은 곳에 구름을 뚫고 올라가며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했음을 직감한 것이다.
“곧 아스가르드에 도착할 거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데려다줄 수 없어. 외눈의 음흉한 노인네와 약조를 맺었거든.”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까지 오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신에게 도움을 받았던가.
현찬으로서는 참으로 이 고마운 마음을 감히 전부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이런…….”
구름 아래에 펼쳐진 위그드라실과 여러 세계의 모습을 보던 현찬은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현찬의 눈동자에는 황금빛 기류가 동심원을 그리며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에 가까워지자 현찬의 몸 안에 잠든 힘이 점점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힘은 현찬의 능력과 감각을 더욱 확장하고 증폭시켰다.
현찬의 눈동자는 의도치 않게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시켰고 지구의 상황을 아주 순간이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악신회의 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요동치는 힘이 너무나도 불완전해서 <헤르메스의 눈>이 강제로 취소된 것이다. 현찬이 볼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
지금은 악신회만 움직이겠지만, 이제 그 뒤에 있는 거대한 차원들이 움직일 것이다.
다른 차원들을 정복하며 싸움과 약탈, 전쟁을 일삼는 차원들.
악신회의 신들만 해도 이미 재앙에 가까운 위험함을 지니고 있는데 타 차원의 존재들까지 나타난다면 정말로 위험해진다.
아니, 이미 실시간으로 악신회의 신들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가 생기고 있으리라.
현찬은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지구에 남아있었다면, 인명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에 그렇게 남아있었다간 현찬은 더 먼 미래에 필연적으로 패배하고 만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안배는 갖춰놓았다.
‘부디. 잘 막아내길 바랄 수밖에.’
현찬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구름 너머로 점차 드러나는 거대한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구름 너머 보이는 거대한 섬의 모습.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잔뜩 지어져 있으며 곳곳에 무지갯빛과 황금빛이 반짝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아스가르드다.
주신 오딘을 필두로 한 아사 신족들이 머무는 북유럽 신화 최고의 신역.
현찬은 차분한 시선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아스가르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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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다들 화려하게 날뛰어주고 있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브리트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쾌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그를 제외한 다른 악신회 멤버들은 각자 원하는 나라로 가서 마음껏 힘을 발휘하며 날뛰고 있었다.
세트, 야마타노오로치, 트랄텍트리, 튀폰까지.
그들은 평소에 참았던 한을 푸는 듯 파괴와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튀폰은 시칠리아섬 자체를 박살 냈으며 트랄텍트리는 뉴욕을, 세트는 베이징을, 야마타노오로치는 도쿄를 박살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힘없이 꺼져갔다.
세계의 번영과 함께했던 인간들의 생명은 덧없이 흩날리며 사라졌다.
지금 그들의 삶은, 신발에 밟히는 개미들만도 못했다.
어쩌면 그만큼 악신들이 쌓아왔던 분노와 증오가 강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브리트라는 피식 웃었다.
“나는 그렇게 야만적이지는 않으니 말이야. 그렇지?”
브리트라는 장난스러운 악동처럼 낄낄거리며 웃더니 그렇게 물었다.
끄으으! 브리트라의 장난스러운 말에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닌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었다.
숲의 잘려나간 나무 그루터기에 편하게 앉아 있는 브리트라 주위로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이 주변에 쫙 깔려있었다.
온몸의 수분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피부는 쪼글쪼글해져서 주름이 가득했고 살은 거의 사라져 살가죽이 뼈와 맞닿을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거의 죽어가는 모습의 그 사람들이 전부 살아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죽지 못한 채 반송장이 된 고통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뭐야. 물어봤는데 왜 대답을 안 해?”
브리트라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가까이 엎어져 있는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가볍게 힘을 주자 남자의 손이 뚝 하고 부러졌다. 인간의 육체가 아닌 마치 마네킹을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스티로폼 파편처럼 부서지는 그 팔에서는 심지어 피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 사람은 아닌가? 킥킥. 아무튼.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브리트라는 잘려나간 사람의 손을 들어 그것으로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건조해진 피부가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남자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가득했고 그의 입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이런 인간들로는 심심풀이조차 되지 않는 건가.”
브리트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브리트라가 있는 나라는 바로 한국이었다. 그것도 대전에 자리 잡은 군 사령부였다.
바닥에 쓰러진 자들은 소위 각성까지 한 진짜배기 군인들이었다.
그런 군인들이 브리트라를 상대로 쪽도 쓰지 못하고 전부 전멸하고 말았다.
전멸이라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뿐.
심지어 이것은 브리트라가 전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 주변 일대는 무지막지한 가뭄으로 전부 말라서 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그것이 생명체든, 생명체가 아니든 가리지 않는다.
브리트라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곳에 루시퍼를 쓰러뜨렸다는 인간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작 실제로 그런 인간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강해 보이는 인간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지만, 순간의 유희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브리트라가 하품을 하며 지루함을 토해내는 그 순간이었다.
쩌엉!
어디선가 날아온 모래의 창을, 브리트라는 손가락의 끝으로만 가볍게 막아냈다.
그는 갑자기 기습을 당했음에도 별로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가 번뜩이며 흥미롭다는 기색이 강했다.
재미있는 녀석이 찾아왔다.
그도 주워들은 것이 있기에 지금 공격이 강현찬이라는 인간의 것이 아님은 알았다.
그래도 충분한 강자의 것이다.
“오오. 드디어 내 지루함을 해치워 줄 인간이 나타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브리트라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아누비스의 계약자인 리네넷이었다.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그 폭풍은 얼핏 보면 매우 사나워 보이는 재해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거칠게 몰아치는 것 같았던 폭풍은 바닥에 쓰러진 군인들의 몸을 부드럽게 휘감아 안전한 구역으로 옮겨주었다.
브리트라는 그 모습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하. 저 쓰레기 녀석들을 먼저 보호하려고 하다니. 어지간한 성자가 납셨군.”
단순히 겉모습을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일 뿐이었다. 소녀라고 부르기엔 조금 성숙해 보였지만 그래도 앳된 티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트에게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데?’
그렇다는 건 세트와 비슷한 신화의 존재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리다.
정체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나서기도 껄끄러웠다. 조금 전에 보여준 모래폭풍의 기세만 보아도 평범한 신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재미있다.
브리트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은 누구죠?”
군인들을 전부 안전한 곳으로 옮긴 리네넷은 브리트라를 노려보며 그렇게 물었다. 워낙 순박한 인상이다 보니 노려 본다기보다는 화를 내는 척하는 것 같았다. 물론 리네넷 본인은 가장 무서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쎄다. 내가 누구일 것 같아?”
“누구인지 이름은 모르지만, 어디 소속인지는 알아요. 악신회라고, 무척 나쁜 악당들이 모이는 곳에서 왔죠?”
“오! 정답이야. 이 아저씨는 매우 나쁜 사람이란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요.”
“그것도 아는 건가. 조숙한 꼬마로구나.”
브리트라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리네넷은 그런 브리트라를 보며 자세를 잡았다.
현찬의 말대로였다. 그가 자리를 비운 순간, 적들이 이때다 싶어서 세상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리네넷은 이제 본격적으로 오버랭크 헌터로서의 업무를 수행해야 할 때였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런 리네넷을 보며 브리트라가 이죽거렸다.
“꼬마 아가씨. 괜찮겠어? 이 세상에는, 나 말고도 위험한 친구들은 아주 많다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걸요.”
리네넷은 두려움을 참아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현찬에게 배운 것.
절대로 상대를 앞에 두고, 평정심을 일지 말라.
울음이 나올 것 같으면, 웃으며 허세를 부려라.
리네넷은 그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쪽에도, 제 친구들이 갔거든요.”
현찬이 마지막에 남긴 안배.
세상을 지키기 위한 오버랭크 헌터들이 악신회 신들의 앞에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