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35화 악의 태동 (2)
_
북유럽 신역의 저승은 한국 신역과는 판이한 풍경이었다.
하늘 위에는 거대한 섬들이 부유하고 있었으며 그 위에서 새하얀 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섬들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폭포를 이루어 저승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현찬은 그 아래에 흐르는 강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했다.
지옥이라고 부르기엔 밝은 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 어딘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다.
그렇다고 마냥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강변 근처에는 차가운 얼음들이 가득 맺혀 있어서 닿기만 해도 살이 베일 것만 같았다.
<니플하임>.
북유럽 신역에서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며 무스펠하임과 함께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곳이다.
뱃사공은 가까운 곳에 배를 멈춰주었다.
바리데기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현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정말로 죄송해요. 저는 이 이상 더 도와드릴 수가 없답니다.”
“아닙니다. 이미 충분한 도움을 받았는걸요.”
바리데기가 없었다면 현찬 일행은 구삼승할망에게 발이 묶였을 것이다. 이쪽이 본격적으로 힘을 낸다면 벗어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시간을 지체하게 됐을 게 분명했다.
바리데기의 도움 덕분에 저승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바로 북유럽 신역까지 올 수 있었다.
바리데기는 현찬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연거푸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저승의 여신이지만 역으로 자애심이 너무 많은 그녀이기에 현찬을 돕지 못한 자신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이었다.
화가 나면 무섭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누구보다도 선량하고 성격이 좋은 여신이었다.
배에서 내린 현찬은 헤르메스, 로키와 함께 니플하임을 걸었다.
현찬이 떠나가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바리데기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흔들던 손을 멈추고 나룻배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뱃사공은 노를 이용해 강둑을 밀어 배를 다시 강물에 띄웠다.
“여전히 자애로움이 깊으시군요. 바리데기 님.”
“팔자에도 없는 뱃사공 역할은 충분히 즐기셨나요. 강림도령.”
“별로 힘들 것도 없었습니다.”
뱃사공이 삿갓을 들어 올리고 코까지 가린 복면을 내렸다. 이목구비가 훤칠한 미남인 강림도령은 이제야 살겠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상대는 아무리 대단한 운명을 타고났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인간이자 침입자. 너무 잘해주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 어쩔 수 없는걸요. 저렇게 길을 잃은 아이가 보이면, 저로서는 꼭 품어서 보듬어주고 싶어서.”
“저승의 여신답지 않은 말씀이시군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뭐, 그쪽도 저승사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지만요. 조금만 위험했다면 현찬이라는 인간을 지키려고 했을 거면서.”
“크흠. 저야 염라 님의 명령을 받았기에 그럴 뿐입니다. 무엇보다, 바리데기 님이 너무 자신의 직권을 남용하지 않는지 감시의 명목도 있는지라.”
“저승의 대왕들은 너무 깐깐하다니까요. 강림도 그렇게 생각하죠?”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저의 상급자들이시니. 그보다 빨리 가도록 하죠. 저승의 일이 밀리겠습니다.”
“그럼 제가 머무는 곳까지 데려다주시겠어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바리데기에게 강림은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가면 덕춘이와 해원맥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머. 그 둘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겠네요. 기대돼라.”
바리데기를 실은 나룻배는 삼도천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간간이 강림과 바리데기의 수다만이 고요한 삼도천을 작게 울렸다.
&
“여기서부터는 내가 길을 알아.”
니플하임에 도착하고 난 뒤에 일행 중 가장 앞장서서 걷는 건 로키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이곳은 북유럽 신역이다. 이 셋 중에서 이곳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로키일 것이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위로 올라가야지.”
로키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위에 고도 수 킬로미터 높이에 거대한 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저 섬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위, 훨씬 너머에 존재하는 천계까지 가야만 했다.
현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딱 봐도 엄청나게 먼 거리에 있는 천계까지 날아가는 건 사실상 무리 같았다. 그렇다고 저곳으로 향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로키는 요염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현찬의 앞에 손가락을 흔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북유럽의 신역이며 저승의 역할에 가까운 곳인 니플하임이지.”
“그래. 그렇다면 이 니플하임은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알아?”
“그거야 <헬>이…… 아!”
현찬은 그 이름을 꺼내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이곳 니플하임을 지배하는 여신은 바로 <헬>이다.
혹은 ‘헬라’라고 불리는 이 여신은 로키의 딸이기도 했다.
로키가 저렇게 당당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멀리서부터 뿌연 눈밭을 가르며 자그마한 가마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마라기보다는 사실상 바깥의 가림막이 없었다. 의자에 가까웠다. 그것을 이고 오는 사람은 하인과 하녀였다.
하인과 하녀가 이고 오는 옥좌 위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은 얼굴의 절반을 딱 가리는 무도회 가면을 쓰고 있었다.
로키는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야호! 헬! 엄마 왔어!”
로키의 방정맞은 인사에 그녀의 딸, 헬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겠죠.”
“응? 내겐 성별 따윈 상관없는걸. 내가 엄마라고 한다면 엄마겠지. 우리 딸, 왜 그래? 사춘기야?”
“자식은 신경도 안 쓰는 엄마가 그렇게 주장해도 별로 와 닿지는 않거든요? 쯧. 어쩌다 저런 부모를 뒀는지.”
헬라는 대놓고 혀를 찼다. 혈육 사이라고 보기에는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헬 쪽에서 일방적으로 로키에게 틱틱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또 나쁘냐고 하면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다. 헬의 언행에 로키를 향한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딱 자신을 낳아준 신 취급하는 정도였다.
“저 사람인가요? 엄마의 마음에 들었다는 인간. 신계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수호자들까지 따돌리고. 아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데요.”
“응.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어.”
“도움이요?”
로키의 입에서 평생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에 헬은 가면 밖으로 드러난 한쪽 눈을 크게 떴다. 기만과 속임수의 신이자, 절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힌 적 없는 로키가 한 소리다.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숨어있을지도 몰랐다.
혈육에게도 의심받는 로키였지만, 헬은 혈육이기에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정말로요?”
“그럼 내가 가짜로 말하겠니?”
“글쎄요. 엄마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을는지.”
“옛날은 옛날일 뿐이야. 됐고. 도와줄 거야. 말 거야?”
한 시가 바쁜 상황이다 보니 로키가 본론을 꺼냈고, 헬은 뭔가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돕고 싶지 않았다면 여기에 오려고 하지도 않았죠. 하여튼. 잘해주는 건 없으면서 부려먹는 건 참 잘해.”
“딸 좋다는 게 뭐니?”
“뭐라는 거예요. 징그러우니까 그렇게 웃지 말아요. 정들어요. 자. 여러분. 따라오세요. 헤르메스 님 그리고…… 음?”
현찬을 자세히 살피던 헬은 현찬의 안쪽에 잠든 존재의 힘을 감지해냈다.
그것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발드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헬의 눈동자가, 현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
“과연.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어쨌든, 우리는 최대한 빨리 빛의 신전까지 가야 해.”
“그렇다면 저를 잘 찾아오셨어요.”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일행의 앞에 거대한 빙하의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깎아지는 듯 꺾어지는 절벽의 아래는 그야말로 검은 무저갱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찬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저 검고 끈적거리는 어둠의 안쪽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음을.
낭떠러지를 건널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아주 얇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좁고 긴 다리였다.
“조심하세요. 저 아래는 <나스트론드>입니다. 떨어지면 늑대랑 니드호그에게 물어뜯기니, 떨어져도 책임 못 집니다.”
저곳이 진짜 북유럽 신역의 지옥 <나스트론드>.
현찬은 호오, 하고 감탄하며 별다른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헬의 뒤를 따랐다.
낭떠러지 너머에는 커다란 얼음 궁전이 있었다.
헬과 그녀의 권속들이 지내는 성이었다.
하인과 하녀가 헬이 타고 있는 옥좌를 자리에 내렸다. 헬은 우아하게 내리며 하인과 하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강글로트. 강글라티. 가서 배를 준비하렴.”
“네. 여왕님.”
하인과 하녀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헬은 느긋하게 강글로트와 강글라티가 사라진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그녀가 딱 도착할 때 즈음, 그녀의 충실한 하인과 하녀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것이다.
“발드르. 기억나나요? 당신이 처음 죽었을 때, 이곳의 특실에서 머물었었죠.”
“음. 그런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
헬은 지옥의 여신이며 로키의 딸이었지만, 그런데도 다른 북유럽의 신들과 딱히 척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니플하임에 떨어진 발드르를 극진히 모셨으며 그를 상당히 잘 대해 주었다.
이곳에는 은연중에 발드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로키는 눈을 부릅뜨고 헬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둘이서 뭐 했어?”
“뭘요?”
“남녀가 이런 공간에 둘이 있으면, 당연히 뭔가 있었을 거 아니야!”
“제가 엄마랑 같은 줄 아세요? 애초에 여기에 제 권속들도 다 지내거든요? 무슨 일이 있기는 뭐가 있어요.”
“아니야. 여자의 감으로 말하건대, 분명히 뭐가 있었어.”
“남자였으면서 여자의 감은 무슨…….”
헬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안 보는 사이 로키는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외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키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나 기색, 그녀의 행동거지 자체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꼽는다면.
아마도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 얼음 궁전을 둘러보는 현찬이 분명하리라.
‘재미있네.’
헬은 속으로 웃으며 복도의 끝에 있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을 두 손으로 활짝 열었다.
헤르메스는 방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배를 보며 ‘오!’ 하고 감탄했다.
그만큼 저 배를 보는 건 헤르메스도 처음이었다.
“저거 <나글파르> 아니야?”
<나글파르(Naglfar)>.
지옥의 여신 헬이 죽은 사람의 손톱과 발톱을 엮어서 만든 배다.
라그나뢰크가 시작되자 거인들이 이 배를 타고 아스가르드로 향하기도 했다.
그 신화 속 전설의 배가 거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설마 이 배가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었을 줄이야. 라그나뢰크 이후에 위그드라실과 함께 불타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 배에 관해서 잘 알고 계시는군요. 신 헤르메스. 물론 그 말대로 이 배는 한 번 크게 파괴됐습니다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복구되었답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커지고 발전했죠. 그리고 이 배가, 여러분들을 저 위로 데려다줄 것입니다.”
&
“제길!”
토르는 코앞에서 현찬을 놓쳤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애꿎은 바위를 깨부쉈다. 옆에서 두르가가 그런 토르를 한심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녀 또한 화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토르 본인도 힘 조절을 하고 있으니 딱히 말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토르가 정말로 화풀이했다면 바위가 부서지는 게 아니라 어지간한 신역의 한 귀퉁이가 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어서 두르가가 입을 열었다.
“방해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보다 너무 성급하지 마세요.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이상, 금방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다른 수호자들도 이미 북유럽 신역의 경계지역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별로 걱정할 것도 없겠지만요.”
“그래. 내 고향이 있는 신역. 거기로 간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빨리 쫓아가서 현찬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발드르와 무슨 관계였는지. 왜 인간이 네가 그의 기억이 있고, 그의 힘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 태산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토르의 뇌리로, 불안한 가설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설마…… 그 인간이 만에 하나 발드르의 환생이라면?’
토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두르가! 나 먼저 간다!”
“잠……? 토르! 같이 움직여야죠!”
“그럴 시간이 없어!”
토르는 그렇게 외치며 그대로 번개로 변해 북유럽의 신역이 있는 방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만약에 그의 생각이 맞는다면.
현찬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