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234화 악의 태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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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중해 한가운데 떠 있는 시칠리아섬.
이탈리아 자치주에 속해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인 이곳에는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지만, 습도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사람들은 별다른 힘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관광하기 위해 제각각 카메라를 들거나 가방을 멘 사람들이 시칠리아섬 여기저기를 신기하다는 듯 사진 찍고 있었다.
단체로 관광 온 버스에서 일말의 무리가 내렸다. 중국에서 패키지여행을 하러 온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중국어로 서로 뭐라고 떠들며 가이드의 뒤를 아기오리처럼 따라다녔다.
가이드는 친절하게 웃으며 멀리 보이는 커다란 화산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러분. 보이시나요? 저곳이 바로 에트나 화산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높고 가장 활발하게 행동하는 활화산이죠. 원래 이곳은 한때 <난제> 중 하나인 <울트락투스>가 머무는 곳이었지만, 오버랭크 헌터인 안드레이 다니엘이 쓰러뜨리고 난 뒤에는 재개발하여 훌륭한 관광지가 되었답니다.”
오오오.
중국인들은 감탄하며 에트나 화산의 사진을 마구잡이로 찍었다.
그런 인파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었다.
“하찮구나.”
그리스 신화 최강 최악의 괴물 <튀폰>은 높은 하늘에 뜬 채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역시, 전부 제거하는 것이 옳은 일일 테지.”
그는 세상을 향해 분노한 가이아와 타르타로스 사이에 태어난 거신이다.
제우스조차 그의 힘을 두려워하며 겁냈고 모든 인간이 우러러보던 올림포스의 신들조차 튀폰을 두려워해 짐승으로 변하여 도망쳤다.
튀폰은 스스로 힘에 자부심을 지녔으며 자신이야말로 세상을 파괴할 파멸의 인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는 방심해서 패배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곳에는 나를 막을 신조차 없지.”
튀폰은 운명의 세 여신에게 속아서 인간의 음식을 먹어버렸고, 그의 신성에 강하게 금이 가버려서 힘을 회복한 제우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튀폰은 아직도 그때의 뼈저린 패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복수하기 위해 얼마나 이를 갈았던가.
앞으로 일어날 학살은,
그의 복수를 알리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일단 그 시작으로, 튀폰은 에트나 화산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때 하계에 존재하던 시절 자신의 육신을 가둬버린 거대한 화산. 제우스와 헤파이스토스의 끊임없는 감시 아래 벗어나지도 못한 채 계속 분노만 곱씹어야 했던 그의 감옥.
“오늘부로 전부 사라질 것이다.”
튀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트나 화산을 향해 오른손을 길게 뻗었다.
그의 오른손의 끝에 파괴의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늘이 또 다른 태양이 뜬 것처럼 밝아졌고, 관광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빛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너무 눈부셔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선글라스를 쓴 몇 명은 하늘에 누군가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란 시민들이 손가락을 뻗어 튀폰을 가리켰다.
“저길 봐! 누군가 있어!”
“윽! 눈부셔서 잘 보이지 않잖아?”
“저게 뭐지? 커다란 빛 같은 게 떨어지고 있는데?”
튀폰의 손가락 끝에 모였던 빛의 덩어리는, 그대로 하늘을 가르며 운석처럼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아직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시민들은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미친!”
관광객들의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이 비명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파견한 헌터들이었다.
<난제> 중 하나가 나타났던 구역인 만큼 언제 다시 이상 현상이 발생할지 몰랐기에 이탈리아 정부는 헌터들을 이 시칠리아섬에 파견하여 경비를 세운 것이었다.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게이트 현상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악신회 멤버 중 하나인 튀폰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이곳에 모인 그 어떤 헌터들 조차 튀폰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자연재해 그 자체였으니까.
번쩍!
새하얀 빛 덩어리가 지면에 닿자마자 거대한 광원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홀린 듯이 그 빛의 폭발을 바라보았다. 폭발은 순식간에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와 가장 가까운 에트나 화산이 빛에 휩싸여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그다음은 관광객들의 차례였다.
콰아아!
새하얀 빛 폭발이 관광객들을 집어삼켰다.
그 누구도 비명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들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뼛조각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흩어졌기 때문이다.
콰르릉!
뒤이은 거대한 소음과 끔찍한 폭풍이 시칠리아섬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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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타임스퀘어(Times square).
뉴욕시 맨해튼의 대표적인 명소다. 뉴욕과 함께 발전한 이 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광고들이 올라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네온사인들과 수십 개가 넘는 거대한 광고판에는 실시간으로 다양한 광고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에는 사람들이 가득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곳곳에는 길거리 뮤지션들이 각자 재능을 뽐내며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경적과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 중심에 거적때기를 걸친 한 여성이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초라한 행색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피해 다녔다.
머리까지 푹 뒤집어쓴 누더기 바깥으로 녹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바람에 나풀거렸다.
“이거냐……?”
누더기를 뒤집어쓴 그녀, 트랄텍트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를 악물었다.
“고작 이거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꼭 감춰놨던 그녀의 기세가 분노를 타고 은연중에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트랄텍트리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주위로 휑한 공터가 생겼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렀다.
정작 트랄텍트리는 그런 인간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발전한 향락의 거리를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었다.
“고작 이런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 날 죽였던 것이냐!”
펄럭!
그녀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 겉에 걸친 누더기가 바람을 맞아 거칠게 펄럭였다.
꺄아악!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트랄텍트리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거대한 바람이 뒤로 넘어뜨렸다. 일대에 소란이 일었다.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들이 트랄텍트리를 발견하고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직감했다. 경찰들은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들었다. 마석을 이용한 권총이라 어지간한 하급 몬스터도 제압이 가능한 신형 무기였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일부 경찰들은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무기를 쥔 경찰들은 트랄텍트리를 포위했다. 그걸로 불안해서 무전을 통해 지원을 요청했다. 가까운 곳에 대기 중이던 경찰차 몇 대가 빠르게 현장으로 도착했다.
적색과 청색의 불빛에 트랄텍트리의 시선이 경찰들을 향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로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와 살기에 경찰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주변은 광고판의 광고로 시끄러워야 할 텐데 그 자그마한 소리가 전부 다 들릴 정도였다. 트랄텍트리가 등을 돌려 경찰들을 보았다.
멀리서 호기심 어린 시민들이 몰려와 무슨 일인지 살폈다.
“그래. 너희 인간들이 있었지.”
트랄텍트리는 처음에 인간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녀는 악신회의 다른 신들과 다르게 인간들에게 딱히 악감정을 품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경멸하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과거의 일이었다.
자신을 찢어 죽여 하늘과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세워진 이 도시를 보니 트랄텍트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고작 이런 걸 만들기 위해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던 자신을 그렇게 잔혹하게 찢어 죽였단 말인가?
그녀는 그것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자신을 죽인 <케찰코아틀>과 <테스카틀리포카>도,
그들이 만든 땅에 지어진 이 세계와 도시도,
그 위를 거닐며 행복하다는 듯 웃는 인간들도.
전부 미웠다.
그녀는 악신회주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복수의 기회를 만들어 줬으니까.”
“히익! 쏴, 쏴라!”
트랄텍트리의 소름 끼치는 미소에 경찰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마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권총에서는 마력이 레이저처럼 트랄텍트리를 향해 쏘아졌다. 어지간한 합금도 구멍을 뚫어버릴 위력이었다.
“우습구나.”
놀랍게도 그 공격은 트랄텍트리의 코앞에서 수직으로 꺾여 맨땅을 헤집었다.
트랄텍트리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구경하는 시민들을 보았다. 그 벌레 떼 같은 모습에 그녀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트랄텍트리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던 누더기를 벗어 던지며 악어가죽으로 이루어진 옷으로 뒤덮인 몸매를 과감히 드러냈다. 몇몇 남자들이 음욕이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트랄텍트리는 발을 들어 그대로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쿠우우웅!
행동은 가벼웠지만, 그 결과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알맹이처럼 뭉친 거대한 충격은 그대로 지면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지하의 깊은 곳까지 도달한 그녀의 힘은, 그대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르르릉!
지진이 일어났다.
거대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순식간에 주변 일대를 뒤흔들었다.
콰직!
“꺄아악!”
“지, 지진이다!”
광고판이 거친 소음을 뿜으며 무너져 내렸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아래에 깔렸다. 무너진 잔해의 틈새 사이로 붉은 피가 웅덩이처럼 바닥에 고였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나 살겠다며 도망쳤다.
지면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그 틈새로 떨어졌다. 건물 외장재가 떨어져 나오며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사람들이 거기에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흩뿌리며 죽어 나갔다.
일부 건물들은 무너져 내렸으며 경찰들로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까지 치달았다.
트랄텍트리는 그 재앙의 한가운데에서 무너지는 도시를 보며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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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천에서의 싸움은 치열할 거라는 현찬의 예상과 다르게 싱겁게 끝났다.
아무리 구삼승할망이 바리데기와 같은 여신이라 하더라도 힘의 격차는 너무나도 컸다.
바리데기는 서양으로 치면 하데스와 맞먹는 지위와 힘을 지닌 저승의 인도자였고 구삼승할망은 그저 죽은 아이들을 돌보는 여신일 뿐이었다.
구삼승할망이 망자들을 이끌고 왔음에도 그녀는 바리데기를 이기지 못했다.
삼도천 깊은 곳에 잠든 사령들은 바리데기의 명령을 받들어 모든 망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거대한 해골의 손이 구삼승할망의 몸을 구속했다. 그녀는 얼굴만 튀어나온 채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바리데기! 여기서 날 이겼다고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저 하등한 인간을 막으려는 자가 나 혼자만 있는 줄 알아? 이미 잔뜩 벼르고 있는 다른 신들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저 망나니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 없습니다. 가시죠.”
바리데기의 말에 삿갓을 깊게 눌러 쓴 뱃사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노를 저었다.
뒤에서 구삼승할망이 악에 받쳐서 뭐라고 자꾸 외쳤지만, 일행은 그 말을 무시했다.
“대단하시네요.”
“별말씀을. 이곳은 저의 영역이라, 제가 조금 힘을 썼을 뿐입니다.”
“그걸 제외해도 강하시던데.”
“후훗. 너무 추켜세워주면 부끄럽답니다.”
바리데기에게서는 현찬이 지금까지 만났던 여성들에게 느끼지 못한 ‘연상미’가 강하게 풍겼다. 실제로 그녀는 신화 속에서도 다둥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연상의 매력이란 말인가? 현찬은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한쪽이 근질거리는 묘한 기분이었다.
물론 현찬의 그런 간단하고 가벼운 마음 변화는 헤르메스와 로키가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바로 포착되었다.
“야! 좋냐? 응? 좋아?”
“이거 입 헤벌쭉해진 거 봐라. 좋냐? 엉? 유부녀가 좋아?”
“크흠. 아니 너희는 또 왜 그러는 건데?”
현찬은 헛기침했고 바리데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웃는 모습조차도 어딘가 귀족처럼 우아하고 고상했다.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제게도 그런 계약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혹시 저와 계약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바리데기의 은근한 어필에 헤르메스의 눈썹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어딜 감히 내 계약자에게! 우리 아빠가 바람을 피우지 않아도 안 돼!”
“아빠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냐.”
물론 제우스는 그럴만한 취급을 받을 만했다. 그래도 한 신화의 주신인데…….
현찬은 어이없어했고 바리데기는 그런 헤르메스가 귀여운지 계속 미소 지었다. 헤르메스는 바리데기를 향해 성난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계속 노를 젓던 뱃사공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덧 일행은 북유럽의 신역 경계를 막 넘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