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233화 저승 신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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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게 흐르던 삼도천이 거친 풍랑을 맞이한 것처럼 크게 출렁였다. 현찬은 자그마한 나룻배의 난간을 잡으며 몸을 고정했다. 흐르는 삼도천의 수면이 거칠게 일렁이더니 커다란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물기둥 위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바리데기와 다르게 화려한 붉은빛 비단옷에 황금색의 각종 장신구로 치장된 옷을 입은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리데기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언제나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구삼승할망>.”
“할망이라 부르지 마! 저승 삼신이다!”
<구삼승할망>.
저승 할망 혹은 저승 삼신으로 불리는 한국 신화의 여신이다.
삼신할미와 비슷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삼신할미가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점지하는 탄생 신이라면 구삼승할망은 삼신할미와 반대급부에 선 신이기도 했다.
탄생의 신의 반대라고 해서 죽음에 관해 직접 다루는 건 아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정확히는 죽어서 저승으로 내려온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으니까.
‘구삼승할망이라니. 들어본 적 있어.’
한국 신화의 모든 신을 꿰고 있는 현찬은 갑자기 등장한 구삼승할망을 보며 잔뜩 긴장했다.
죽은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구삼승할망이 선하고 친절한 신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한국 신화에는 다른 신화와 다르게 악신이라는 개념이 없다. 신화 속에 존재하는 신들간의 전쟁 같은 것도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런데도 전부 선한 신들만 있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그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는 구삼승할망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개성 있는 여신이기는 했다.
희대의 싹수없는 여신으로 말이다.
구삼승할망은 태생부터 고귀했다.
동해 용왕의 딸로 태어났으며 심지어 어머니는 서해 용왕의 딸로서, 2대 용궁의 핏줄을 전부 다 잇는 고귀한 공주였다.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신력과 권력, 명성을 자랑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성격이 개차반이였다.
공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개차반 같은 성격 때문에 그녀는 용궁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결국, 그녀는 인간세계에서 삼신할미의 자리라도 얻으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산모로부터 아이를 건강하게 탄생시켜야 할 그녀가 실수로 산모와 아이를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심지어 옥황상제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내려온 진짜 삼신할미와 대면하자, 자기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그녀를 폭행하기까지 했다.
‘성격이 파탄 나도 이렇게 파탄 난 여신이 또 없었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걸 보면 완전히 악 성향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화가 나면 일단 손부터 올라가서 상대방의 싸대기를 날리는 성격만 보면 그야말로 어디 소설 속에 나오는 악녀가 따로 없었다.
그런 구삼승할망이 현찬을 막아서기 위해 직접 나타난 것이다.
물 위를 걷고 있는 능력은 용왕의 딸이기에 지니는 기본적인 권능이리라.
구삼승할망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원래부터 표독스러운 인상이 강했는데 거기에 표정을 찌푸리니 그야말로 야생의 살쾡이가 따로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물어뜯을 것 같은 살벌함이 느껴졌다.
“나처럼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할미라 부르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는 걸 몰라서 그래?”
“뭐 솔직히 할망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죠.”
“그렇지?”
“그렇다고 소녀도 아니지만요.”
빠직!
바리데기의 가시가 실린 말에 구삼승할망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망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여신을 지칭하는 ‘할할미’에서 따온 말이다. 다만 시대가 바뀌면서 쓰이는 방식이 달라졌고, 그 때문에 구삼승할망은 자신이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왜 할망이라 부르냔 말이냐!
구삼승할망이 품은 불만은 이거였다. 주변 신들에게 물으면 그녀는 할망이라 불릴 외모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 젊지도 않았다.
그냥 관리를 잘 받아서 좀 젊어 보이는 40대 여성의 느낌 정도?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나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많이 한 아줌마라는 느낌이 강했다.
미인이긴 미인인데 원래 포악한 성격과 그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강했다.
“흥. 일단 그건 뒤로 미루고. 내가 왜 여기에 나섰는지 잘 알고 있겠지?”
“어머나. 저는 잘 모르겠는걸요. 대체 왜 저승의 관리자인 제 앞을 당신이 막아서고 있는지 설명을 좀 해주실까요?”
“시치미 떼지 마. 바리데기. 네가 외부에서 온 침입자를 몰래 데리고 간다는 소식은 이미 입수했어. 그 녀석이지? 허락받지도 않고 멋대로 신역에 숨어들어 온 쥐새끼가.”
구삼승할망은 현찬을 노려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높은 혈통을 지닌 그녀는 기본적으로 선민사상을 탑재하고 있는 여신이었다.
그런 그녀로서 신도 아닌 인간이 감히 건방지게 신역이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할 따름이었다.
바리데기는 현찬의 앞에 서며 구삼승할망의 시선을 차단했다.
구삼승할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리데기.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오히려 제 쪽에서 묻고 싶은 말씀이네요. 어째서 제 앞길을 막은 거죠?”
“나는 수호자가 아니지만 여신이다. 신도 아닌 침입자가 신역에 발을 들였으니, 당연히 여신으로서 녀석을 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상하네요. 이분은 침입자가 아니라, 제 손님인데 말이죠.”
계속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바리데기의 태도에 구삼승할망의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바리데기. 지금 신역에 반기를 드는 거냐?”
“반기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마고께서도 이미 알고서도 넘어간 일이랍니다.”
“넘어갔다는 말이 승낙을 뜻하지는 않지.”
“거절을 뜻하는 것도 아니죠.”
계속 물고 늘어지는 대답에 결국 구삼승할망의 분노가 폭발했다.
“됐으니까 비키라고! 나는 저 건방진 침입자를 제거할 테니까!”
“안타깝게도 안 되겠는걸요? 저는 이분을 지켜줄 생각이라서요. 감은장아기와 청비의 부탁이기도 하니까요.”
“…… 지금 저승의 신이라고 해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네가 모든 저승을 관장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잘 알죠.”
싱글싱글 웃던 바리데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구삼승할망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해도, 당신이 제게 해코지를 할 수 없는 자리라는 걸.”
“…… 킥. 그래.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혼자 고귀한 척, 자상한 척. 내가 모를 줄 알아? 네년이 얼마나 끔찍한 재액을 몰고 다니는 년인지.”
“글쎄요. 얼마나 성격이 개차반이었으면 용왕인 부모님께서 내쫓았는지 모를 아줌마의 이야기밖에 몰라서요.”
“내가 혼자 온 줄 알아? 잊었어? 이곳은 저승이자 지옥. 허락받지 않고 들어온 자를 노리는 망자는……어디에나 있지.”
촤아악!
구삼승할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룻배의 주위에 검은 그림자가 생기는 듯하더니 삼도천의 강물을 뚫고 기괴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새까만 피부와 삐쩍 말라 뼈밖에 없는 몸뚱어리, 얼굴은 이목구비 중에 입만 달린 징그러운 생명체였다.
그들은 이 지옥을 떠도는 망자들.
산자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망자들에게 있어서 현찬은 아주 탐스러운 먹거리였다.
저승의 관리자인 바리데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지만, 구삼승할망이 거기에 손을 썼다.
동급의 여신이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을 해주니 망자들은 두려울 게 없어졌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산자를 향한 살의와 그것을 먹겠다는 욕망뿐.
저승의 망자들이 개미 떼처럼 나룻배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바리데기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를 너무 우습게 보신 것 같네요. 구삼승할망.”
“할망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제가 단순히, 저승에서 영혼을 인도하는 일만 한다고 너무 절 낮게 보셨어요. 그러니, 저도 이참에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바리데기는 싱긋 웃었다.
그것은 분명히 같은 미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과 같은 자애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망자들은 일순 멈칫했다.
바리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망자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품었다.
“제가 왜 저승의 여신이라 불리는지 말이죠.”
딸랑.
바리데기가 들고 있던 방울에서 청명한 소리가 삼도천의 수면을 타고 천천히 퍼져나갔다.
“모두 덮쳐!”
구삼승할망의 발작적인 외침에 망자들은 용기를 얻었다.
이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망자들은 현찬을 향한 살의를 강하게 불태웠다. 그것이 바리데기를 향한 두려움을 씻어주었다.
망자들이 허공에 높게 뛰어올라 사방에서 나룻배를 향해 들이닥쳤다.
그 엄청난 물량에 주변의 빛이 차단되어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런데도 바리데기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찬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믿기로 했다.
그녀는 저승의 신. 심지어 감은장아기가 직접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다.
고작 망자 따위에게, 그녀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상황은 현찬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딸랑!
바리데기의 손에 쥐어진 방울이 한 차례 더 흔들렸다. 망자들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촤아악!
삼도천의 강물이 크게 출렁이더니 거대한 손이 튀어나와 주변에서 달려드는 망자들을 모두 뿌리쳤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전부 해골로 이루어져 있는 거대한 손이었다. 손은 강물에서 계속 튀어나오며 망자들을 후려쳤다.
고요했던 삼도천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바리데기는 저승의 여신이며 사령(死靈)을 통제하는 여신이다.
그녀야말로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한국 신화의 여신.
서양으로 친다면, 하데스와 맞먹는 힘을 지녔다는 소리였다.
삼도천의 바닥에는 그 강을 미처 건너지 못한 수많은 유골이 있었다. 강을 건너지 못해 그 아래에 깊이 잠든 유골들이, 바리데기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수만의 해골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들이 삼도천의 곳곳에서 튀어나와 망자들을 뭉개고 쥐어 짜냈다.
삼도천이 순식간에 망자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바리데기!”
“덤비세요.”
분노한 구삼승할망이 바리데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
중국의 수도 베이징.
한때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괴물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 멸망 직전까지 갔던 도시는 지금은 거의 다 복구되어서 다시 옛날의 위용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더욱더 발전한 덕분에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뭐야?”
길을 걷던 한 남성은 자신의 신발 밑창에 느껴지는 수북한 모래의 감촉이 의아했다.
이 근처는 전부 콘크리트로 바닥을 뒤덮어서 모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공사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황사라도 일어난 걸까?
어제 여기를 지나갈 때만 해도 없던 모래가 광범위하게 바닥에 깔려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생겼다고는 볼 수 없는 수준의 모래를 보며 남자가 의아한 순간이었다.
푸슉!
“어?”
남자는 목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놀랐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지던 남자는, 손바닥에 묻어나온 피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남자의 시야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 본 것은, 목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의 몸통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모래밭이 펼쳐진 베이징 일부에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모래는 날카로운 창과 칼날이 되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건물의 옥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 보는 세트는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