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232화 저승 신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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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아지다하카는 회주가 머무는 거대한 방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쪽에서 ‘누구냐’는 물음이 작게 들려왔다. 웃기는 일이었다. 회주의 능력이라면 이미 그가 왔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누구냐고 묻다니.
어쩌면 저것은 회주가 지금 코앞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힘을 크게 소모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아지다하카는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회주님. 접니다. 아지다하카.”
“…….”
정체를 밝혔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지다하카는 가만히 문 앞에 서서 회주의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대답이 돌아오는 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무슨 일이지?”
“현재 다른 차원과의 협약이 완전히 끝났으며 곧 회주님께서 명하신 ‘정화’ 작전의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서 그걸 알리고자 들렸습니다.”
“들어와라.”
“예.”
회주의 명령에 아지다하카는 거대한 석문을 열고 회주가 머무는 회랑으로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싸늘한 공기가 바깥으로 뿜어 나오며 아지다하카의 피부를 자극했다.
빛이 가득했던 복도와 경계라도 그어진 것처럼 방 안쪽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몇 번이고 찾아온 곳이지만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며 동시에 감탄을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회주의 힘으로 이루어진 이세계.
그의 힘은 자신의 주변 공간을 장악하여 수중에 넣을 정도로 강력했다.
“자세한 상황을 말해라.”
“예.”
아지다하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그는 다른 신들이 각기 다른 차원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전부 회주에게 전해주었다.
‘음.’ 악신회주는 대답 대신 그런 소리를 내며 옥좌에 앉은 채 한 손에 턱을 괴었다. 아지다하카는 설명하다가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회주를 보았다.
“회주님?”
평소라면 위에서 내려오듯이 느껴졌을 그의 시선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회주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회주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다른 세계의 동향을 살피느라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해졌을 뿐.”
“다른 세계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보이지 않는다.”
“예?”
보이지 않는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아지다하카는 의문이 들었지만 입을 열어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그가 모시는 자가 알아서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너희들이 말한 그 인간, 강현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지구에 있지 않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다른 차원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악신회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도,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악신회주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의 오감은 한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더 광범위하고 더 넓은 세계를 내려다보기 때문에 지구에서도 아직 알지 못하는 다른 차원과 미리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아지다하카가 가까이 왔음에도 그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건 그 탓이었다.
그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너무나도 넓은 세상을 한 번에 본다면 그만큼 주위에 소홀해지고 만다.
그 순간만큼은 가장 무방비해지지만, 이곳은 악신회주의 본거지.
그를 건드릴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지다하카는 이해되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차원을 넘나드는 눈을 지닌 회주가 발견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고?
심지어 그 대상도 문제다.
지금 악신회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바로 현찬이다. 그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을 벌이며 악신회의 계획을 방해했다. 회주가 산하로 들인 에르카닐이 만든 <일루베 아르카>라는 조직마저 현찬의 손에 무너졌다.
현찬만 아니었다면, 악신회주는 이미 자신의 비원을 이뤘을지도 모를 정도로 현찬은 그들을 방해하는 데 지대한 공을 끼쳤다.
악신회는 현찬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항상 예의주시한다.
언제 어디서 또 이쪽의 계획을 방해할지 모르니까.
그런 현찬이 지금 지구에 보이지 않는다니. 심지어 다른 차원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나 악신회주를 향한 충성심이 강한 아지다하카는 그 충격이 더욱 컸다.
“그렇다는 건…… 녀석은 대체 어디로……?”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그 흔적은 아주 미세하지만 남아 있더군. 마지막 발자취가 남은 차원은 <심연>이었다.”
심연은 아지다하카도 잘 알고 있다.
에르카닐에게 시켜서 지구와 통하는 <문>을 열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악신회주다.
대부분의 차원 중에서도 가장 꺼림칙하고 위험한 곳으로 분류되는 곳인 만큼 신인 그도 예의주시하는 곳이었다.
그런 심연에 현찬의 흔적이 남았다?
“녀석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 건지…….”
“아무리 나라도 그건 모른다. 하지만 이쪽도 마냥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녀석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저희가 움직일 수 있는 최적의 기회.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악신회주는 그런 아지다하카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 인간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적기. 녀석이 대체 무슨 수작을 벌여서 내 시야에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 없다는 것이 확인된 지금은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
그러니.
움직여라.
기다리던 명령을 받은 아지다하카는 입가가 귀밑까지 쭈욱 찢어졌다. 그것은 뱀의 그것과 같은 미소였다.
“명을 받듭니다.”
아지다하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혼자 남은 악신회주는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시야를 광범위하게 넓혔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세상 전체로 확장되는 기분. 그것에 흔들리는 자아를 붙잡으며 다양한 세계를 관망했다.
‘네놈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내 시야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돌아왔을 때 너의 세계는 폐허가 되어있을 것이다.’
&
“뭐? 허락되었다고?”
어딘지 모를 차원의 틈새 공간에 갇혀 하루하루 지루하게 보내던 세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참을 수 없는지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자신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검은 새를 향해 물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는 소리겠지?”
“물론입니다.”
검은 새를 통해 아지다하카는 그렇게 대답했다.
재미있네. 세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근신에서 벗어나 자유를 맞이한다. 어디 그뿐인가? 원하는 대로 실컷 날뛰고 살육을 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내렸다.
보안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악신회에서 이렇게까지 나섰다는 것은 이제 회주가 말하던 그 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리였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날뛰셔도 됩니다. 이제 개인행동을 지양하는 때는 전부 지났으니까요.”
“크하하! 지금까지 너에게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듣기 좋은걸?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안 그래도 나도 근신 때문에 잔뜩 쌓여 있었으니 말이야.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내 이름이 운다고.”
세트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가 제일 먼저라는 듯 움직였다. 검은 새는 그런 세트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그림자 속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런 세트의 뒷모습을 보며 다른 신들은 혀를 찼지만, 딱히 세트를 향해 뭐라고 하는 신들은 없었다.
그들도 이 순간만 오기를 목이 꼽아 기다렸으니까.
“드디어 움직일 때가 온 건가.”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왔다는 거겠지.”
“이야. 그놈의 징그러운 벌레만 보다가 미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움직여도 된다니. 너무 좋은걸?”
“너무 날뛰다가 당하지는 말아주시죠.”
<튀폰>, <트랄텍트리>, <브리트라>, <야마타노오로치>.
이 네 명의 신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를 모으려는 자들에게 혼란을,
희망을 지닌 자들에게 절망을.
질서에 혼돈을.
세계에,
멸망을.
열린 차원의 문을 통해 신들이 거침없이 넘어갔다.
&
“다시 제 소개를 할게요. 바리데기라고 해요. 그쪽 이야기는 많이 들었답니다. 다양한 신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유일한 인간, 강현찬 맞죠?”
<바리데기>.
한국 신화 대표적인 여신, 무조신(巫祖神).
모든 무당의 조상으로 떠받들어지는 신이며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을 이어주는 저승의 신이기도 하다.
죽은 원령을 저승으로 천도(薦度)하며, 사령(死靈)을 통제하여 죽음 그 자체를 다루는 여신이기도 했다.
아름답고 고귀한 기품 넘치는 모습과 다르게 다루는 힘 자체는 매우 살벌하다는 소리.
실제로 그녀가 지닌 권능과 힘은 절대로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현찬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강현찬 맞습니다.”
“감은장아기의 말대로네요. 따라오세요. 여러분들을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어딘가 아련한 꽃향기가 났다. 바리데기의 형상은 빠르게 나아갔다. 단순히 걷고 있을 뿐인데도 그녀의 몸은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뒤늦게 정신 차린 현찬과 헤르메스, 로키는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넓은 갈대밭을 지나자 거대한 강이 앞길을 막아섰다. 다행히 자그마한 나룻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고 현찬은 바리데기의 뒤를 따라 배 위에 올라탔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공은 인원이 전부 탑승한 것을 확인하자 천천히 노를 저었다.
“이곳은…….”
“삼도천(三途川)이라고 한답니다. 죽은 영혼이 건너는 강이죠.”
“여기가 거기구나.”
삼도천.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를 가르는 거대한 강이다.
보통 ‘저승의 강’이라 불리지만 신화에 따라 삼도천, 스틱스, 아케론, 황천, 에레버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각각 불리는 이름은 다르지만, 그 근원은 똑같다.
모든 신역의 저승에는 하나의 강이 흐르며 지금 현찬이 배를 타고 건너는 강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삼도천이야 워낙 유명하니 현찬은 어딘가 감회가 새로웠다. 설마 살면서 삼도천을 직접 건너게 될 줄은 몰랐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일행들에게 이야기해 줄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바리데기는 현찬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어째서 그 왈가닥 자청비가 직접 돕기 위해 나섰는지 알 것 같네요.”
“아는 사이셨나요?”
“그럼요. 무려 같은 신화인걸요.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자청비와 저는 신화 속 부분에서 유사한 점이 많으니까요. 물론 그 아이는 절 보고 자기를 따라 했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뭐 어쩌겠나요.”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요.”
“저야 사이좋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조금 걱정이 많답니다.”
자신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는 바리데기는 어딘가 여동생을 돌보는 언니 같은 느낌을 풍겼다. 실제로 선하고 아이들을 돌보기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바리데기에게 왈가닥에 새침한 자청비는 모성애를 한껏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찌 됐든, 여러분들이 원하는 목적지는 북유럽 신역의 저승이죠? 이 강을 타고 쭈욱 가다 보면 곧 도착할 거예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그저 자청비 그 아이가 제게 찾아와서 눈 딱 감고 도와달라고 했으니 도와줬을 뿐이에요. 후훗. 그렇게 흔치 않은 광경을 직접 봤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음. 이 여신 약간…….’
‘성격이 이상한 것 같은데…….’
현찬과 바리데기의 대화를 잠자코 엿듣던 헤르메스와 로키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연상으로서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바리데기는 어딘가 세상 물정 모르고 허허로운 모습에 기본적인 생각부터 여타 신들과 달랐다.
흔히 말하는 ‘괴짜’ 같은 여신이었다.
“어찌 됐든 이대로 가면 금방 북유럽 신역에 도달할 수 있겠네요.”
웃는 얼굴로 말한 바리데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방해만 없다면 말이죠.”
“……!”
현찬도 이쪽을 향한 기척을 느끼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바리데기는 그런 현찬에게 고개를 저으며 앉아서 쉬라고 말렸다.
“걱정하지 마시길. 이곳 저승에 저의 손님으로 오신 이상 주인 된 도리로서 어찌 가만히 있겠나요. 여러분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쉬고만 계시면 될 거예요.”
바리데기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는 부채를, 다른 한 손에는 방울을 쥐었다.
“저승인 이곳에서 제게 덤비는 자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답니다.”
부드럽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섬뜩하게 비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