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231화 지원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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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령 세계는 크게 2개로 나뉜다.
중계와 상계.
중계는 주로 달인급과 왕급 영령들이 있으며 영웅급 중에서도 나름 하위급이 이곳에 머문다.
그 위의 영령들은 거의 다 상계에 머문다고 봐도 무방하다.
상계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상계 또한 여러 개의 세계로 분할되었다.
그중에서 신화 속 존재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신계였다.
신계는 다양한 신들과 신화 속 짐승, 영웅들이 머무는 곳이다.
워낙 다양한 신화의 존재들이 같은 곳에 머물다 보니 이 신계 또한 여러 개의 세계로 분할되어 경계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신화별로 세계가 나뉘며, 그런 세계에서도 악역과 선한 역이 구분된 장소에서 머물고는 한다.
현찬이 처음에 떨어진 곳은 기독교 신화 속 악마들이 머무는 <단테의 지옥>이었다.
그리고 도망쳐서 지금 도달한 곳은 한국 신화의 구역.
<마고>.
한국 신화 창시자인 마고 할미의 이름에서 따온 이 세계는 조선 시대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대부분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몇몇 초가집도 보였다. 커다란 마을을 돌아다니는 존재들은 최소 영웅급 이상 영령들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을 뒤, 거대한 산맥처럼 보이는 무언가의 실루엣이었다.
처음 봤을 때 현찬은 그것이 산인 줄 알았다.
바다에 풍랑을 맞아 몰아치는 파도처럼 굽이치는 그것은 뿌연 구름과 안개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산처럼 보이는, 수 킬로미터를 아득히 뛰어넘는 덩치를 지닌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였다.
한국 신화 영역 <마고>의 주인인 <마고 할미>.
한국 신화의 창세 신이자 거인 신이며 여신이기까지 한 그녀는 그 거대한 육신을 바닥에 눕힌 채 자신이 만든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찬은 그녀의 시선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시선에 닿기만 했음에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녀의 시선에는 딱히 적대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호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하게 중립의 시선이었다.
딱히 건드리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행동을 하는 순간.
그녀가 움직일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마고께서는 무고한 자는 건드리지 않으시니까요.”
“아, 네. 그보다 대체 왜 여기로……?”
감은장아기의 도움을 받아 여러 세계를 뛰어넘은 현찬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아했다. 현찬이 목표로 하는 곳은 ‘빛의 신전’이라 불리는 곳. 한국 신화의 영토가 아니라 북유럽 신화 쪽으로 가야만 했다.
“신계는 여러 개의 신화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아시나요?”
“그렇죠.”
“하나의 신화는 아무리 작아도 오랜 세월 축적된 것이다 보니 자연히 방대해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모든 신화 구역은 또 세부적인 구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것참 복잡하네요.”
영령 세계를 크게 두 개로 나누고 그 두 개로 나눈 세계를 또 나누고. 그렇게 아주 세부적으로 파생된 자그마한 세계만으로 따져도 어지간한 나라보다 크다.
이 세계가 대체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모든 신화는 서로 구역을 나누고, 상호 교류하는 형태를 지속하고 있답니다. 서로의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도, 오가는 데 크게 지장은 없죠. 다만 그래도 역시 경계 막이 쳐진 이상 함부로 넘어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죠.”
현찬이 여기에 올 수 있던 이유는 순전히 헤르메스 덕분이었다.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특성상 어지간한 장벽은 헤르메스의 앞길을 절대 막을 수 없다.
“저희가 가야 하는 곳은 북유럽 신화의 구역.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숱한 방해를 받았죠.”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유희를 원하는 신들의 방해는 여럿 있었다. 신들에게는 장난인 수준이었지만, 한시가 급한 현찬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들이었다.
현찬이 무사히 이곳까지 도달한 건 순전히 감은장아기 덕분이었다.
그녀가 지닌 운명을 다루는 힘 덕분에 현찬을 향한 모든 방해는 전부 없던 일로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다른 신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발생한 일을 그녀의 권능으로 파훼한 것에 가깝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흐름은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일들이라 막아낼 수 있었다.
다만 그것도 이제 한계를 맞이했다.
“이미 수호자들은 저희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눈치챘습니다. 아무리 저라 하더라도 더는 수호자들을 따돌리거나 막아낼 수 없는 노릇이죠.”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는 건가요?”
감은장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흑요석처럼 검고 맑은 눈동자로 현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모든 신계에는 <저승>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물론이죠.”
신화의 세계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후세계, 즉 저승이다.
타르타로스, 연옥, 황천, 유도(幽都) 등등.
각 나라의 종교, 신화에 하나씩은 꼭 들어간다.
“설마. 그런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야?”
헤르메스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감은장아기에게 물었다. 그런 방법? 현찬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헤르메스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나지막이 감탄했다.
“현찬아. 그녀가 하려고 하는 말은 간단해. 우리는 저승을 통해서, 다른 신계로 넘어간다는 거야.”
“저승을 통해서?”
그건 또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저승을 가야 한다니. 신인 헤르메스는 모르지만 인간인 현찬에게는 조금 꺼림칙한 말처럼 들렸다.
“저승에는, 경계가 없어.”
“그건 무슨 소리야?”
“저승, 지하세계는 경계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 신화 속 등장하는 저승의 대부분은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뜻이야.”
“잠깐만. 그렇다는 건, 이 한국 신화 신역과 북유럽 신화 신역이 연결되어 있다는 소리야?”
“그런 셈이지.”
즉 이 말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북유럽 신화의 신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특히나 목표로 하는 북유럽 신역은 이미 현찬의 목적지를 눈치챈 몇몇 수호자들이 경계 지역에서 삼엄하게 대기 중일 것이다.
어지간한 신들보다 훨씬 강한 신들만이 뽑히는 <수호자>들인 이상 헤르메스나 로키의 꼼수도 먹히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그들을 피해서 가야 하는데, 그 방법은 바로 아래를 통해서 이동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호자들이라 하더라도 저승의 일까지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땅굴을 통해서 몰래 본진으로 숨어든다는 거네.”
“뭐, 땅굴이라고 하기에는 저승 또한 엄청 거대하지만…… 맞는 말이야.”
설마 누가 저승을 통해서 다른 신역으로 넘어갈 생각을 하겠는가.
결국, 이 또한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번에 이러한 방법을 알려준 존재는, 평소에 자주 이런 술수를 떠올리는 현찬이나 헤르메스가 아닌, 무려 감은장아기였다.
“따라오시죠.”
감은장아기의 인도에 따라 현찬과 헤르메스, 로키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일행이 도달한 곳은 자그마한 사당이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며 길에는 잡초가 자라나 있어서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됐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곳이 저승의 입구입니다.”
“저승 입구치고는 상당히 초라하네.”
“그러게.”
헤르메스와 로키가 내놓은 첫 감상은 그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신계 대부분의 저승 입구는 상당히 크고 웅장하다. 저승 또한 신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위용에 걸맞게 지어진 탓이었다.
감은장아기는 그 반응이 당연하다며 작게 미소 지었다.
“저희 쪽 신화에서는 저승을 오가는 건 아주 극소수의 존재만이 허락받았기에 왕래가 적답니다. 그래서 굳이 입구를 크게 지을 필요도 없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사당의 문을 열었다. 자그마한 사당 안쪽에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감은장아기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안타깝게도, 제가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길. 이미 다른 조력자가, 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함께 가지 못하는 건가요?”
현찬의 물음에 감은장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래도, 이쪽의 신역에도 방해꾼이 있는 것 같기에…….”
그녀 말대로 어디선가 현찬을 향한 장난기가 섞인 악의가 풍겨 오고 있었다. 현찬이 한국인이다 보니 한국 신화의 신역은 대부분 현찬에게 호의적이지만, 꼭 그렇지 않은 신들은 어디를 가나 존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여신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현찬아 나는!”
“나도 나도!”
“너희 둘도 마찬가지.”
현찬의 칭찬에 감은장아기는 아니라며 손으로 자신의 입을 살포시 가리며 작게 웃어 보였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에 로키는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꼈다.
현찬은 감은장아기에게 고마움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것 말고도, 그녀가 내려준 축복은 지구에서도 현찬을 수시로 지켜주고 도와줬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물론이랍니다.”
감은장아기는 그렇게 말하며 현찬에게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잔잔한 호수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꽃잎처럼 가벼웠다. 순식간에 현찬의 지척까지 접근한 그녀는 현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더니 이내 가볍게 이마에 키스했다.
물론 그 키스는 아주 짧았다. 감은장아기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현찬은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 저, 저기…….”
“제가 내려준 축복이 기한이 다 한 것 같아서 새롭게 내려줬답니다. 혹시 기분이 나쁘셨나요?”
“아,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눈가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요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미소에 순간 정신을 팔린 현찬의 뒷덜미를 어딘가 화난 로키가 강하게 잡아당겼다.
“자! 현찬아!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지!”
“맞아. 지금 한시가 급한 거 몰라?”
“어? 어. 응.”
현찬으 헤르메스와 로키에게 계단 아래로 끌려가면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키는 감은장아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사당의 문이 닫히고 계단 아래쪽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횃불이 저절로 켜지며 계단의 아래쪽으로 쭈욱 이어졌다. 길이 보이니 내려가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헤르메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좋냐? 좋아? 응?”
“뭐, 뭐가?”
“어휴. 표정 봐라. 응? 여자한테 이마에 뽀뽀 좀 받았다고 헤벌쭉해서는. 야. 나중에 누가 입술에다가 키스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떼 주겠다.”
“야, 야. 여신님이 어디 평범하시냐? 게다가 무슨 뽀뽀야. 축복 내려주신 거잖아.”
“후훗. 그렇다면 나도 너에게 축복 내려줄까?”
“아니.”
이때다 싶어서 로키가 나섰지만, 현찬은 정색하며 거절했다. 로키는 너무나도 단호한 현찬의 태도에 조금 충격받았는지 고개를 픽 돌렸다.
“칫. 나도 해 달라고 해도 안 해 줄 생각이었다. 뭐.”
“애처럼 투덜거리기는…….”
“너는 어떻고. 자기 계약자가 여자랑 좀만 연관되어도 입에 거품을 물더니.”
“야. 내가 언제 입에 거품을 물었어?”
“지금 봐. 또 이러잖아.”
“아 좀 그만 티격태격해.”
누가 악우 아니랄까 봐 서로 까는데 안달 난 두 신이었다.
안 그래도 좁은 동굴처럼 쭉 이어지는 계단이라 목소리가 울려서 시끄러움이 배가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계단을 내려갔을까. 그 끝이 보였다.
계단의 끝에는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동굴 계단을 쭉 내려오면 그 끝에도 어둡고 축축한 동굴일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다른 세계처럼 펼쳐진 드넓은 갈대밭이었다. 심지어 어딘가 서늘한 바람마저 불고 있었다.
그 갈대밭의 중심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새하얀 비단옷을 입었으며 검은 머리카락은 뒤로 틀어 올려 3개의 옥비녀로 고정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현찬을 보며 자애로운 미소로 반겨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이곳 저승의 인도자 역할을 맡은 <바리데기>라고 해요. 감은장아기의 부탁을 받고, 여러분들을 모시러 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