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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229화 (229/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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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화 신계 수호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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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과 헤르메스, 로키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어떻게든 기회를 틈타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 의도가 뻔히 읽혔는지 두르가는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더니 10개의 팔 중 하나를 휘둘렀다.

촤라락!

그녀가 손에 쥔 거대한 포승줄이 길게 뻗어 나갔다. 은은한 붉은빛을 띠는 포승줄은 원래 길이보다 수백, 수천 배나 늘어나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포승줄이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결계가 생겨났다.

“저를 앞에 두고 도망치려고 하시다니 간이 참 크시네요. 안타깝게도 제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뭐…….”

두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현찬의 일행이 날아왔던 숲 쪽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들은 막지 않지만요.”

“로키이이이이이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벼락과도 같은 목소리.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지닌 두려움의 근간이 되는 번개의 힘이고 천둥 울림이었다.

목소리는 달랐지만, 목소리에 실린 분노의 기운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산 넘어 산이라더니.”

헤르메스는 반쯤 포기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힘이 이쪽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결계를 뚫고 그 안으로 들어왔다.

“로키이이이! 너어어어! 내가 그렇게 싫어한다고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에에에!”

너무 화나서 자신의 힘을 주체 못 하는 토르 주위로 전류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두르가에게도 그 전류의 불똥이 튀기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토르. 조금 진정하세요. 지금 너무 흥분했습니다. 그 고운 피부에 좋지 않다고요.”

“닥쳐!”

“어여쁜 얼굴인데 입이 험하시군요.”

두르가의 말대로 토르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포기했는지 토르는 자신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면 정말로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만약 현찬이 그가 토르인 것을 모르고 처음 만났다면 바로 여자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담한 체구.

어깨를 막 넘기는 기장의 금발은 한 갈래로 크게 땋았다. 흘러내린 투구는 어딘가에 버려두고 왔는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피부는 새하얗고 팔다리도 길고 가늘다. 무엇보다 중성적이라기보다는 여성 쪽에 가까운 외모는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다웠다.

괜히 거인들이 그의 여장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하긴, 저런 모습이니까 소 한 마리를 통째로 고기를 뜯고 눈빛에 살기를 담아도 여신이라고 믿었던 거겠지.

물론 겉모습과 다르게 그가 지닌 힘은 그야말로 진짜다.

오른손에 쥔 묠니르가 윙윙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토르의 분노를 고스란히 지닌 저 망치를 꺼냈다는 시점에서 그가 진심을 다할 거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두르가 하나만 상대하기도 벅찬데 분노한 토르까지 나타났다.

두 신의 전력만 놓고 보자면 각 신화에서도 최상을 차지한다.

아무리 이쪽에도 신이 둘이나 있다 하더라도, 로키와 헤르메스의 힘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

그런데도 로키와 헤르메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토르. 이왕이면 그 보기 거북한 근육 모습을 벗어 던지고 이대로 다니지그래? 보기 좋은데. 예쁘잖아. 귀엽고.”

“로키! 넌 내가 그렇게 싫다고 말을 했음에도!”

“토르. 조용히 하세요. 상대방의 도발에 엮이면 어쩌잔 말인가요. 침착하게 대처하세요.”

“하, 하지만……. 쟤, 쟤들이 자꾸 나를 귀엽다고 말하니까…….”

어딘가 억울하다는 토르의 모습은 투정 부리는 소녀와 별다를 바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엄청 귀여웠다. 그 모습에 두르가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 어찌 됐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저 무뢰배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 감히 신계에 몰래 침입하려 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죠.”

“빠득. 그래. 물론이지. 우리는 세계에게서 <수호자>의 역할을 부여받았으니까. 거기에 걸맞게 행동해야겠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두 신을 보며 현찬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헤르메스. 무슨 방안이 있어?”

“방안은 무슨. 지금 우리 상황을 봐. 결계에 갇혀서 바깥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싸운다 해도 무조건 져. 여기서 잡히면 끝인 거 알지?”

“그럼 어떡해?”

“어쩌긴 뭘 어째.”

헤르메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깥의 원군을 기다려야 하는 거지.”

“뭐?”

헤르메스의 시선을 따라 두르가와 토르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구름이 가득한 푸른 하늘. 거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 순간 무언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을 뚫고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얗게 빛나고 뾰족한 끝을 지닌 그것은,

거대한 창이었다.

현찬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헤르메스 다음으로 누구보다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기운.

현찬은 반가움에 소리쳤다.

“아테나!”

하늘에서 심판의 창이 떨어졌다.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지만,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막지 않는 두르가 결계의 특성 때문인지, 거대한 창은 손쉽게 결계를 뚫고 토르와 두르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토르.”

“맡겨!”

토르는 오른손에 쥔 묠니르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세상을 그대로 꿰뚫을 것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창을 향해 토르는 타이밍을 맞춰 묠니르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 자그마한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 묠니르에 실려 창날을 후려쳤다.

번쩍!

묠니르에 휘감긴 강렬한 번개가 눈 부신 빛을 토해냈다. 아테나의 창과 토르의 망치가 충돌하며 엄청난 섬광과 폭풍을 뿜었다. 현찬과 헤르메스, 로키는 기운을 몸에 둘러 그 여파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충격이 가라앉고 모습을 보인 존재는 여전히 멀쩡하게 공중에 떠 있는 토르와 두르가였다.

두르가는 고개를 올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테나를 보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투구와 갑옷을 착용했으며 한 손에는 창을, 나머지 한 손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새겨진 아이기스 방패를 들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이름을 불렀다.

“아테나.”

“두르가.”

두 여신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애초에 각 신화에서 최강 여신의 자리를 놓은 둘이기에 서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름의 교류도 있었고, 나름의 친분도 있었다.

그러나 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 적으로 대면했다.

“방해하지 마세요. 아테나. 저는 지금 허락받지 않고 저희 세계에 숨어들어온 침입자를 제거해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두르가. 그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애석하게도 그대가 말하는 그 침입자라는 자는 나의 계약자이기도 하거든.”

“계약자? 그렇다는 건, 그가 인간이라는 소리인가요? 인간이 어떻게…….”

“전부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거지. 너에게도,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두르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이유가 어찌 됐든 저는 이곳을 지키는 <수호자>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네. 그렇죠.”

그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이제 누구 의지가 더 강한지 싸움의 결과가 말해줄 테니까.

콰앙!

두 여신이 격돌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과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현찬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테나와 두르가의 싸움에 정신을 팔 수 없었다.

“너희들은 내가 상대해주마.”

바로 코앞의 토르 때문이었다.

지척까지 접근한 묠니르가 현찬의 얼굴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속도와 힘은, 도저히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현찬은 토르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현찬아!”

헤르메스와 로키가 각자의 기운을 뿜어내며 토르를 묶으려고 했지만, 토르의 몸짓 한 번에 전부 파훼 되고 말았다. 헤르메스와 로키가 뒤로 튕겨 나갔다. 같은 신이라 하더라도 싸움에 있어서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네놈만 먼저 없앤다면……!”

토르의 목적은 명확했다.

헤르메스와 로키에게 관심을 줄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이 세계에 있어서 불청객에 가까운 현찬의 제거.

현찬만 죽인다면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토르의 판단은 옳았다. 수많은 전장을 다니며 싸움해온 그의 감각은 확실히 남다른 예리함이 있었다.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점은 바로 현찬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버틴다는 점이었다.

“이익! 왜 이렇게 안 맞아!”

토르가 휘두르는 묠니르는 조금 전부터 계속 허공을 갈랐다. 그의 속도는 매우 빠르고 공격도 날카로웠다. 묠니르에 실린 번개의 힘마저도 단순히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토르는 현찬을 상대하면서 허상과 대결한다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다 읽히네.’

현찬은 토르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까지 있었다. 묠니르의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고 흘러나오는 번개는 자신의 신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보이며 흘러냈다.

토르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현찬에게는 전부 보였다. 전부 읽히고 전부 느껴졌다.

‘옛날에 봤던 그대로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지금 현찬이 토르를 상대하며 비춰 보이는 과거의 기억은 발드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빛의 신 발드르와 토르는 좋은 동료였으며, 둘이 대련한 경우도 흔치는 않았으니까.

토르는 언제나 저돌적이었다. 가지고 있는 힘은 강했지만, 너무 그 힘만 믿고 달려들었었다.

‘그때와 전혀 달라진 부분이 없는구나. 토르는.’

“좀 맞아! 맞으라고!”

토르의 분노가 더해지자 번개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현찬은 최대한 힘을 일으켜 번개를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점점 강해지는 전류에 뒤로 멀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더 막아내기 힘들어진다.

‘그래도 괜찮아.’

현찬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현찬의 목적은 토르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버는 것.

이미 현찬은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언제까지 쫄랑쫄랑 도망만 다닐 거냐!”

“…… 토르. 너는 항상 대련만 하면 열이 올라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했지. 공격을 흘러내고 피하면 항상 미꾸라지 같다고 했었어.”

“뭐?”

토르는 순간 현찬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 말. 들어본 적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세계수가 불타기 전 아홉 개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곳에서 번개의 신으로 군림하던 시절.

그가 가장 동경하고 또 뛰어넘고 싶었던 친구의 대화가.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아쉽게도 이제 시간이 다 됐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냐고! 대답해! 네가 어떻게 발드르와 나눈 대화를……!”

현찬은 대답 대신 몸을 뒤로 크게 뺐다. 토르는 그런 현찬을 붙잡으려고 했다.

붙잡고 묻고 싶었다.

네가 어떻게 내 친구와 나눴던 대화를 아느냐고.

그것은, 그의 궁전에서 단둘이 대련할 때 나눴던 대화였다. 이미 사라진 발드르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그리웠던 추억을 꺼낸 현찬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토르의 추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흘러들어오는 기묘한 기운이 그의 몸을 얽어맸기 때문이었다.

현찬은 자신을 도와준 새로운 조력자에게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또 만나네요. 자청비.”

“어. 그래. 도우러 왔다.”

결계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건 얼마 전에 현찬과 계약을 통해 힘을 빌렸던 자청비.

도우미는 그녀로 끝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이에요.”

현찬은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감은장아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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