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227화 신계 수호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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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두 팔을 벌려 헤르메스와 로키를 환영해 주었다. 끔찍한 지옥의 풍경만 보다가 그리운 얼굴을 보니 입가에서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헤르메스와 로키는 현찬을 발견하고 빠르게 날아왔다.
셋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현찬은 헤르메스와 로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둘은 지금 매우 공포에 찬 표정이었다.
“헤르메스? 로키?”
“현찬아! 숨어!”
“응? 왜?”
“잔말 말고 어서!”
로키가 현찬의 뒷덜미를 잡고 숲의 깊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헤르메스도 그 뒤를 따라가며 자신의 황금빛 기운을 일으키며 주변에 차단막처럼 둘렀다. 방패처럼 그들의 몸을 뒤덮은 황금의 기운은 순식간에 투명해지더니 주변 풍경과 동화되었다.
로키가 그 위에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어 투명한 막 위를 코팅하듯이 덮었다. 그러자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던 신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안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현찬은 상황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자연스럽게 작아진 목소리로 현찬이 물었다.
“헤르메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수호자들이 움직였어.”
“수호자?”
헤르메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혹시 자신을 쫓아오는 자들이 있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계속 살폈다. 현찬은 수호자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대체 뭐길래 헤르메스가 그렇게 두려워한단 말인가.
옆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로키가 대신 대답했다.
“수호자들은 우리 영령의 세계를 지키고 수호하는 존재들이야. 흔히들 너희 세계로 치면 경찰 혹은 군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녀석들에게 쫓기고 있어서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해.”
“너희들은 신이잖아. 수호자라고 해도 신들인 너희를 함부로 대할 수 있어?”
“그건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수호자들은…….”
“쉿…….”
헤르메스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현찬과 로키도 자연스레 숨을 죽였다.
침묵이 새벽녘의 이슬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주위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온다는 전조조차 없었다.
혹시 착각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현찬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움직이려는 몸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쿠웅!
그것은 너무나도 갑자기 등장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숲 일대를 거칠게 휘저었다. 나무들이 크게 휘청거렸고 정령들이 바람에 휘날리거나 놀라서 도망쳤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뚝 떨어진 그것은 바닥에 남긴 거대한 크레이터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지구름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 봐도 거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흠. 마지막에 느껴진 곳은 바로 여기였는데 말이지.”
굵은 저음 목소리. 매우 사납고 저돌적인 말투.
실루엣만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한 마리 거대한 짐승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닥치며 주변을 뿌옇게 가리던 먼지구름을 싹 거둬갔다. 은신 막 안쪽에 숨어있던 현찬은 그제야 그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현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거대한 덩치와 울긋불긋한 근육. 저런 인물들은 많이 만나 봤지만, 그 기세부터 차원이 달랐다. 밀도 있고 꽉 넘치는 근육 위로 활동하기 편한 적당한 크기의 갑옷이 덮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바이킹들이 쓸법한 투구를 썼으며 그 틈새로는 찬란한 햇빛과도 같은 금발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한 손 망치.
조금 전까지 힘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전히 잔류하는 미약한 푸른 전기를 보며 현찬은 그의 정체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토르!’
북유럽의 신 <토르>.
천둥의 신이며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는 전사.
한때 지구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만든 히어로 영화가 인기를 끌기도 했으니,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무려 주신인 오딘과 거의 동급의 힘을 지녔다고 추앙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도 비중의 태반은 토르가 차지했을 정도. 사실상 북유럽 신화 속 주인공을 꼽자면 발드르보다는 토르에 더 가까울 것이다.
현찬은 그제야 왜 로키와 헤르메스가 조금이지만 공포에 질렸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천둥의 신 토르라면 당연한 이야기다.
당장 떠오르는 일화만 해도 여러 개다.
거인, 우트가르달로키에게 속아서 술인 줄 알고 바다를 마셨는데 바다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거나.
요르문간드를 고양인 줄 알고 그냥 들어 올렸다거나,
화를 못 이겨 묠니르를 몇 번 내리쳤더니 커다란 계곡이 생겼다거나.
애초에 그가 휘두른 묠니르에 맞아 머리가 터져 죽은 거인만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 토르가 바로 이곳의 ‘수호자’인 것이다.
‘헤르메스랑 로키가 왜 숨어 지내는지 알 것 같네.’
토르가 등장한 이후로 로키와 헤르메스는 잔뜩 긴장한 채 몸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둘이 합심한다면 나름 토르라면 잘 속여 넘길 수 있을 텐데 너무 긴장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
현찬은 떠올렸다.
한때 천계에서 손오공과 같이 셋이서 장난을 치면 항상 아테나와 토르가 셋을 벌하러 왔다고.
특히 토르는 봐주는 것 없이 거칠게 묠니르를 휘둘렀다고 했는데, 그때 이야기를 꺼내던 헤르메스의 표정을 현찬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흠. 순식간에 기척이 사라졌단 말이지.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가 지옥에서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왔는데, 허탕인가?”
토르의 중얼거림에 현찬은 등골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의 목적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 영령 세계는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현찬은 우회해서 몰래 들어왔으니 사실상 밀입국자나 다름없었다.
수호자들이 나서서 현찬을 잡으려고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토르라니!
북유럽 신화의 신 중에서 전투력으로 따지자면 가히 최강이 아닌가?
힘으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음. 여기는 없는 것 같군.”
토르는 머리에 쓴 투구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다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 움직임은, 그 자체만으로 벼락처럼 비치었다. 꽈르릉! 뇌성과 함께 토르의 모습이 사라지자, 숲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로키와 헤르메스는 긴장감이 풀리자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은신 막을 해제했다.
“하아!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몇 초만 더 늦었어도 토르한테 들켰을 거야.”
아무래도 토르에게 트라우마라도 있는 건지 로키와 헤르메스는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수호자가 나를 잡으러 왔다니.”
“너는 지금 허락받지 않은 손님이니까 말이야. 수호자들에게 걸리는 순간, 죽거나 아니면 퇴출당하거나 둘 중 하나야.”
“퇴출이 그나마 낫네.”
“다른 세계로 추방당하는 거니까, 그때 내가 했던 경고처럼 넌 그곳에 묶이게 되겠지. 게다가 어떤 곳으로 가게 될지는 순전히 무작위라 진짜 운이 없으면 현찬이 너 <심연>으로 가게 될걸?”
“…… 필사적으로 숨어다녀야겠어.”
헤르메스는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콧대를 세웠다.
“후훗. 걱정하지 마. 그래서 우리 둘이 빠르게 너를 구하러 왔잖아. 설마 지옥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용케도 몸 성히 올라왔네?”
“조력자가 있었거든. 아무튼, 지금은 안전하다는 거지?”
“그럼.”
토르는 강하지만 그만큼 단순하다. 아니, 오히려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북유럽 신화에서는 로키에게 밥 먹듯이 속고 심지어 제 아버지인 오딘에게도 속기까지 했다.
토르가 속고, 그것을 깨닫고 화를 내며 방방 뛰는 것은 북유럽 신화에서의 오래된 단골 시츄에이션이었다.
‘확실히 단순해 보이기는 했지.’
머쓱한지 머리를 긁는 대신 머리를 덮은 투구를 긁는 모습만 봐도 그렇게 보였다. 힘은 강하지만, 그만큼 두뇌 쪽은 썩 뛰어나지 못한 자가 바로 토르니까. 직접적인 충돌만 피하면서 계속 숨어다닌다면, 별다른 위협은 없을 거다.
“헤에. 역시 여기 있었구먼?”
…… 라고 생각했는데.
셋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번개로 화해 사라졌던 토르가 거대한 덩치를 숨길 생각 없이 당당하게 드러내며 서 있었다.
등 뒤로 휘날리는 붉은 망토와 황금빛 머리카락. 무엇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흘러나오는 저 압도적인 위압감.
분명히 토르가 맞았다.
“어, 어떻게…….”
로키는 그야말로 발작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토르는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투구를 툭툭 쳤다.
“로키 그리고 헤르메스. 어쩐지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싶더니 역시 너희가 도와주고 있었군. 아니, 애초에 이 불법 침입자를 여기까지 끌어들인 것도 너희 때문인가. 신계에 반란이라도 일으킬 속셈이야? 다시 라그나뢰크를 일으키려고?”
“그, 그럴 리가!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
“아니면 허락받지 못한 녀석을 왜 데려왔을까.”
토르는 피식 웃었다. 로키와 헤르메스는 자신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으니까.
“내가 머리를 썼다는 것에 좀 많이 놀란 것 같네. 야. 너희 둘. 생각해 봐라. <대통합>이 일어나기 전부터 천계와 신계에서 그 돌원숭이와 함께 온갖 난리를 피워댄 너희의 뒤처리를 누가 했다고 생각해? 나는 누구보다도 너희들의 장난질을 많이 봐왔어. 내가 학습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토르는 다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너희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신은 이제 없다고. 알간?”
토르는 묠니르를 허리춤에 걸며 두 손을 뚜두둑 소리를 내며 풀었다. 그 거구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은 시각적으로 매우 위협적이었다. 헤르메스와 로키는 특히나 그것을 더욱 강하게 느끼는지 뒷걸음질을 쳤다.
“너희에게는 묠니르를 사용할 필요도 없지. 오랜만에 ‘억’소리가 나게끔 두들겨 패주마. 그리고…… 저 침입자 녀석은 내가 친히 손을 봐주도록 하지. 걱정하지 말라고. 고통 없이 한 번에 보내줄 테니까.”
현찬은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든다면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그런 현찬의 희망은 헤르메스와 로키의 표정을 보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토르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둘이 저런 반응이라면, 도망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방금도 보지 않았던가.
번개로 변하며, 그야말로 뇌전처럼 몰아치던 그의 움직임을.
허점을 찔러 도망을 친다 하더라도,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어쩌면 좋지?’
그렇게 고민하는 도중에 현찬은 로키가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마주 보는 토르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로키는 한 손에 자그마한 병 하나를 쥐고 있었다. 거기에 담겨 찰랑대는 액체는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흐흐흐. 각오는 돼 있겠지?”
“각오는 무슨!”
로키는 손에 쥔 빈 병을 그대로 토르에게 집어 던졌다. 토르는 당황하지 않고 그 병을 가볍게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로키? 지금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매우 조촐하군.”
“그건 해봐야 알겠지!”
로키는 그렇게 외치며, 그대로 토르가 쥐고 있는 병을 터뜨렸다. 챙그랑! 병에 담긴 반투명한 액체가 그대로 토르의 몸 전체에 뿌려졌다. 토르는 처음에 별거 아니라는 걸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무언가 느꼈는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이건! 로키! 너 이 자식!”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며 분노하는 토르에게 로키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너무 방심했어, 토르.”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대체 로키가 뿌린 액체는 또 뭐고, 토르는 왜 그걸 맞고 저렇게 괴로워한단 말인가.
현찬이 당황하는 사이에 토르에게 변화가 생겼다.
“저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