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226화 단테의 지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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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모데우스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자 현찬은 긴장감이 풀려 자리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옆에서 루시퍼는 가만히 선 채 현찬의 행동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 시선을 느꼈지만, 현찬은 긴장하지 않았다.
루시퍼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아스모데우스와 합심해서 진작 죽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장 루시퍼가 현찬을 공격하지 않는 것만 해도 루시퍼가 정말로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현찬은 루시퍼와 간이 계약을 맺으면서, 조금은 더 그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루시퍼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 아니, 지금은 계약자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편하게 현찬이라 불러. 뭘 거창하게 계약자라고 할 것까지야.”
“그렇다면 편하게 현찬이라 부르지.”
다른 악마들이 만약 이 대화를 들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쳤을 것이다.
루시퍼. 그가 누구인가. 한때 천상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신을 보필하던 천사이자 결국 그에게 등을 돌려 지옥의 나락 그 아래까지 떨어진 마왕이 아닌가.
그는 교만의 마왕이며 사자와 공작, 박쥐 등을 상징하는 악마들의 정점.
제9 지옥인 배신 지옥의 코퀴토스 얼음 호수에서,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에게 영원의 고통을 선사하는. 그야말로 악마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루시퍼는 언제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처럼 고고하게 홀로 서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악마마저 찢어 죽이는 그의 잔인함은 이미 악마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런 루시퍼가 한낱 인간을 편하게 대한다는 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악마들은 멀리서 루시퍼의 눈치를 살피느라 이쪽으로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가 떠나서 싸움은 없겠구나 싶었지만, 무엇보다 같은 악마들마저 두려워하는 루시퍼가 있었다.
괜히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다른 악마들처럼 끔찍하게 죽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죽어도 부활한다고 하지만, 그 고통과 두려움을 겪고 싶은 악마는 없었다.
알게 모르게 루시퍼 덕분에 현찬은 귀찮은 일들을 방지할 수 있었다.
“너는 항상 파란을 몰고 다니는군.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그 아스모데우스를 마주할 줄이야.”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인가?”
“아스모데우스는 지옥 5층 위로는 잘 올라가지 않는다. 하물며 3층에서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아무래도 나와 비슷하게 너의 기운을 느끼고 따라온 것 같다만.”
“너는 용케 나라는 걸 알고 찾아왔네.”
“나는 이미 한 번 느꼈던 익숙한 기운이었으니까.”
“넌 내가 밉지 않았어?”
현찬은 그것이 궁금했다. 어째서 루시퍼는 자신을 구해준 걸까. 하계에서 싸웠을 때 현찬은 루시퍼를 죽였다. 그 때문에 지금의 루시퍼는 힘 일부마저 손실해서 그것을 복구하고 회복하는 데 전념해야 했다.
그 의문은 별로 시답지 않게 풀렸다.
“난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지.”
“고마워한다고?”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란 말인가. 현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누운 채 올려다보자 루시퍼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덕분에 지금까지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많이 풀려났다는 거다. 결국에는 원 없이 시원하게 싸우고 나니, 지금까지 눈앞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군.”
요컨대, 미카엘과 싸움으로 루시퍼는 나름 깨달은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찬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 그러려니 했다.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나야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충분히 쉬었나? 인간이었던 네가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응. 맞아. 원래라면 조금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거든.”
“다른 곳이라면?”
“빛의 신전.”
현찬은 딱히 숨길 것도 없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한다고 해서 알 것 같지도 않았고.
“빛의 신전이라고? 들어본 적 있다. 지금은 주인 없이 버려진 곳이지만, 이 세계 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답고 웅장한 곳이라고들 하더군.”
“가봤어?”
“가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무엇보다 그곳은 악하거나 정결치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다. 나 같은 악마는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가 없는 곳이지.”
“어쨌든, 나는 그곳에 가려고 해.”
“그것은, 네 안에 깃든 그 힘의 주인 때문인가?”
“알고 있는구나. 그래. 그곳이 어쩌면…… 내가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유일한 열쇠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가야 해.”
“그런가. 그렇다면 갈 길이 멀군. 이곳 지옥과 천상계는 그야말로 반대편에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현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엉덩이에 묻은 검은 흙을 탁탁 털어냈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준 방어 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이곳으로 가지고 올 수 없었다.
‘무기의 경우에는 의지와 힘만 있으면 충분히 만들겠지만.’
아직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현찬으로서는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현찬. 너는 운이 좋다. 지옥의 깊은 곳으로 떨어지면 올라가기 힘들었을 테니까. 이곳은 다행히 3층. 지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멀지 않지. 따라와라.”
현찬은 루시퍼의 뒤를 쫓아 하늘을 날았다. 꽤 멀리 움직이는 듯하더니 어느덧 거대한 검은 탑이 시야에 잡혔다. 루시퍼는 그 앞에 착지했다. 거대한 바벨타워처럼 생긴 그것은 입구가 여러 개였는데, 루시퍼는 그중에서 적당한 문을 잡고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악마 둘이 루시퍼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은 지옥과 지옥 사이를 지키는 경계의 수호 악마들이었지만, 감히 루시퍼에게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루시퍼의 동행자인 현찬도 쉽게 통과됐다.
탑의 1층 중앙에는 검은 마법진이 존재했다. 현찬은 루시퍼와 함께 그 위에 올랐다.
마법진에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주변의 풍경이 휙 바뀌었다.
“제2 지옥인 색욕 지옥이다. 여기서는 이제 다른 탑을 통해 올라가야 하지.”
“하긴, 탑 하나로 모든 지옥에 왕래할 수 있다면 그거대로 웃기긴 하겠네. 엘리베이터도 아니고 말이야.”
제2 지옥인 색욕 지옥도 폭식 지옥과 비슷하게 지옥다운 풍경이었다.
이곳은 사방에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 안쪽에는 지옥의 망자들이 휩쓸리며 몸이 찢기는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폭풍에 몸이 휩쓸리고 믹서기에 갈리듯 갈려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육신은 재생되어 그 고통을 계속 반복한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폭풍의 바람 소리 사이로, 망자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현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피와 함께 섞인 붉은 폭풍을 보면 어딘가 기분이 나빠졌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 어서 위로 올라가자.”
“그곳까지 가는 데는 별로 멀지 않았다. 금방 도착하겠지.”
제2 지옥에도 악마들은 있었다. 그들은 폭풍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치는 망자들을 삼지창으로 찔러 꿰뚫은 후, 그대로 폭풍으로 집어 던지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몇몇 악마들은 현찬을 보았지만, 그 곁에 있는 루시퍼를 보더니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현찬은 문득 호기심이 들어서 루시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색욕 지옥이라면, 색을 탐한 자들이 오는 곳인가?”
“물론이다. 살아있던 시절에 색욕에 빠져 간통을 벌이거나,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자들이 오는 곳이지. 엄청나게 많은 망자가 이곳에 온다.”
“흠. 확실히 그러겠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이곳에도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이 오기는 했지. 그리스 신화의 공주인 헬레나나 왕자 파리스. 영웅 아킬레우스나 트리스탄까지 이곳에서 한때 고통을 겪기도 했다.”
“뭐?!”
“영령의 세계가 열리며 지금은 다시 자신의 신화 계열로 돌아갔지만 말이지.”
설마 영웅들까지 이곳에 왔을 줄은 몰랐다. 문득 생각해보니 단테의 신곡에서도 그런 언급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지옥에서는 그리스의 영웅을 키워낸 현자이자 켄타우로스인 케이론이 화살을 들고 망자들을 벌을 내렸다고도 했으니 말이다.
‘나도 조심해야겠다.’
어차피 현찬은 색을 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도착이다. 이곳이 제1 지옥으로 올라가는 길이지.”
루시퍼를 따라 제1 지옥으로 올라간 현찬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상당히 놀랐다.
3 지옥과 2 지옥은 정말 지옥이라는 이름답게 망자들이 고통받으며 악마들이 돌아다니는 곳이었다. 반면 1 지옥은 전혀 달랐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푸른 풀밭은 지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놀랐나? 이곳이 바로 제1 지옥인 림보(Limbo)라고 하지. 지옥이라고 해도, 이곳은 오히려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닌 평범하게 죽은 자들이 오는 곳이다. 완전한 선행을 쌓지 못했지만 완전한 악행도 쌓지 않은 자들이 오는 곳이지.”
“되게 신기하네. 책으로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원래 이렇게 멋진 곳은 아니었다. 나중에 점점 뜯어고치면서 그리스 쪽의 엘리시움과 북유럽 쪽의 발할라를 모티브로 좋게 바꾼 거지. 지금은 적당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둘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림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성이 보였다. 일곱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는 너무나도 거대하여 고개를 들어 한참을 올려다 봐야 할 정도였다.
“이곳이 위로 올라가는 마지막 통로다. 자 받아라.”
루시퍼는 자신의 기운을 뭉쳐서 만든 자그마한 보패를 현찬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받아서 보여준다면,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다. 내가 바래다줄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협정을 맺은 것이 있어서 나는 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라서 말이야.”
“…… 그래. 도와줘서 고마웠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빚진 것을 갚았을 뿐이니까.”
촤악!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등 뒤로 검게 물든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럼. 잘 가거라. ‘계약자’여.”
루시퍼가 떠나간 자리에는, 그 말만 들판에 아른거리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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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드디어 나왔다!”
현찬은 지옥의 문을 완전히 통과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림보의 위로 아케론강까지 있었고 카론의 배를 타고 와서 겨우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또 어디람.”
지옥을 벗어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이곳이 도저히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울창하고 거대한 숲. 지구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생명력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숲이었지만 현찬에게는 그냥 숲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끄응. 일단 빛의 신전으로 가려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문제는 생각 없이 하늘을 날아서 높게 올라간다고,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찬의 감이기도 했으며 발드르의 아주 미약한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눈을 감고 고민하는 현찬 주위로 숲의 생명력으로 인해 생성된 정령들이 반딧불처럼 빛나며 그 주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 생각이 잠긴 현찬은 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왔구나.”
지옥에서는 미약하게 느껴졌던 패스가,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현찬은 멀리서 익숙한 두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움에 얼굴에 미소가 저절로 맺혔다.
“현찬아!”
“현찬!”
헤르메스와 로키.
서로 떨어졌던 셋이 드디어 합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