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25화 단테의 지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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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큰일인데.’
마왕 아스모데우스만 해도 대적하기 힘든 상대였다. 지옥의 지배자인 7대 마왕 중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녀는 순수한 힘만 따지고 본다면 어지간한 신급 영령과 맞먹는다.
이곳은 하계가 아닌 영령의 세계. 심지어 악마들의 본거지인 지옥이다.
그녀가 지닌 힘은 그야말로 자연재해 그 이상이 분명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스모데우스에 이어서 루시퍼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그는 하계에 내려왔다가 현찬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다. 절대로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헤르메스의 백업이 없는 상태다. 아무리 현찬이라 하더라도 일생일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차원의 틈새를 유영하며 쫓아오던 <심연>보다도 지금 이 자리의 두 마왕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황하는 와중 루시퍼와 아스모데우스는 계속 눈을 마주 보며 기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루시퍼. 이야기는 들었어. 하계에 내려갔다면서? 어떻게 내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호되게 당해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설마 이 인간이 그것과 연관된 건가?”
“그건 네년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아스모데우스.”
“어머. 너무 무섭게 목소리를 깔지 마. 너무 그렇게 대하면…… 나도 좀 까칠하게 나올 수밖에 없잖아.”
아스모데우스의 아름다운 외모가 순간 흉악하게 변했다. 그것은 아주 순간이었고 그녀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미모로 돌아왔지만, 현찬은 보았다. 지옥의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살기가 담긴 표정을.
‘미치겠네.’
무리해서 발드르의 힘을 끌어내도 승률은 이쪽이 4할이고 아스모데우스가 6할이다.
거기에 루시퍼까지 가세한다면 현찬의 승률은 그야말로 1% 아래까지 수직 낙하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자면, 둘이서 합심해서 현찬을 공격할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같은 7대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사이가 나빠 보였다.
주위에 구경하러 온 악마들은 루시퍼와 아스모데우스가 대치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쳤다.
그것이 활로를 열어주리라. 현찬이 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강구하는데, 루시퍼의 입에서는 현찬의 예상을 깨부수는 대답이 나왔다.
“그는 내 손님이다. 네년이 멋대로 손을 대게 놔두지 않겠다.”
“허?”
“헤에? 손님?”
그 말은 현찬은 물론이거니와 아스모데우스에게마저 흥미를 품게 했다. 항상 머릿속에 미카엘밖에 없던 마왕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인간을 손님으로 맞이한단 말인가.
놀란 건 주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소, 손님이라고? 저 인간이?!”
“그 루시퍼가, 인간을 손님이라고 불렀다고? 이건 말도 안 돼!”
평소에 루시퍼를 알고 있는 악마들이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누구던가. 같은 악마라 하더라도 절대 관심을 가지는 일 없이 언제나 혼자 다니는 고독한 마왕이지 않던가.
오직 대천사 미카엘을 향해 증오심만 불태우며 자신의 영지에 처박혀 지내는 것이 루시퍼다.
그가 지옥 3층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인간을 두고 자신의 손님이라 변호하는 것은, 고양이가 쥐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 이상의 충격을 선사했다.
아스모데우스는 그것이 정말이냐는 듯한 시선으로 현찬을 바라보았다. 현찬은 지금 이 상황이 살아남을 유일한 가능성임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헤에. 설마 그 루시퍼에게, 그것도 인간이 손님으로 찾아왔다고?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믿건 말건 그것은 네 자유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꼬투리를 잡는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 내 체면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
아스모데우스는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화사하게 웃자 숨이 막힐 정도의 색기가 풍겨 나왔다.
‘이것이…… 색욕의 마왕.’
현찬은 신력을 일으켜 정신을 다잡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그녀에게 매료되고 말 테니까. 아스모데우스의 힘은 그만큼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했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가시가 돋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찌른다.
아스모데우스는 그보다 더 독했다. 자신이 가시가 있는걸 알면서도, 상대를 강제로 끌어들인다. 더 끔찍한 건, 상대는 가시에 찔려 고통스럽고 괴로워하면서도 아스모데우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더욱 가까이 가려고 한다.
그 끝에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뭐지. 아스모데우스. 그 저열한 유혹은 나와 손님에게 먹히지 않는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보다 루시퍼. 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네가 하계에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돌아왔잖아.”
“뭘 말하려는 거지?”
루시퍼가 눈살을 찌푸리자 아스모데우스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너. 하계에서 한창 깨져서 돌아왔다면서? 심지어…… 본신 일부까지 강림한 상태에서 그렇게 깨졌으니 지금은 제대로 힘을 못 내고 있지 않아?”
“…….”
아스모데우스의 지적은 정확했다. 지금의 루시퍼는 전성기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하계에 내려가 자신의 힘을 다루는 상황에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지옥에 있는 루시퍼의 본체도 큰 타격을 받아서 힘과 권능이 상당히 줄어든 상황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상대의 약점을 잡아냈으니,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상태로, 과연 나와 맞서 싸울 수 있겠어? 이거, 오늘 아무래도 7대 마왕이 아니라 6대 마왕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장난꾸러기 소녀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살벌한 뜻은 고스란히 루시퍼와 현찬에게 전해졌다. 루시퍼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체념한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다. 아스모데우스. 지금 내 힘은 완전하지 않지.”
“캬하핫! 뭐야 루시퍼! 자기가 약해졌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다니! 어디 정신이라도 나간 거야? 하계에서의 패배가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나? 설마 그 루시퍼가 이런 나약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다니 말이야!”
아스모데우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도 기쁜지 광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지옥 3층을 쩌렁쩌렁 울렸다. 악마들은 멀리서 눈치만 보며 더욱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현찬은 루시퍼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약점은 숨기지 못할망정 왜 그것을 대놓고 드러냈냐’는 책망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나 현찬은 루시퍼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지만.’
지금은 루시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모데우스. 너의 말대로다. 지금 내 상태라면, 너와 싸우면 내 쪽이 필패겠지.”
“아하하하! 루시퍼! 갑자기 그게 무슨 농담이야? 날 웃기게 할 생각이라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어.”
‘그러니,’ 라며 아스모데우스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인간을 놔두고 어서 꺼져. 오늘의 나는, 기분이 너무 좋으니까…… 나약해진 너를 굳이 건드리진 않을게.”
“아니. 그럴 순 없다. 나는 내 손님에게, 빚을 졌거든.”
“하. 루시퍼. 설마 네가 이렇게나 고집불통일 줄은 몰랐는걸? 뭐 좋아. 나는 기회를 줬어. 그걸 걷어찬 건 온전히 너의 잘못이야.”
“아니. 기회를 준 건 나다.”
“뭐?”
아스모데우스는 루시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몸을 옥죄는 강렬한 힘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힘은. 갑자기 이건 또 어디서…….’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을 억압하는 힘의 주인을 찾았다. 그 주인공은 상당히 가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루시퍼의 곁에 가만히 서 있는 현찬이었다.
“인간……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딱히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도와줬을 뿐이니까.”
“뭐?”
루시퍼의 말에 아스모데우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현찬은 자신의 몸에 흘러들어오는 강렬한 마기를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계약]
<루시퍼>.
헤르메스가 없다 하더라도, 이미 현찬은 계약의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처음 헤르메스와 계약을 했을 때도 현찬은 헤르메스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달인급과 왕급 영령들을 불렀으니까.
현찬은 지금, 곁에 있는 루시퍼와 직속 계약을 맺은 것이다.
‘반쯤은 도박이었는데 성공했네. 설마, 영령의 세계에서도 다른 존재와 계약을 맺는 것이 가능했을 줄이야.’
무엇보다 루시퍼는 마기를 다루고 현찬은 발드르의 신력을 다루는데, 두 힘은 놀라울 정도로 충돌이 없었다. 물론 두 힘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편의주의적인 일도 없었지만, 핸디캡이 없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혜택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믿을 수 없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인간. 정체가 뭐지? 인간이면서 신력을 다루는데, 이제 루시퍼 너의 힘까지 쓴다고?”
“아스모데우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2대1에서 네가 이길 자신이 있나?”
루시퍼는 지금 자신의 전력을 내지 못하지만, 현찬과 계약을 맺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 또한 어느 정도 권능을 사용하면서 현찬은 루시퍼에게 빌린 권능을 사용한다. 그것은 1을 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루시퍼의 지금의 힘이 10이라고 한다면, 현찬 또한 그 10의 힘을 빌려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아스모데우스의 현재 전투력은 수치상으로는 15. 현찬과 루시퍼보다는 크지만, 그 둘이 하나로 합친 것보다는 약하다.
“잠깐.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하계에 여럿이나 되는 신들과 계약을 자유자재로 맺는 인간이 있다고. 설마 네놈이…….”
“뭐야. 나 지옥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어?”
현찬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상황은 역전됐다. 대체 왜 루시퍼가 자신을 도와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찬은 활로가 열렸다는 희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다 잡은 물고기를 코앞에서 놓쳤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지금…… 날 화나게 만들겠다 이거야?”
아스모데우스를 중심으로 검은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현찬과 루시퍼는 그 힘에 저항하면서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을 비춰주면 알아서 물러날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이대로 싸운다면, 이쪽도 피해가 없지는 않다.
현찬은 문득 아스모데우스에 관한 것이 떠올라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잠깐! 저 십계명 다 할 줄 압니다!”
“뭐?”
그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기운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꺼졌다.
현찬이 내뱉은 말은 어떻게 보면 얼렁뚱땅한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아스모데우스의 기원을 잘 알기에 꺼낸 소리였다.
아스모데우스는 기독교에서 7대 마왕 중 하나인 색욕을 관장하는 악마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전의 이야기에서도 아스모데우스는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탈무드>.
유대인들의 경전으로서 이스라엘 전통의 학자이자 종교적 지도자인 랍비로 말미암아 기록되는 율법, 민간전승, 전통 등을 총망라한 책.
그곳에서도 악마들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며, 아스모데우스의 설화 또한 존재한다.
이곳에서의 아스모데우스는, 악마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령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원판인 유대교의 기원에서 말미암은 일인데, 원래 유대교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단일신 <야훼>만이 전지전능하게 비친다.
야훼에 대적하는 존재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설마 대악마라 하더라도 전부 야훼에 의해서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악하다거나 신의 적으로 비치지 않는다.
후세에 가면서 기존의 사악하고 나쁜 악마의 전형이 잡혀서 그렇지 탈무드에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
무엇보다 아스모데우스는 십계명을 아는 인간은 똑똑하다며 좋아했다.
심지어 악마 중에서 유일하게 천국의 도서관에 출입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자주 공부를 하러 가기도 한다.
지금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아스모데우스의 또 다른 기원이다.
현찬은 그 점을 자극했다.
“…… 그래. 지금은 물러나야겠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아스모데우스였다. 자존심을 세운다고 싸웠다가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건 오히려 그녀였다. 이 상황에서는 그냥 솔직하게 패배를 승낙하고 물러서는 것이 이성적으로 보면 옳았다.
다행히 아스모데우스는 매우 이성적이었다.
무엇보다 현찬이 꺼낸 말이, 기분을 상당히 좋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 인간. 현찬이라고 했지?”
아스모데우스는 떠나기 전, 고개를 돌려 현찬에게 물었다.
현찬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마음에 들었어.”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는 등 뒤에 달린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순식간에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어, 음.”
아스모데우스가 마지막에 보여준 그 표정은 조금 전 포악하게 매력적이었던 모습과는 뭔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확히는, 이번 게 조금 더 그녀의 진심이 담긴 것 같은…….
“좋아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현찬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