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223화 영령의 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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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길! 저 녀석들 갑자기 왜 이렇게 오는 거야!”
“일단 피해!”
시종일관 여유 넘치며 장난스럽게 웃던 로키도 지금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보인 적이 없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신력을 이용해 현찬의 몸을 이끌었다. 헤르메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신의 도움으로 앞으로 쭉쭉 나아가면서, 현찬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행성이 명확하게 현찬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뭐, 뭐야. 여기 원래 이래?”
대부분의 다양한 차원들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직접 쫓아올 줄은 몰랐다. 현찬이 당황한 만큼, 헤르메스와 로키도 당황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원래 이럴 리가 있겠어? 이건 딱 봐도 특별한 상황이잖아!”
“심연 녀석들이랑 엮이면 좋은 꼴 못 봐! 대체 무슨 이유로 녀석들이 우릴 쫓아오는 거지?!”
끄워어어어어어!
심연의 거대한 행성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정확히 소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공허한 공간을 뛰어넘어 영체를 강하게 뒤흔들지는 못할 테니까.
촤악! 심연의 검은 표면에서 무언가가 길게 뻗어져 나왔다.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는 그것은, 매우 거대한 검은 촉수였다. 그것이 무려 수백 개나 튀어나와 공간을 가득 메우며 현찬의 뒤를 쫓았다.
그것을 본 헤르메스와 로키는 기겁했다.
칫. 헤르메스는 혀를 차며 힘을 더 끌어 올렸다. 헤르메스의 황금빛 기운은 정면에 원형의 고리를 형성했다. 황금 고리를 지나치자 움직이는 속도에 엄청난 가속이 붙었다. 순간 증가한 압력이 영체를 강하게 압박했다.
뒤따라오는 촉수는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었지만 좁혀졌던 거리는 빠르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헤르메스는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혹시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찬아. 저거 설마, 그때 그거 아니야?”
“아마, 그런 것 같은데?”
둘의 대화에 로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그거라니? 너희만 아는 이야기하지 말고 나한테도 말해줘. 대체 무슨 일인데?”
“어, 음. 너도 알지 모르겠는데 우리 아빠의 기운이 한때 한반도를 휩쓸었던 일 기억나?”
“당연히 나지. 그때 있었던 일 때문에 신 대부분이 현찬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누가 모르겠어? 나도 그 덕분에 찾을 수 있었고.”
헤르메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때 아빠가 힘을 쓴 이유가, 바로 저 <심연>과 연결된 문을 닫기 위해서였거든. 아스트라페까지 써서 문에서 튀어나오려던 촉수를 모조리 증발시켰지.”
“뭐?”
헤르메스의 말에 로키의 표정이 아연했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지금 저 녀석은 복수를 위해 쫓아오는 거잖아!”
“그런 셈이겠지. 아마 저 촉수도 그때 문 틈새로 넘어오려던 그 녀석의 것 같은데. 그때 봤을 때보다 수도 많아지고 크기도 더 커졌어.”
“…… 내가 심연에 관해서 좀 아는 게 있는데, 아마 저 녀석은 ‘흘러가는 망각’일 거야. 심연에 있는 최상급 포식자 중 하나겠지.”
“어……. 설마 그때 그 녀석이 저 녀석이라고?”
갑자기 자기들끼리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신을 보며 현찬이 물었다.
“그래서.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심연을 주관하는 탑5 안에 드는 녀석인데, 무엇보다 저 심연 자체의 직속 권속이라고 보면 돼.”
“직속 권속이라고?”
“어, 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알려주기엔 좀 그렇긴 한데…… 저 심연이라는 게 하나의 행성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대한 생명체거든?”
“…… 저 행성이?”
“본인에게 의지가 있고 제멋대로 움직이면 그게 생명체지 뭐겠어. 아무튼, 우리는 저걸 ‘모성’이라 부르는데 저 녀석이 자기 표면 위에 새끼를 친단 말이야. 그중에서 우리가 그때 아빠의 힘으로 물리친 ‘흘러가는 망각’이 그 새끼 중 하나야.”
“그래서, 어미도 제 자식 때린 사람 혼내려 우리 쫓아오는 거고?”
“그런 셈이지.”
그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현찬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읽어낸 헤르메스는, 움직이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차원, 수많은 별이 선이 그어지듯 빠르게 풍경 너머로 사라졌다.
그 광활한 우주를 빠르게 가로지르면서도 심연은 집요하게 현찬의 뒤를 쫓았다. 겨우 벌려놨던 거리는, 다시 좁혀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검은 촉수의 불길한 기운에 현찬은 마음이 급해졌다.
“헤르메스! 멀었어? 저러다가 곧 따라잡히겠어!”
“얼마 남지 않았어! 곧 도착하니까 좀만 참아!”
“금방 도착하는 거 아니었어?”
“초행자 데리고 가는 게 쉬울 줄 알았어? 특히나 안 들키게 가려면 더 우회해서 가야 한다고!”
그러는 사이 거리는 점점 빠르게 좁혀져, 어느덧 촉수 중 일부가 현찬의 발끝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거대한 행성의 인력이 현찬의 몸을 당겼고 현찬은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헤르메스!”
“거의 다 도착했어! 여기만 지나면 녀석들도 쫓아오지 못해!”
모든 차원이 서로 멋대로 붙을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대통합> 이전에도 차원끼리의 결합이 마구잡이로 일어났을 테니까. 각자 세계에는 일정 이상 접근을 차단하는 경계가 있었고 그것이 차원 간 간섭을 막았다.
그 경계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 됐……!”
경계에 도달하기 직전에 문제가 일어났다.
심연의 어둠으로 뒤덮인 행성의 표면, 그곳에서 촉수의 근원지인 ‘흘러가는 망각’이 모성의 보호조차 벗어던지고 그 본체를 경계로 던진 것이었다.
꿈틀거리는 수천수만 개의 촉수가 하나로 실 뭉텅이처럼 뭉친 기괴한 괴물. 그 거대한 괴물이 자신의 모성에서 튀어나와 현찬을 향해 거대한 촉수 더미를 휘둘렀다.
헤르메스와 현찬이 간과한 게 있다면, 그 날 이후로 ‘흘러가는 망각’이 현찬에게 가지고 있던 증오심이 그야말로 엄청났다는 점이리라.
그것이 설사,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일일지라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선사한 적을, 이대로 코앞에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현찬은 최대한 몸을 뒤틀며 촉수를 피하려고 했지만, 워낙 예상 밖의 기습적인 일격이라 제대로 된 회피를 취하지 못했다. 정해진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소멸하고 만다.
‘흘러가는 망각’은 그것을 고려하고서 현찬에게 몸을 던진 것이었다.
거대한 촉수가 현찬의 발을 건드렸다. 헤르메스와 로키의 신력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영체에 큰 타격은 없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던 도중에 당한 일격이라 현찬의 몸이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현찬아!”
헤르메스의 급박한 외침이 멀어졌고, 현찬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디론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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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얌전히 잠겨있던 악신회주가 눈을 떴다.
“드디어.”
지구를 넘어, 차원 곳곳에 뿌려놓은 그의 기감에 무언가 하나 크게 걸린 것을 감지했다. 악신회주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때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이제 곧, 움직일 때다.”
악신회주의 중얼거림은, 허공의 어둠에 잠겼다. 그 어둠의 일부가 자그마한 구체가 되어 악신회주의 앞에 떠올랐다. 그것은 이내 4개의 조각으로 나뉘더니 각자 새의 형상을 취해 날개를 퍼덕였다.
“모든 자에게 전한다.”
그것은, 싸움을 앞두고 잔뜩 몸이 달아오른 모든 악한 신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전쟁의 불씨가, 빠르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
“꺄악!”
<칠성신>의 계약자인 한성주는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비명에 주변에서 그녀의 상태를 살피던 사람들이 모두 화들짝 놀랐다. 한성주의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김은혁이 다가왔다.
“성주야. 무슨 일이야. 괜찮니?”
“아. 오빠…….”
“갑자기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굴어서 다들 놀랐어.”
다른 오버랭크 헌터 생도들이 조를 이룬 채 게이트에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는 것과 다르게 한성주는 여전히 훈련소에 남아서 개인 배정된 방을 쓰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그녀가 지닌 예언과 점성술.
현찬의 말을 빌리자면 <칠성신>의 점성술을 거의 다 깨우친 한성주는 <헤르메스의 눈>을 사용하는 현찬보다 더 뛰어난 예지가 가능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한성주의 적극적인 바람으로 김은혁이 실시간으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김은혁은 갑자기 그녀가 잠에 빠져들어서 침대에 눕혔다 싶더니,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었다.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지만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무언가 봤구나?”
“…….”
한성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담한 몸은 겨울의 찬바람을 맞는 것처럼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김은혁은 이불을 가져와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한성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 안아주세요.”
“어? 뭐?”
김은혁이 채 되묻기도 전에 한성주는 김은혁의 품 안에 들어와 그를 꼬옥 안았다. 김은혁은 당황했지만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포기의 한숨을 내쉬며 한성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따스한 온기 덕분일까, 한성주의 떨림이 잦아들었고 겨우 그녀가 입을 열 수 있었다.
“거대한 어둠이, 세상을 뒤덮는 꿈을 꿨어요. 꿈. 아니, 정확히는 미래의 운명이겠죠. 저희가 지키려던 세상은, 순식간에 검고 질척거리는 무언가로 뒤덮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요.”
김은혁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칠성신>의 점성술을 통해 알아낸 지구의 운명이 그것이라면, 정말로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절대로 인류로서는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벌어진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미래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냥 당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언제…… 일어나는데?”
“얼마 남지 않았어요. 길어도 일주일.”
“일주일이라니…… 촉박한걸.”
“악신회가 움직일 거예요. 그곳에 속한 신들이, 세계 곳곳의 도시를 파괴할 거고요.”
“걱정하지 마. 그건…… 우리가 반드시 막을 테니까. 너는 여기서, 녀석들이 또 어떻게 움직이려고 하는지 알아내 주기만 하면 돼.”
“네. 오빠.”
한성주는 그 말을 남기고,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쓰러지려고 했다. 김은혁은 놀라서 황급히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김은혁은 한성주를 침대에 눕히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 해 주었다.
“거 참. 달라붙지만 않으면 참 귀여운데 말이지. 뭐, 여자로서 매력은 없지만.”
[이 보게나 친구. 아무리 그래도 그런 뻔한 거짓말은, 우리 체면에 맞지 않지.]
“시끄러워.”
분위기에 초를 치는 김선달의 말에 김은혁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
“으윽. 여기는 어디야?”
현찬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영령의 세계에 도착하기 직전에 튕겨 나간 자신과 그런 자신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던 헤르메스와 로키의 모습이었다. 현찬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여긴……?”
현찬은 주위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