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222화 영령의 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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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해. 인간의 육신으로는, 절대로 상위계로 갈 수 없어. 중위계도 마찬가지야. 네가 지금 발드르의 힘을 깨우치고, 그것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됐다 하더라도 결국 육신을 지닌 이상 절대로 불가능해.]
사람들의 기척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현찬이 찾아오자 가장 조용하고 깊은 곳을 안내해준 환몽촌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헤르메스는 현찬에게 단호하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니, 여기서 너는 깊은 잠에 빠질 거야. 사실상,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거니까 가사상태라고 볼 수 있겠지.]
헤르메스의 말에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몇 번이고 들은 주의사항이었다.
현찬은 식물로 이루어진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얼핏 보면 친자연적인 평범한 풀 더미 같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신의 힘이 깃든, 가장 훌륭한 보금자리였다.
현찬은 자연스럽게 그 위에 누웠고, 그런 현찬의 주위에 두 명이 곁에 앉아 있었다.
로키의 간이 계약자인 주현창이 그러했고, 현찬의 안위를 걱정하는 황설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공을 물속처럼 유영하는 로키가 현찬의 머리 위를 부유하며, 손가락 끝으로 현찬의 코를 살짝 눌렀다. 그녀는 ‘후훗,’ 하고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헤르메스의 말을 받았다.
[헤르메스의 말대로야. 영혼의 상태라면, 세계의 경계를 넘어가는 데 아주 수월해지지. 그 상태라면 세계의 감지망에 벗어나서 영령의 세계로 갈 수 있어.]
‘다만,’ 하고 헤르메스가 이어서 그 말을 받았다.
[영혼 상태가 된 만큼, 오히려 다른 세계로 영혼이 빨려들어 갈 수 있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건 쉽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지.]
[기존에 있던 존재가 내려왔다면, 다시 올라가는 데 문제는 없어. 이미 영령의 세계와 일종의 라인이 이어져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지금까지 가본 적이 없는 그곳으로, 감만 믿고 달려야 한다는 거야.]
이야기만 들으면 여러모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리만치 위험한 짓이기도 했다.
현찬이 하는 행동은, 바다에서 위치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산꼭대기의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애초에 가능성을 점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야. 지금까지 이랬던 적은, 역사의 시작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적절한 예시조차 없는 이 사상 최초의 일에, 어떻게 확률을 매길 수 있겠어.]
[후훗. 물론, 매긴다면 한없이 제로에 가깝겠지만 말이야.]
“성공률 0%의 모험이라. 시작부터 용기 주는 말들 해 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
현찬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헤르메스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키만이 그저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로키의 미소를 보지 못했던 주현창은 이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다.
‘성공률 제로라고? 그렇다는 건 사실상 죽으러 가는 짓이나 다름없군.’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영혼이 떠난 육신은 시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도 주현창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현찬이 죽기를 바라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현찬이 죽으면 이 세계 자체가 곤란해진다. 그가 없으면, 악신회의 신들은 누가 막고 다른 세계의 적들은 누가 막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현찬이 성공하는 것도 바라지는 않았다. 그가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 주현창에게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는 여신님의 시선이 조금 전부터 저 남자에게서 도저히 떨어지지를 않았으니까.
‘그가 죽더라도…… 여신님의 힘을 지닌 나라면 적들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오버랭크 헌터들까지 새롭게 가세하면 이쪽의 전력은 아직 쉽게 확정할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에 성공한다면?’
만약에, 아주 극악의 확률을 뚫고 현찬이 성공한다면 그는 이제 지구상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대자의 무위를 지니게 될 것이다.
주현창이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성공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건 사실이지. 다만 그건 그 무엇의 지원도 없이 현찬이 너 혼자 영령의 세계로 가겠다고 하는 경우야. 길을 모르는데, 목적지를 찾아가는 게 말도 안 되잖아?]
“그렇다는 건?”
[그래. 나와 로키, 우리가 너를 앞에서 인도해준다면 별다른 위험부담 없이 영령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거야.]
[물론, 그것도 마냥 안전하지는 않아. 우리가 인도는 해 주지만, 그렇다고 주위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러니, 휩쓸리지 않게 잘 따라와야 해. 걱정된다면, 여기서 그만둬도 좋아.]
로키의 도발적인 말에 현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각오도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은 게 아니야.”
[…… 그래. 대답은 그거로 됐어.]
[시작한다.]
헤르메스는 새하얀 금빛의 신력을 일으켰다. 빛 입자는 헤르메스의 오른손에 뭉치더니 이내 지팡이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카두케오스(caduceus)]
헤르메스를 상징하는 지팡이.
헤르메스는 그것을 손에 쥐고서 현찬의 얼굴 앞에 가볍게 흔들었다. 현찬은 그것을 보자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현찬은 굳이 수마에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을 인도하는 힘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현찬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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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군. 아니. 죽은 건가.’
마치 잠에 빠져든 것 같은 현찬의 모습을 보며 주현창은 고민에 잠겼다. 현찬은 지금 아주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은 예민해진 감각으로 겨우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미약했다.
사실상 현찬의 육신은 지금 영혼이 빠져나간 식물인간에 가까웠다.
그가 잔뜩 부리던 막대한 힘도, 지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지금의 주현창이라면 현찬의 저 육신을 아주 손쉽게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었다.
‘육신이 죽는다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없겠지.’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하지만.’
주현창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강원도의 깊은 산골짜기 주위에는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의 절벽이 가득한 이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할 만했다. 놀랍게도 짐승은 전혀 이곳에 다가오질 않으니 현찬을 위협할 것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다른 존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도깨비라고 했던가. 주현창은 설마 지구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들의 힘을 빌리는 헌터가 존재하는데, 요괴라고 없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숨어 지냈기에 몰랐다.
‘강해. 도깨비랑 요괴들, 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이 주위에 이렇게나 가득하다니.’
현찬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환몽촌도 현찬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그들의 비호를 받는 현찬을 당장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저 여자.’
주현창의 시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현찬을 내려다보는 황설영에게 향했다.
‘협회의 2번째 S랭크 헌터. 그녀가 곁을 지키고 있는 이상 지금은 때가 아니다.’
주현창은 직감하고 있었다. 황설영 또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현찬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된 것처럼 보이지만, 주현창이 움직이는 순간 그녀도 칼같이 반응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주현창은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시간은 아직 많아. 기회는…… 반드시 온다.’
주현창은 현찬이 죽고, 로키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자신이 영웅이 되는 상상을 했다.
그가 충분한 업적만 이룬다면, 인간으로서 영웅에 버금가는 일을 달성한다면 여신님의 시선도 이쪽을 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기다린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여기는?”
감았던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새까만 어둠이었다. 한없이 몸이 가벼워지는 부유감과 동시에 현찬은 자신이 지금 있는 이곳이 어둠이 아닌 광활하고 거대한 우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에 점점 하나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다양한 세상을 보면서 현찬은 이 우주에 얼마나 많은 차원이 있는지 새삼 놀라워했다.
‘여기서 영령의 세계를 찾으라 이건가.’
마냥 지구와 비슷한 곳을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이, 전혀 다른 차원일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오직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어, 어어?”
현찬은 그 순간 거대한 행성이 자신의 주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다만, 그 행성이 지나가면서 현찬의 영혼을 강하게 끌어들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리라.
“억! 미친?!”
알 수 없는 차원이 현찬을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겼다. 현찬은 어떻게든 발버둥 치려고 했지만, 영혼 상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움직이는 법도 몰랐기에 속절없이 해당 차원으로 끌려 들어갈 뿐이었다.
‘위, 위험하다!’
현찬이 최대한 손을 휘적거리는 순간.
턱.
누군가 현찬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한눈을 팔았는데 벌써 위험해지기야?”
“헤르메스!”
헤르메스는 현찬을 잡은 손을 당기며, 현찬을 끌어당기는 차원의 인력으로부터 현찬을 보호해주었다. 차원이 빠르게 멀어져갔고 현찬은 그제야 자신의 영혼을 이끄는 힘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후.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아무렴.”
“어? 헤르메스. 네 모습이…….”
현찬은 헤르메스의 외양이 조금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지구에 있을 때와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외모가 상당히 버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이게 내 본신의 모습이니까. 하계에 구성된 육신이 아닌, 나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내 진짜 모습.”
“어, 응. 그러네.”
그 때문인지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던 헤르메스는, 더욱 아름다운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원래도 예뻤지만, 더 예뻐진 느낌? 현찬이 멍하니 헤르메스를 보는 순간 곁에서 퉁명스러운 제삼자의 목소리가 현찬의 상념을 깨부쉈다.
“저, 저 시선 팔린 꼴 좀 보라지. 조심해라. 녀석은 남자니까.”
“너도 남자였거든?”
“내게 성별은 무의미하다.”
“어련하시겠어.”
그러고 보니 로키도 있었다. 확실히 그녀도 헤르메스처럼 외모가 상당히 예뻐졌다. 분명히 본래와 별로 다르게 생긴 게 아님에도 그렇게 느껴졌다. 등 뒤에 후광이 비친다거나 그런 부차적인 효과가 특히 그러했다.
로키는 고양이 같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현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조심해. 차원은 가만히 고정되지 않아. 끝없이 가변적으로 움직이며 어떨 때는 서로 충돌하기도 하지. 물론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어찌 됐든 운 없이 스쳐 지나가는 차원의 힘에 끌려 들어가면 그때는 정말로 끝이니까 조심해.”
“알았어. 충고 고마워.”
“자. 그러면 슬슬 가 볼까? 뒤떨어지지 않게 잘 따라와.”
“그래.”
헤르메스와 로키는 각자의 신력을 이용해 현찬의 몸 주위를 둘렀다. 그가 쉽게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게 취한 조치였다.
현찬은 앞서나가는 헤르메스와 로키의 뒤를 쫓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연관됐다는 걸 깨닫고는 빠르게 적응했다.
“역시. 발드르의 힘 덕분인가, 적응하는 게 빨라.”
“어쩌면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의 상태로 영령이 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어.”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보이던 하나의 거대한 행성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뭐지?”
이건 헤르메스와 로키도 의외였는지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모든 것이 검은 어둠으로 뒤덮인 시꺼먼 행성. 현찬은, 문득 아주 먼 기억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설마 저거…….”
현찬은 행성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행성의 검은 표면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촉수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심연>…….”
한때 지구와 연결되었다가 제우스의 힘으로 강제로 연결이 끊긴 차원.
그 심연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