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221화 속임수 도우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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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의 발언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사람들은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독촉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분위기가 점점 뜨겁게 흘러가자 거기서 나선 사람은 알렉세이 윌터였다.
“모두 진정!”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고,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잔뜩 흥분했던 사람들은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난장판이 될 뻔했던 회의실이 진정되자 알렉세이 윌터는 대답을 촉구하는 시선을 담아 현찬을 보았다.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물론이죠.”
알렉세이도 오버랭크 헌터로서 나름 아는 것이 있었다. 이 자리까지 올라오고 인간으로서의 격이 최상급에 도달하면 자연히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법이었다.
언제나 미소를 짓던 알렉세이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렇기에 현찬도 진심을 담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와! 거기로 간다고? 인간이? 미쳤어! 완전히 미쳤다고!”
글루스카베는 그렇게 외쳤지만, 정작 그의 입가에는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소가 한껏 맺혀있었다. 격한 반응을 보인 건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쳤어! 미쳤어! 아니, 죽고 싶어서 그래?!]
[인간은 거기를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냉기의 여신 스카디와 구천현녀의 잔소리가 현찬의 귀를 세차게 때렸다. 문득 현찬은 스카디를 보며 발드르의 기억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본래 스카디는 거인 티아시의 딸로 설산 트림하임의 주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샤치는 청춘의 여신 이둔을 납치하려다 오딘에게 살해당했다. 오딘은 스카디의 아버지를 죽인 걸 사과하며 화해를 청하게 됐고, 스카디는 받아들이는 대신 2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남편을 달라는 것.
스카디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빛의 신 발드르였다.
물론 로키의 계략으로 그 계획은 완전히 무산됐지만, 발드르로서는 갑자기 결혼하게 될지 모른다는 가슴 철렁한 일이 있었다.
‘뭐, 그건 그냥 넘어가고.’
생도들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그쪽의 신들마저도 현찬의 발언에 관해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차분한 신이 아누비스였고 나머지 신들은 자기가 지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현실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거 참. 내가 그렇게 못 할 말을 했나?’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느냐!]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현찬의 뒤통수를, 아테나가 강하게 후려쳤다. 물론 영체 상태라 별로 타격감이 없었지만, 감촉을 아예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현찬은 맞은 부위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테나에게 과연 맞을 짓을 했는가?’ 하고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답은 금방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헤르메스에게만 말했지, 아테나에게는 영령의 세계로 간다고 말하는 걸 깜빡했다.
메인 계약자가 헤르메스라 하더라도 아테나는 다른 신들과 다르게 헤르메스 다음으로 서브 계약을 따 낸 신이다. 그런데 헤르메스에게만 말하고 자신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 섭섭함과 분노가 동시에 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테나의 진짜 속마음은 따로 있었다.
‘이러면, 그때 내가 괜한 오해만 했던 거잖아!’
새벽에 현찬과 헤르메스 단둘이 있었던 그 광경을 보고 얼마나 못된 상상을 했던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하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지난 며칠 동안 밤마다 얼굴을 붉히며 상상의 나래에 빠져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다니.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자괴감과 부끄러움, 그것이 고스란히 분노가 되어 표출된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모르는 현찬으로서는, 자신이 좀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 깜빡하고 있었어.”
[너는 하여튼…… 후. 됐다. 나도 뭐, 크게 잘못한 게 있으니 이 이상 말은 못 하겠구나.]
“……?”
크게 잘못한 거? 조금 걸리는 말이었지만 현찬은 그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알렉세이의 기세에 눌려서 지금 순간만큼은 얌전해졌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찬이 한 말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어내지 못할 현찬이 아니었다.
“지금 한 시가 촉박한 상황이니, 이 안건에 관해서는 빨리 넘어가도록 하죠. 우선…… 저희가 앞으로 해야 할 대비 방안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현찬은 은근슬쩍 헤르메스의 권능까지 섞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유도했다. 오버랭크에 도달한 자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기술이지만, 그러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흠. 일단 그러는 게 낫겠죠.”
“모두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빠르게 갑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아 빠르게 토론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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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갈 무렵, 현찬은 생도들에게 있다가 보자는 말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서 한 남성의 뒤를 쫓았다. 달릴 필요도 없이 둘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현찬의 기척을 느꼈는지 남자, 주현창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용무가 있는 현찬을 보고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얼굴에 가면을 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현찬 헌터님. 무슨 일이신가요?”
현찬은 주현창의 그 태도가 가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괜히 그것을 지적할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용무를 빠르게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하고 싶은 말이라니요? 따로 저에게 언질을 주고 싶다는 건가요?”
“아니요.”
현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을 하고 싶은 대상은, 주현창이 아니었다.
“로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생글생글 웃고 있던 주현창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이내 주현창은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떠나갈 사람들은 다 떠났기 때문에 복도는 한산했다.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현창은, 더 가식을 부리지 않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제가 언제까지 모르고 있을 거로 생각하신 겁니까?”
“…… 후유. 역시 헤르메스의 계약자는 다르다 이건가요.”
“어차피 그쪽이 저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피차, 시간 끌지 말고 용건만 딱딱 정리하죠.”
현찬의 당당한 태도에 주현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현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방이 저렇게나 직설적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당신…….”
“지금은 서로의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지 않을까요.”
“후. 뭐, 현찬 씨가 방금 했던 말대로, 저는 당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떠한 이유로 그 부탁을 들어줄 거로 생각하신 거죠? 거절할 거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거절이요?”
현찬은 오히려 그런 주현창의 배짱이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이미 발드르의 힘을 상당히 깨우친 현찬은, 다른 오버랭크 헌터 이상으로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상황이다.
그가 단순히 사용하는 <헤르메스의 눈>조차도, 이전에 전력으로 사용할 때와 비교하면 급이 달랐다.
현찬은 보았다.
주현창과 로키 사이에 맺어진, 아주 작고 불안한 계약을.
저것은 정식으로 맺은 계약이 아니라, 로키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맺어진 조촐한 것이다. 저것을 과연 계약이라고 불러도 될지조차 우스울 정도였다.
“제가 보기에는, 당사자인 로키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
현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기척과 정체를 감추고 있던 로키가 결국 영체로서의 모습을 드러냈다. 풍성하고 넘실거리는 긴 흑발.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위를 덮은 녹색의 드레스.
로키는 관능적인 미소를 지으며 현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단순한 손짓에도 보통 인간이라면 참을 수 없는 교태가 서려 있었다.
[이런. 결국, 들키고 말았네. 헤르메스가 일렀니?]
[난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만. 로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쯤 되면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주현창이었다. 그토록 원하지 않던 상황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현찬은 자신의 우상이자 사랑인 로키를 독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여신님께…….”
[닥쳐.]
주현창의 말을 끊어낸 것은 로키였다. 감정이라고는 실리지 않은 그녀의 싸늘한 언어의 비수에, 주현창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여, 여신님…….”
[네가 지금 내 말에 토를 달겠다는 거냐?]
“…… 아닙니다.”
주현창은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로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다시 고개를 돌려 현찬과 시선을 마주했다. 로키의 눈동자에는, 현찬을 향한 호감이 가득했다. 주현창을 대할 때와는 극을 달리는 태도였다.
[그래. 우리 귀여운 아가, 누나를 어쩐 일로 찾아왔을까?]
“…….”
로키는 자신이 주현창을 매개로 정체를 숨긴 것이 들켰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현찬을 어떻게 골려줄지 그것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태도에, 현찬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관심이 없는 대상에게는, 한없이 차가운 성격은 여전하구나.”
[……!]
어조부터 달라진 현찬의 말에 로키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이렇게나 놀란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헤르메스조차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했다.
[너……너……!]
“오래간만이야…… 라고 전해 달라네.”
[…….]
이번에 입을 꾹 다문 쪽은 로키였다. 예상보다 빠르다. 그녀는 현찬이 아직 발드르의 힘을 인지조차 못 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서, 현찬은 발드르 기억의 일부까지 갖게 됐다.
“로키. 대충 제 상황을 유추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네. 발드르의 힘이라면, 녀석의 능력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해봐.]
“헤르메스와 함께, 제가 영령들의 세계로 떠나는 걸 도와주십시오.”
[……!]
로키는 재차 눈을 부릅떴다. 그 반응은, 조금 전에 현찬이 발드르의 말을 빌려 인사를 했을 때보다는 더 약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파장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어?]
“네.”
현찬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영령의 세계로 갈 수 없어. 그곳은, 육신의 탈을 벗어 던져 인간으로서의 껍데기를 깨고 나온 자만이 갈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영령들의 세계 또한 급이 나뉜다.
달인에서 왕급이 주로 머무는 중위계가 그러했고, 태고의 영웅과 신들이 머무는 곳이 상위계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주신 급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 천상의 끝이었다.
현찬이 가겠다고 하는 곳은, 상위계가 분명했다.
[세계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것을 거스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
“하지만, 그런 세계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현찬은 로키의 말에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기만과 사기를 담당하는 로키와, 그에 준하는 헤르메스가 서로 힘을 합친다면?
[큭! 푸흡! 푸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로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녀는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표했다.
웃음을 멈춘 로키는,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미있겠네. 좋아. 해 보자.]
그들은 세계의 눈을 속이는 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