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220화 (220/265)

# 220

220화 속임수 도우미 (1)

_

“흠. 다 모였나요?”

현찬의 물음에 명단을 확인하던 황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들이 머무는 장소는 차기 오버랭크 생도들을 키우는 <영웅의 근원>에 있는 커다란 회의실이었다. 그곳에서 현찬은 상석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현찬의 곁에는 황설영이 비서처럼 서서 이 자리에 모일 사람들의 명단을 점검하는 중이다.

“전부 모였습니다.”

명단에 기재된 마지막 이름 아래에 볼펜으로 선을 쫙 그으며, 황설영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녀의 속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중이다.

‘역시 지구 최강 헌터가 되면 이 정도 명단의 사람들을 부르는 건 쉬운 일인 건가.’

황설영은 이미 현찬을 잠정적인 지구 최강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아크릴판 위 종이에 적힌 명단만 보면 현찬의 위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오버랭크 헌터 알렉세이 윌터.

오버랭크 헌터 안드레이 다니엘.

오버랭크 헌터 양 리화.

현찬을 제외한, 지구에 존재하는 나머지 오버랭크 헌터 셋이 전부 이 자리에 모였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마초다운 남자인 알렉세이 윌터는 고르고 새하얀 치열을 선보이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양 리화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가 부담스러운지 어깨를 움츠리며 가만히 있었다. 안드레이 다니엘도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팔짱을 낀 채 얌전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셋만 있으면 모를까, 여기에 다른 손님들이 더 있었다.

차기 오버랭크 헌터로 확정된 생도들 전부.

강현지, 리네넷, 한성주, 엔도 미즈호, 진 차이, 아흐메드 알리 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오버랭크 헌터들이 추가로 모인 상태였다.

그들은 현찬이 자신을 왜 여기로 불렀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다소곳이 배정된 자리에 앉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손님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계연합>의 고위급 인사들도 더러 있었으며 각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S랭크 헌터들까지 있었다. 당연히 김은혁도 여기에 있었고, 한성주가 보내는 격렬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만 해도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기가 오죽할까.

이곳의 관리자이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현창도 참석한 상태인데, 그는 매우 불편한 기색을 표현하는 표정이었다.

“흠흠. 다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현찬이 그렇게 운을 떼는 순간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이자, 손을 든 장본인인 리네넷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네. 리네넷 씨. 질문하세요.”

“아, 네!”

리네넷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순간 주눅 들었지만, 현찬의 지원으로 다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아 조금 전부터 궁금했던 걸 입에 담았다.

“저희는 왜 여기에 모인 건가요?”

“좋은 질문이에요. 안 그래도 모두 다 그걸 궁금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일단 화면을 보시죠.”

현찬의 손짓에 따라, 회의실에 준비된 새하얀 스크린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동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그것은 얼마 전 아지다하카가 큐브를 통해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이미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보여주는 겁니다. 악신회의 멤버. 정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상당히 강한 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독특한 물건을 사용해서 저희의 시선에서 벗어났죠.”

정말 완벽하게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 <세계연합>의 능력으로는 추적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솔직히 저들이 어떻게 저것을 다루고 움직이고를 떠나서……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마계에 방문하면서 확신하게 된 일이죠.”

“그게 뭡니까?”

“악신회가, 다른 세계와 손을 잡고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찬의 말에 여러 곳에서 침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우선 지금 보고 있는 이 영상만 해도, 해당 악신이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마계입니다. 김은혁 헌터님께서 직접 마계로 통하는 <문> 근처에서 발견했죠.”

“네. 맞습니다. 제가 계속 지켜본 바로, 마계로 통하는 <문>에서 나왔습니다.”

“허. 말도 안 됩니다. <문>을 지키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데, 걸리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상대는 겉으로 보면 저희와 비슷해 보여도, 그 진면목을 살피면 신화 속에 존재하는 고등한 신입니다. 인간인 저희가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저희가 모르는 수 정도는 몇 개는 있겠죠. 당장에 이 큐브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떡 하니 존재하는 증거에 반박하려던 <세계연합>의 임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애써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싫었지만, 현찬의 말은 타당했다.

“음.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나?”

“네. 알렉세이 씨. 질문하시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알렉세이 윌터가 입을 열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알렉세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고는 질문을 던졌다.

“현찬. 너의 말대로 악신회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우리가 모르는 놈들의 기술이라면…… 아직 지구에서 발견하지 못한 다른 차원을 포섭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곳에 우리가 모두 모인 이유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군.”

“맞습니다. 제가 따로 여러분들을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죠.”

“그렇다면 그게 대체 뭐지? 이곳에 오버랭크 헌터들을 전부 다 부른 이유가.”

후. 현찬은 크게 숨을 들이쉰 이후에 내쉬며 청중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모두 현찬이 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잔뜩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현찬은 저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놔두고 얼마나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 확률을 가장 높여주는 길이었으니까.

“여러분께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제가 앞으로 한동안 자리를 비우게 될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리를 비운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죠? 어디를 간다는 소리인가요?”

현찬의 여동생인 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렇게 물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예의를 차려서 평소처럼 막 대하지 않고, 조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현찬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하는 기색에서 그가 어딘가 상당히 먼 곳까지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비밀입니다. 단지, 좀 많이 먼 곳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렇다면 얼마나 걸리는지는 알 수 있나요?”

“그것도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가, 강현찬 헌터님. 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겁니까? 아니. 가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확신치 않다니. 그건 대체…….”

황설영도 자기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현찬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현찬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은 현찬이 없으면 안 된다.

만약 지금이 평화로운 시대라면 괜찮다. 그저 평소와 같이,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적당히 나오는 시점이어도 현찬의 빈자리는 별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인류는 옛날과 다르게 매우 성장했으니까.

그러나 현재 상황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최근에 일어난 부산 사태도 그렇고, 악신회의 멤버들이 무언가 꿍꿍이를 벌이는 현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게다가 현찬이 방금 말했듯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지구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지구 안쪽에 악신들이 현계에 강림하여 무슨 재앙을 몰고 올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지구 최강이라는 수식을 알게 모르게 얻게 된 현찬의 빈자리는 매우 크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가 자리를 비우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하지만 여러분. 이것은 필요한 과정입니다. 진짜 적은 악신회가 아닙니다. 그 악신회를 이끄는 진짜 흑막. 그가 적이죠.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죠. 녀석은 지금까지 저희가 봐왔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할 겁니다.”

무려 신화 속에 존재하는 악신들을 이끄는 집단의 수장이다. 악한 성향에 강대한 힘을 지닌 악신들이 따르는 거라면 필시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이 리더쉽도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유력한 것은 그가 지닌 힘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지금 상태에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말이죠.”

“그래서 지금 하려는 것이, 그것에 대한 활로인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안드레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도박이기는 합니다만…… 여러분들이 도와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 물론 우리도 너에게만 의존하는 건 원치 않다. 무엇보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의 인류는 엄청나게 성장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 지금 우리에게 너의 존재는 매우 절대적인 힘이다. 너의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안드레이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려 들지 않았다. 분하지만, 안타깝지만 그것이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현찬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걱정과 다르게 저의 빈자리는 확실히 채워질 겁니다.”

“누가? 자네는 단순히 강한 것만이 아니라 다재다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적들이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어느 정도 예견이 가능한 자네의 역할은 대체 누가 한단 말이고?”

쿠르지프 보르바초프.

러시아 헌터협회의 협회장이자, <세계연합>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지닌 간부였다. 겉모습은 탐욕스러워 보이는 뚱뚱한 중년이지만 누구보다도 세계를 지키기 위한 열정이 남다른 인물이기도 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 분야에서는,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런 존재가 있다고? 그게 대체 누구인가?”

“이미 이 자리에 와 있지 않습니까. 소개하도록 하죠. 한성주 씨?”

“네, 녜헥?!”

설마 이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릴줄 몰랐는지, 한성주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크게 떨었다. 쿵! 화들짝 놀란 탓에 한성주의 무릎이 책상과 세게 부딪쳤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아, 으. 아으아아!”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한성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광경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당황했다. 현찬은 아무렇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원래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지 그녀는 하늘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신>의 계약자입니다. 별자리를 이용한 점성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저보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가 훨씬 더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날 겁니다.”

현찬의 빈자리. 언제 어디서 어떤 적이 쳐들어올지 예측하는 능력은 한성주가 대신해 줄 것이다. 오히려 한성주는 현찬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면…… 강현찬 헌터, 자네는 어디로 가려는 건가? 가더라도 돌아올 기약이 없는 곳이라니. 대체…….”

“비밀이라니까요.”

“비밀이라는 말로 넘어갈 문제가 아닐세! 본인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지구에는 자네가 필요하다는 걸! 이것만큼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겠어!”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날 기세가 보이지 않아 현찬은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하. 알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죠.”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좌중을 훑어보며 모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똑똑히 말했다.

“저는, 영령들의 세계로 떠납니다.”

그런 현찬의 눈동자에는, 황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