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화 서사시의 서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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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쉔니르>.
차원의 전체 면적 중에서 바다는 크기가 작고 거대한 대륙이 가득한 세계다.
너무나도 넓은 땅 면적 중 산악지대는 거의 없으며 땅 대부분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냥 풍족한 세계는 아니어서 대부분 거주민은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개인의 무를 숭상하면서도, 뛰어난 기병 술을 지닌 이 차원은 사람들이 넓은 벌판을 뛰어다니며 항상 끝없는 정복 사업을 펼치는 세계다.
대지 면적만 지구 대지 면적의 2배 이상. 그곳에서 지내는 부족의 수만 1천이 넘어선다.
서로 손을 잡은 부족도 있고, 적대하는 부족도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수많은 부족이 전쟁을 벌였고 들판은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영원히 싸움이 지속할 것만 같았던 야만의 세계.
그곳이 바로 쉔니르였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지나간 옛말이다.
“사신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런 자질구레하고 거창한 예식은 필요 없어요. 시간이 부족하니, 빠르게 본론만 말하죠. 대족장 님을 뵙게 해주세요.”
푸른 초원 위에 지어진 거대한 움막들. 그곳의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움막의 앞에서 한 여성이 당당하게 말했다.
허리까지 오는 진녹색 머리카락.
몸에 걸친 옷은 악어의 가죽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것이었다.
상당히 예민해 보이는 표정에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담겨있었다.
그녀의 말에 가죽옷을 입고 험악한 인상의 덩치들이 당황했다.
마냥 그녀의 말을 들어주자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대족장을 함부로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사신이라는 그녀가 지닌 힘이나 지위가 부담스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 움막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가하라.”
“네, 넵!”
움막의 문이 좌우로 열리고 사신이라 불린 여성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당당하게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완벽히 투과하지 못하는 움막 안쪽은 짙은 노란빛이어서 안쪽이 모래로 가득 찬 듯한 인상을 주었다.
짐승이 내달렸고, 그 흔적으로 주위에 뿌옇게 일어난 먼지.
그것은 쉔니르에서 대족장이 휩쓸고 지나간 유일한 흔적이자 발자취.
대족장의 움막은 딱 그런 분위기였다.
‘오히려 잘 어울리는 느낌이지만.’
사신이자 악신회의 멤버.
여신 <트랄텍트리>는 대족장이 기다리고 있는 움막의 깊은 곳으로 걸어가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트랄텍트리Tlattrcuhtli>.
아스텍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시팍틀리>라고도 불리며, 태초의 바다를 헤엄치는 거대한 악어의 형상이다. 모든 관절마다 입이 달렸으며 항상 배가 고파 세계 자체를 먹어 댈 정도로 끔찍한 괴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대지의 여신이라 불리는 이유는 <케찰코아틀>과 <테스카틀리포카> 때문이었다.
이 두 신이 다섯 번째 세계를 갓 만들었을 때 트랄텍트리는 배가 고파서 태초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케찰코아틀과 테스카틀리포카는 이런 거대한 악어 괴물을 가만히 놔뒀다가는 자신들이 창조한 세계가 사라질 거로 생각해 그녀를 공격하여 두 동강을 내버린다.
그렇게 좌우로 찢어진 트랄텍트리의 육신은 위아래로 흩어져 하늘과 땅이 되었다.
본디 그녀는 그렇게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케찰코아틀과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당한 트랄텍트리는 결국 증오에 휩싸여 어둠을 품게 되었고 악신회의 멤버로 하계에 직접 강림했다.
목표는 단순했다.
그 두 신이 만든 이 세계를…… 그녀의 손으로 부수는 것.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렇게 다른 차원까지 와서 지구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왔군.”
움막의 깊은 곳, 그곳에서 대족장이라 불리는 사내가 트랄텍트리를 맞이해 주었다. 거대한 덩치에 우람한 근육을 지닌 그는 자신의 덩치에 맞는 옥좌에 앉아 있었는데, 새하얀 옥좌는 전부 사람의 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에게 반항하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운 적들의 뼈로 이루어진 의자.
이는 대족장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상징체였다.
그런 대족장 주위로, 반쯤 벗은 여성들이 그에게 엉겨 붙으며 애교를 떨고 있었다.
대족장 <샤 칸>.
수천 개가 넘는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 <쉔니르>. 피와 살육, 전쟁으로 물든 이 세상을 하나로 통합한 최초이자 유일한 왕.
그가 이끄는 기병들은, 절대로 멈추지 않고 적들을 짓밟았으며 그들이 지나가고 남은 곳은 으깨진 시체와 모래 먼지만이 가득했다.
“오랜만이에요. 대족장. 얼마 만이죠?”
“임신했던 암말이 새끼를 막 낳았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소. 그보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슬슬 우리가 맺었던 협정대로 그 시기가 다가온다는 소리겠지?”
샤 칸은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야만적인 미소를 지었다. 쭉 찢어진 그의 입에는 누런 이가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트랄텍트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제 곧, 준비했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크하하! 이거, 아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와줬구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샤 칸의 눈동자에는, 전투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가 이 세계를 통합하고 모든 부족을 하나로 모은 건, 거창한 신념이나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싸움이 좋았고, 계속 적들과 싸우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하나로 통합이 된 세계에서, 샤 칸은 더는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깨닫고 무료하던 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것이 바로 악신회였다.
차원 <지구>.
그곳에 있는 수십억의 사람들.
이 얼마나 정복하기 적합한 곳이란 말인가!
샤 칸은 꺼져가던 마음에 다시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쉔니르>가 통합되기 전에 그가 품었던 전투를 향한 열망이었다. 이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 다시 그 즐거운 전투를 시작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그의 애마를 타고 지구를 침략하고 싶은 샤 칸이었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지구에는, 상당히 강한 자들이 넘치니까.”
“흥. 지금 내 기병들을 무시하는 거요? 이 샤 칸이, 고작 그런 나약한 녀석들에게 질 거로 생각했소?”
“…… 당신의 수준이라면 나쁘진 않죠. 그래도, 방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트랄텍트리가 보건대 샤 칸은 매우 강한 남자였다. 그 또한 영령과 계약을 맺은바, 지구로 치면 오버랭크 헌터에 근접한 실력자다. 말을 탄 그가 발휘하는 힘은 오버랭크 헌터를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그 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겠소. 50만이 넘는 우리 기병이, 피에 굶주리고 있거든.”
“알겠어요.”
트랄텍트리는 더 할 말은 없었기에 등을 돌려 움막을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 뒤에서 샤 칸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 전에 했던, 내 여자로 들어오라는 부탁은 아직도 유효한가? 당신처럼 강한 여자는, 바로 1 왕비가 될 수 있을 텐데.”
“하!”
그 기가 차지도 않는 말에 트랄텍트리는 살기를 피워 올렸다.
[오만하구나, 인간이여. 대지의 여신인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더냐?]
신력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 움막이 크게 울렸다. 꺄아악! 샤 칸의 주위에서 애교를 떨던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그녀들도 영령과 계약을 맺은 여전사로, 지구로 치면 거의 A랭크 헌터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트랄텍트리의 기운에 저항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샤 칸은 그 기운을 받아내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저항하며 탐욕이 담긴 시선으로 트랄텍트리를 주시했다.
“…….”
트랄텍트리는 이 이상 실랑이는 힘의 낭비임을 깨닫고 기운을 거두었다.
“괜한 말은, 화를 입게 만들죠. 주의해줬으면 하군요. 그럼 전 이만.”
거침없이 움막을 나서는 트랄텍트리의 뒷모습을 보며 샤 칸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
차원 <굴쿠자>.
보랏빛 숲으로 가득 뒤덮인 이 세계에는 인간과 같은 지성 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벌레’들 뿐.
“이곳은 몇 번을 와도 참 끔찍한 곳이야.”
거대한 보라색 나무의 근처에서 몸을 숨긴 남성은, 코를 찌르는 기묘한 악취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거. 진짜 내가 꼭 이런 놈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해?”
그렇게 투덜거리는 남자 <브리트라>는 자신의 아래에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브리트라>.
고대 인도의 종교 문헌에 나오는 괴물이자 ‘가뭄’이라는 자연 현상 자체를 신격화 한 악신이다.
신들의 왕 인드라를 죽이기 위해 태어났으며 실제로 그를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인 막강한 괴물이기도 했다.
입안에 있는 약점만 아니었다면, 바듀라에 당해 죽지도 않았을 터.
“그러면 뭐 하냐고. 벌레들이나 구경하는 신세인데.”
차원 굴쿠자는 매우 끔찍한 곳이었다.
이곳에 서식하는 건 오로지 벌레뿐이었다. 벌레들은 지성이 없으며 집단으로 행동했다. 놈들은 걸리는 게 있다면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삼켰으며 분해하여 동족의 수를 늘렸다.
“그나저나, 확실히 잘 움직여주기는 하네.”
브리트라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여타 갑각류 형태의 벌레와는 다르게 매우 거대한 덩치를 지닌 벌레가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의 뇌처럼 생긴 그것은 꿈틀거리며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이 수억이 넘는 벌레들의 군단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저 여왕만 어떻게든 다루게 된다면, 이 한 차원을 집어삼킨 거대한 벌레군단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
브리트라는 아지다하카에게서 배운 사술을 이용하여 여왕을 조금씩이지만 자신 뜻대로 움직이게 세뇌하고 있었다.
그 과정도, 이제 곧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벌레들이 지구에 한꺼번에 들이닥친다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군.’
그가 일으킨 가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브리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이 벌레떼가 지구를 집어삼킬 거로 생각하자 조금이지만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나머지 녀석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브리트라는 숲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으로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이곳인가.”
온몸을 두껍고 거대한 로브로 가려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남자가, 한 차원에 발길을 내디뎠다. 그가 지금 서 있는 이 차원은, 다른 곳과 다르게 상당히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곳은 거대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어떤 곳은 울창한 숲이 있었고, 어떤 곳은 얼음으로 뒤덮였고 또 어떤 곳은 거대한 기계로 된 구조물이 가득했다.
단순히 눈에 띄는 풍경만 해도, 서로 확실하게 엇갈리는 것이 몇 개가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은 세계.
<버려진 땅>.
이 차원의 존재를 아는 자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말 그대로 이곳은 버려진 차원이었다.
지금은 멸망해서 사라진 차원들의 잔해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하나로 뭉쳐지고 합쳐지며 생겨난 새로운 차원.
찌꺼기들이 하나로 모여 불안정하지만 하나의 차원을 이룬 이곳은 얼핏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더욱 강해질 수 있던 거겠지.”
남자의 말과 동시에 주변에 기척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누군가 존재했고 그들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살기가 대기를 타고 로브를 쓴 남성의 몸을 강하게 찔렀다. 숫자는 적지만, 하나하나의 실력은 절대로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재밌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얼굴을 가린 로브를 뒤로 넘겼다.
“나 튀폰에게 살기를 내뿜는 녀석들이 있을 줄이야.”
<티폰>.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올림포스의 신들을 벌하기 위해서 잉태한 거신(巨神).
그가 두 팔을 벌리면 세계의 끝과 끝이 닿았으며 산과 땅을 찢고 하늘을 갈랐다는 무지막지한 괴물.
그 그리스의 신들마저 한번은 티폰에게 겁을 먹어서 동물로 변해 도망쳤을 정도였다.
그런 티폰이, 악신회에 몸을 담은 채로 다른 차원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