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218화 서사시의 서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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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해?]
헤르메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헤르메스가 얼마나 큰 동요를 겪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만큼 현찬이 한 말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곳에 발도 들이밀 수 없어.]
아무리 영령들의 세계와 현계 사이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하더라도 그것도 결국 영령 세계에서 현계로의 ‘일방통행’이 더 좋아졌을 뿐이다. 지구의 인간은 절대로 영령들의 세계를 넘볼 수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아래에서 위로 흐를 수는 없으니까.
[너는 지금…… 세계가 정한 규칙을 거스르려고 하는 거야. 지금 그게 얼마나 허황하고 위험한 짓인지 알고는 있어?]
헤르메스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그것은 현찬을 믿었던 만큼 현찬이 이런 말을 꺼낸 현실에 관한 분노 때문이었다.
헤르메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무리 현찬이 네가 강하다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돼. 방금 네가 한 말은 못 들은 거로 하겠어.]
“헤르메스. 나는 괜찮아.”
[네가 괜찮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
헤르메스는 말을 끊고 눈을 부릅떴다.
현찬이, 영체화 된 자신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현찬의 손을 타고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기운을 느낀 헤르메스는 경악했다.
놀람, 경악, 불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탁월한 신은, 정말로 오랜만에 여과 없이 감정의 격류를 토해냈다.
[너…… 이거…… 대체 어떻…… 아니. 언제부터?]
헤르메스는 너무 당황해서 스스로 무슨 말을 내뱉는 건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 그가 받은 충격은 거대한 것이리라. 현찬은 헤르메스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한 몇 주는 됐어.”
많은 의미가 내포된 웃음에 헤르메스는 어깨를 툭 떨궜다.
[하. 모르겠다. 난 모르겠어.]
“지금까지 숨기고 있어서 미안.”
[네가 왜 사과해.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숨기고 있었는데. 오히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 나야. 너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렸어야 했어.]
“너도 모호했던 거지? 그때, 혼자서 고민하다가 어디론가 떠났잖아.”
헤르메스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와서 여기서 뭘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때 로키를 만나러 갔었지?”
[…… 그것까지 알고 있었어?]
“알게 된 건 최근이야. 내 안의…… 이 녀석이 다 말해줬으니까.”
[발드르…….]
현찬의 몸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는 헤르메스로서는 참 웃기는 이야기였다.
[현찬아. 기억해? 내가 옛날에, 너한테 이야기했던 거.]
“세상에는 멋지고 신기한 곳이 많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 빛의 신전이라고 했었지.”
[맞아. 주인이 없는 곳이라고. 너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이 바로 앞에 있었네. 그것도 모르고 그런 말을 했었다니, 아아.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
“킥킥. 야. 뭐가 부끄러워. 애초에 그 궁전은 갈 수 있으면 마음대로 가도 돼.”
발드르의 궁전, 빛의 신전은 선하고 고귀한 자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악하고 거짓이 많은 자라면 그곳에 가지 못하지만, 현찬이 아는 헤르메스라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게다가 본인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오라는데 뭐.”
[벌써 둘이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되었구나.]
“내가 최근에 각성을 제대로 한 만큼, 발드르의 힘을 다루는 것도 익숙해졌어. 그러다 보니…….”
[대가를 더 강하게 치르게 되고 있고. 맞지?]
“맞아.”
현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잠에서 깬 지금도 그것을 실시간으로 겪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전체로 확장되는 느낌. 인간이라는 육신이 형태를 다 잡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며, 모든 공간으로 흩뿌려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 할 것이다.
“이게…… 네가 세상을 보는 눈이었구나.”
[…… 그 힘은 아직 인간인 너에게 무리야.]
“알아.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헤르메스.”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헤르메스의 앞에 섰다. 두 손으로 헤르메스의 가녀린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 보았다. 아. 헤르메스는 현찬과 눈을 마주치자 입을 벌리고 말았다.
“부탁이야. 나를, 너희들의 세계로 데려다 줘.”
그 필사적이고 의지가 담긴 그 눈빛을 본 헤르메스는 현찬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제 정말로 현찬을 위해서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를 영령들의 세계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차피 내가 거절해도 넌 받아들이지 않을 거잖아.]
“물론 그렇지. 떼를 써서라도 갈 거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헤르메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온 현찬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와 계약을 맺은 이후로, 하루도 쉬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던 현찬의 손은 헤르메스의 것과는 극과 극이었다.
[되게, 딱딱하네.]
“그러는 네 손은 되게 부드럽고.”
[뭐, 나야 육체파가 아니니까 그렇지. 그래. 이렇게까지 감촉이 느껴질 정도라면…… 어쩌면 지금의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헤르메스는 고개를 들어 현찬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그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시 그를 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일말의 걱정.
현찬도 헤르메스를 보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남자이면서 여자 뺨칠 정도로 곱상하고 예쁘게 생긴 헤르메스. 크고 동그란 눈과 갸름한 턱, 오뚝한 코까지. 심지어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아서 정말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다르게 생겼지만, 누구보다도 현찬을 잘 아는…… 진짜 가족.
[우선, 네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해. 너는 이미 준비된 것 같지만…… 중요한 건 네가 얼마나 현계에서 자리를 비우게 될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네가 자리를 비운만큼 그 빈자리는 크다는 거야.]
“알고 있어. 그러니…… 이제 슬슬 준비해 놨던 패를 꺼내 들 때가 왔지.”
[준비한 패?]
“알고 있잖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차기 오버랭크 헌터들을 끌어모았는지.”
이제 생도들은 어엿한 헌터로서 자리를 잡을 수준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사회로 나갈 출사표를 낼 준비가 끝났다.
“그러니, 지금은 여기서 끝.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이자.”
[응. 그래.]
그리고 이런 둘의 모습을 엿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뭐, 뭐야! 뭐야, 뭐야, 뭐야!’
헤르메스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서 잠시 물러나 준 아테나는 몰래 숨어서 현찬과 헤르메스를 훔쳐보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더 가까이 갔다가는, 들킬지도 몰랐으니까.
그냥 다가가기에는, 둘의 대화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서로 침대에 어깨를 맞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갑자기 마주 보며 얼굴을 가깝게 가져다 대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거기에 또 손을 겹치질 않나.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짓지를 않나.
이런 상황, 아테나는 많이 보았다.
그녀가 신으로서 군림하고 있었을 때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보였던 풍경.
‘두, 둘이 설마 그렇고 그런 사이?!’
남자끼리 서로 사귀고 사랑을 나누는 광경은, 아테나 때는 매우 흔했다. 애초에 아름다운 소년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신들도 있었을 정도니까.
이는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래. 헤르메스 이 녀석.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여신들보다 훨씬 더 예뻤지. 분하지만, 녀석의 미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어. 이건 의심이 아니야! 확신이다!’
아테나에게 그런 헤르메스와 현찬이 사랑에 빠졌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저 둘의 시선! 저건 딱 봐도 뭔가 있다는 소리야!’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 정확했을 뿐이었다.
현찬과 헤르메스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건 맞지만 아테나가 생각하는 그런 달콤한 사랑이 가득하지는 않았다.
‘어, 어쩐지 계약자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했더니 그런 거였나!’
아테나는 이렇게 된 거, 둘의 사이를 응원해주기로 했다.
뭔가 큰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지금 아테나가 겪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그렇게 한 여신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
“오오! 오셨군요!”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신회의 멤버 악룡 <아지다하카>는 자신을 맞이해주는 남성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할 정도로 살덩이가 풍부한 중년의 남성은, 그런 아지다하카의 태도에 허허 웃으며 그를 안내했다.
거대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 그곳의 넓은 홀로 아지다하카를 이끈 남성은 긴 복도를 지나 커다란 발코니로 안내했다. 둘은 적막한 길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허허허. 안 그래도 언제 다시 찾아오실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가 너무 기다리게 했나 보군요. 좀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사신님이 죄송할 게 있습니까.”
아지다하카는 웃으면서 뚱뚱한 중년인의 말에 맞추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얼핏 보면 둘의 사이는 매우 친한 친구처럼 비추겠지만, 그 속내를 살피면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상대방의 진심을 읽어내기 위한 가벼운 견제와 수 싸움.
둘은 절대 서로를 믿지 않았다. 믿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
‘이 늙은 뚱보가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쳇. 사신이라고 잔뜩 치켜세워져도 속내를 비치지 않다니. 능구렁이 같은 녀석.’
그런 속내를 숨기며 둘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뚱뚱한 남자,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대공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갈츠하머는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차원 <벨드락실>.
그곳의 세계를 전부 평정한 제국 <엘 로스>.
이곳은, 악신회와 협정을 맺고 지구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전초기지였다.
“갈츠하머 님은, 준비가 잘 되고 계십니까?”
“허허. 준비랄 것까지 있나요. 황제님께서 이미 적극적으로 나서시는 마당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죠. 말 그대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통일한 제국의 모든 군대가 한곳에 모이고 있어요.”
“그거 정말 대단하네요.”
“허허허. 안 그래도 딱 시간이 맞는군요. 자 보시죠!”
갈츠하머는 발코니 끝에 서서 두 손을 활짝 펼쳤다. 뚱뚱한 중년인이 그렇게 행동하니 전혀 폼이 나지 않았지만,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은 듯했다. 아지다하카는 갈츠하머를 무시하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호오?’
아지다하카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게, 강철의 성 바깥쪽 그곳에는 거대한 기갑 병기로 무장된 군대가 오와 열을 맞춰서 대열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 벨드락실이 다른 차원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고도로 발달한 마도 공학에 있었다.
과학은 지구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거기에 접목된 마법은 그들을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건 끝없는 정복 사업.
엘 로스 제국은 전쟁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벨드락실 대륙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은 거기서 멈출 줄 몰랐다. <대통합>이 일어나면서 생긴 차원의 균열 그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
제국이 지닌 욕망의 화살은 다른 세계로 향했다.
그런 제국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먹잇감이 바로 지구였다.
‘이만한 군단이라면…… 어지간한 나라는 금방 함락시키겠군요.’
지구에는 영령의 힘을 빌린 헌터들이 있지만, 이쪽에는 과학과 마법의 집대성인 마도 공학이 있었다. 그것으로 움직이는 마도 병기는 어지간한 헌터들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강력한 병기였다.
그것이 지평선의 끝까지 늘어질 정도로 많이 있다. 심지어 잘 훈련된 병사들은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무기가 된다.
이 정도의 병력이 한꺼번에 지구를 침략한다면, 그때는 엄청난 혼전이 벌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움직이려고 하는 건 이 녀석들만 있는 게 아니죠.’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차원에서 다른 멤버가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이놈들의 장단에 놀아주도록 하죠.’
아지다하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