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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217화 (217/265)

# 217

217화 서사시의 서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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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드르와 직접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현찬이 발드르의 궁전인 빛의 신전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빛의 신전에 가지 못했을 뿐이지 꿈속에서 발드르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만남은 수차례나 이어졌다.

“그렇다 해도 정말로 놀랐어. 설마 서천 꽃밭을 불러낼 생각을 할 줄이야.”

“단 한 명의 신을 부를 수 있는데 거기서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건 그것뿐이더라고.”

마왕과 싸움을 끝낸 날, 세아리스 영지에 다시 하룻밤 묵게 된 상황. 현찬은 잠에 빠져들자마자 발드르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빛의 신전에서 만난 게 아닌 근처의 고요한 숲길이었다.

발드르와 함께 숲길을 걸으며 현찬은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발드르는 이미 현찬의 몸 안쪽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을 텐데도, 현찬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 주거나 호응해 주었다.

“다른 세계에서는 주신을 불러낼 수 없겠지. 그러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불러내기 위해서 소모해야 할 힘도 크니까. 확실히 자청비를 불러낸 건 가장 옳은 선택이었어.”

“뭐. 거기까진 좋았지만 아테나랑 너무 기 싸움을 해서 말리느라 힘들었지.”

“하하. 둘 다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여신들이니까. 그래도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대로 대단하기는 하더라고.”

“결과적으로 일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이쪽에 큰 피해도 없었고, 무난하게 적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었어.”

물론 걸리는 건 있었다. 나중에 양 리화가 말하기를, 옥사비누스를 상대할 때 거대한 검은 뱀이 자신을 노렸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 악신회의 누군가가 벌인 방해 공작이었을 것이다.

현찬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지구 쪽에 언질을 주었다.

그렇다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악신회라면 지구 쪽에서 해석할 수 없는 기술을 이용해 어떻게든 정보를 숨길 테니까.

“조금 마음이 급해진 것 같네.”

현찬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본 발드르는 잠시 쉬었다 가자면서 자리에 멈춰섰다. 현찬은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숲길은 사라지고 적당한 크기의 공터가 보였다.

발드르는 공터에 자리 잡은 적당한 크기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현찬도 발드르 근처의 바위 하나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숲의 싱그러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곳은 분명히 꿈속일 텐데도 모든 감각이 정확하게 느껴졌다.

“여긴 꿈속이지? 그런데 어떻게 촉감도 느껴지고 냄새와 소리도 느껴지는 걸까?”

“그냥 꿈은 아니지. 신력을 이용해서 만든 또 다른 세계라고 보면 돼.”

현찬은 자신이 걸터앉은 바위의 딱딱한 촉감을 느끼며 물었다.

“로키도 이 능력을 썼었지. 그렇다는 건 보통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이런 능력을 다루는 건가?”

“마냥 그러지만은 않아. 그저, 로키나 나나 마술에 능해서 가능한 일이야. 다른 신들은 알려줘도 잘 못 쓸걸? 애초에, 내게 이 기술을 알려준 것도 로키였다.”

“로키가?”

“응. 내가 한창 지옥에 있었을 때 로키가 남들 몰래 나를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이걸 가르쳐 줬거든.”

발드르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신이었지만 결국 죽고 만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볼품없다고 알려진 겨우살이의 나뭇가지에 찔려서.

그 모든 일의 흑막이 로키임을 생각하면 그, 아니 그녀가 발드르에게 사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로키를 믿어? 그…… 녀는 너를 죽게 했잖아? 이유는 내가 모른다고 쳐도, 그 결과는 변하지 않아.”

“뭐 그랬었지.”

“그런데도 믿는다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모두가 모든 것을 이루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상대를 용서하겠다고? 만약 현찬이 발드르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그는 절대로 로키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상계에서 지하로 내려가면서 오히려 로키를 향한 증오를 더 불태웠으리라.

발드르는 그런 현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것이 가식이고 거짓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발드르는 진심으로 로키를 용서한 것이다.

“대체 왜?”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건…… 인간도 그렇지만 신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전지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지. 결국,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야. 중요한 건, 그 실수를 저지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지.”

로키는 지옥까지 찾아와 발드르에게 사과했다.

그녀가 그때 흘렸던 그 뜨거운 눈물이 발드르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는 기만과 허영의 신이야. 너를 속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내가 멍청했던 거겠지. 그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나는 로키를 믿어.”

“…… 너는 은근히 구제할 수 없는 바보구나?”

“그러게. 이런 부분에서 너는 나와 무척 다르네.”

발드르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어쩌면 그건…… 헤르메스 덕이 아닐까 싶어.”

“뭐,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

현찬은 헤르메스를 떠올리며 미소 짓다가 이내 다시 현실 상황을 깨닫고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발드르는 그런 현찬의 변화를 쉽게 알아차렸다. 현찬이 숨기려고 해도 그를 오랫동안 봐 온 발드르에게는 전부 보였다.

“걱정돼?”

“걱정은 무슨.”

현찬이 애써 강한 척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거기에 속을 발드르가 아니었다.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해. 어쩌면 너도 지금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내 존재를 자각하고 난 이후로, 최근에 힘이 늘어나고 있잖아?”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드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힘을 ‘자각’한 이후로 현찬의 성장세는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본인조차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모습에 놀랄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현찬이 기존에 워낙 대단한 모습을 보여서 그 차이를 못 느끼는 것이지, 만약 현찬의 수준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까무러쳤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큰 힘을 얻으면서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 있다는 점이었다.

힘이 강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수록 현찬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완전히 보지는 못하지만…… 흐릿했던 것이 점점 뚜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 그렇구나.”

발드르는 현찬이 강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모든 일에는 시간과 순서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지금 현찬이 겪고 있는 상태는 누가 봐도 비상식적일 정도였다.

마냥 힘이 생기고 강해지면 좋은 게 아니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달리기를 건너뛰어 하늘을 날게 되는데 어떻게 그걸 기뻐할까.

결국, 걷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는 존재는 추락하기 마련이다.

발드르는 그 상황을 염려했다.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전혀 괜찮지 않아. 실시간으로 끔찍한 느낌이 뭉쳤다 흩어지는 기분은…… 진짜 견디기가 힘들거든.”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평소에 느끼지 못한 것들이 느껴진다.

<헤르메스의 눈>을 처음 사용할 때도 그랬다. 지금까지 곁에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한 것들이, 두 눈으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는 그 기분은…… 다시 생각해도 진저리칠 정도로 끔찍했다.

문제는 지금 현찬이 겪고 있는 현상이 그때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하고 끔찍하다는 것이리라.

현찬은 감탄했다는 듯 웃으며 발드르를 치켜세웠다.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운명을 오랫동안 봤음에도 그렇게 멀쩡한 거야?”

“그거야 나는 신이니까. 별로 큰 영향은 받지 않지. 반면에 너는 아직 인간이야. 아무리 고된 시련을 통해 단련된 인간이라 하더라도 세계의 운명을 멀쩡하게 볼 수 있을 리가 없어.”

“끄응. 확실히 그러기는 해.”

인간이 세계의 운명을, 그것도 끔찍한 운명을 보고도 멀쩡하게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현찬이 그나마 멀쩡한 건 아직 완벽하게 그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도 있거니와 그의 정신력이 이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이제 곧 놈들이 움직인다는 게 중요하지.”

“…… 벌써 그때가 왔구나.”

발드르는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먼 과거에 본 미래는 너무나도 끔찍해서 떠올리기 싫을 정도였다. 만약에 발드르가 읽은 그대로 흘러갔다면 지금 지구는 가루가 되어 차원 곳곳에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멀쩡하게 남아있으며 오히려 희망의 끈을 잡게 된 것은 오롯이 현찬의 덕분이었다.

“너도 본 거야?”

“…….”

현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라서 현찬을 괴롭힐 것만 같았다.

“이번이, 결국 마지막 분수령이겠지.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할지, 아니면 끝까지 남아서…… 평화를 이룩할지.”

운명이 가리키는 지표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냥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확실치 않은 미래라 보이지 않을 뿐. 세계가 어둠에 집어 삼켜졌다는 건 아니니까.

“크나큰 발전이야. 원래라면 필멸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이제 완전히 반반이 됐어.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너의 공이야.”

“마냥 좋아할 수 없어. 운명을 완벽히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 중도에 섰어. 그건…… 상대도 다 읽어냈겠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악신회주도 지금 상황이 완벽히 50대50인 걸 눈치챘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제 길은 두 가지로 나뉜다.

생존과 멸망.

현찬은 생존을 선택할 것이고

악신회주는 멸망을 선택할 것이다.

남은 건 둘의 결판이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정작 현찬의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현찬은 고개를 푹 숙이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면서 움켜쥐었다.

“놈들은 준비하고 있어. 나도 준비해야…….”

“현찬아.”

어딘가 달래는 말투로 부드럽게 부르는 그 목소리에 현찬은 고개를 들었다.

발드르는 빛의 신이라는 걸 증명하듯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현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너라면 잘할 거야.”

단지 그 한마디 말뿐이었는데, 현찬은 지금까지 조금씩이지만 쌓여온 모든 근심과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할 수 있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현찬은 말 한마디에 천 개의 용기를 얻었다.

그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현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큭! 크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이제 마음이 좀 놓여?”

“크흐흐! 응. 그래. 고맙다. 발드르.”

“무얼. 나는 너고. 너는 난데. 무엇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 해 주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래 맞아.”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가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니까.”

“방법을 찾았구나?”

“사실상 도박에 가깝지만 뭐…… 도전할 가치는 충분해.”

문제는 이걸 하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찌 됐든.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 나는, 여기서 너를 응원할게.”

“그거면 충분해.”

무려 빛의 신의 염원이 담긴 응원이다.

당연히 힘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려고?”

“가야지.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해.”

도움이라는 말에 발드르는 뿌듯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그래. 좋은 자세야. 무릇,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혼자서 노력하기보다는 다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니까.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너는 달라. 현찬아. 너는 할 수 있어.”

“거 참 낯 뜨겁게……. 나중에 돌아와서 말해 인마.”

현찬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성공하고 나서 보자고.”

“그래. 나중에 보자. 꼭.”

&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곧 새벽의 동이 터올 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헤르메스는 영체화 한 상태로 현찬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이미 현찬이는 자청비의 말 때문에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거야. 그냥 여기서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야. 그랬다가, 정체성에 혼란이라도 오면 현찬이 위험해져. 그렇다고 마냥 숨길 수만도 없는데…….’

한참 고민하던 그때 현찬이 눈을 떴다. 헤르메스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현찬의 곁에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악몽이라도 꿨어?]

“헤르메스…….”

[응?]

현찬은 굳은 결심을 다짐한 표정으로, 헤르메스에게 자신의 목적지를 솔직하게 말했다.

“나를…… 영령들의 세계에 데려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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