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216화 빛의 신전 (2)
_
발드르의 행방에 관한 소식은 영령들의 세계에서도 유명하다. 각 ‘신화’에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빛의 신 발드르는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의 힘, 그의 지혜, 그의 인망 중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었다.
다른 신화 속 인물들 중에서도 그의 명성을 들은 신들이 많았다. 모든 신화의 세계가 끝나고 천계로 가게 되었을 때 많은 신들이 발드르를 보기 위해서 아스가르드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발드르의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많은 신들이 의아해했다. 북유럽 신화의 신들은 모두 천계로 올라왔다. 신화 속에서 죽은 신들도 전부 되돌아왔다.
유일하게 발드르만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발드르가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려 주신인 오딘마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발드르의 존재는 서서히 잊혔고 천계에 자리 잡은 그의 신전은 주인이 없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랬던 발드르가, 설마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어차피 꿈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어차피 지금은 넘치는 게 시간이잖아?”
“말이 잘 통해서 좋네.”
현찬은 발드르에게 깊은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발드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는 그지만, 현찬에게는 특히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내가 천계에 없고 여기에 있는 건 내가 너의 몸속에 있기 때문이야. 정확히는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환생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너와 나는 개별적인 존재이기는 하지. 환생이라 하더라도, 내가 너의 몸 안쪽에 봉인된 것에 가깝지만.”
“대체 무슨 이유로 신인 네가 인간인 내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 거야?”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해. 우선 저기 바깥을 봐 주겠어?”
발드르는 손가락으로 발코니 너머를 가리켰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흩날리고 빛나는 커튼 사이로, 에메랄드빛 호수와 그 너머 숲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답지?”
“응. 그러네.”
아름다운 풍경에 별다른 감흥이나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현찬조차 감탄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정경. 누군가의 아름다운 상상력을 최대한 극대화하여 가장 현실감 있게 그린 풍경화조차, 지금 보고 있는 광경에 비교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 많아. 나도 전부 다 돌아다녀보고 그런 건 아니지만, 듣는 귀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들을 듣게 되거든.”
‘되게 멋있는 곳이 많다? 나중에 가능하면 같이 가자.’
발드르의 말에 현찬은 예전에 헤르메스가 웃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둘의 모습이 겹쳐보이자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헤르메스는 과연 이런 상황을 알고서 그때 그 이야기를 했을까?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나도 알아. 들었으니까.”
“그래. 그래서 나는 이런 세상이 좋아. 물론 아름답기만 한건 아니지. 멀지 않은 곳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심성이 악한 존재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것마저 포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법이야.”
“갑자기 세상을 향한 예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요지가 뭐야?”
“그 세상이 멸망하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
발드르의 확언에 현찬이 눈을 부릅떴다. 발드르는 황급히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당장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운명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야.”
“그럴 운명?”
“모든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대통합>은 이번이 최초는 아니야. 너도 알고 있지?”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구를 대표해서 중간 점검 과정을 보아온 현찬이기에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지구에 벌어지고 있는 <대통합>은 우주 전체로 보면 이미 수차례나 반복된 과정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세계>의 강한 의지가 깃들고 있음은 확실했다.
“많은 세계가 있었고, 많은 세계가 있지. 그러나 <대통합>이 벌어지면서 과연 사라지지 않은 곳이 있을까? 나는 지옥에 내려가면서 다른 신들이 보지 못한 바닥의 바닥, 그 아래를 보았어. 그곳에 있는 파괴와 절망을…… 확실히 느꼈지.”
“거기서 본 것이 바로…….”
“맞아. 지구의 종말. 이 세상의 종말이야. 이대로 간다면 <대통합> 과정 혹은 그 결과에서 지구라는 세계는 영영 사라지고 말아. 이 모든 풍경들과 함께 말이지.”
“단순히 멸망이 아니라는 거야?”
발드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라진다는 건 한 차원의 종말을 뜻해. 단순히 인간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지구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신화나 역사도 전부 사라지는 것이고 거기에 근간을 둔 우리 신들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것이지.”
“…….”
그 충격적인 말에도 현찬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발드르의 존재가 현찬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었다.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나는 끔찍한 미래와 운명을 보았어. 그것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인간들은 강하고 끈질기지만, 때로는 약하고 가녀려. 그런 인간들만으로는 이 세상의 미래를 짊어질 수 없겠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네가 직접 나서는 것이었구나.”
발드르는 지옥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신으로서, 모든 존재의 위에 선 격을 가진 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버려버리고 하계로 내려가 인간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한 등불이 되기 위해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현찬은 그런 발드르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그에게 동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드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빛으로 이루어진 황금빛 머리카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맞아. 그래서 난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만약에 그 이야기를 꺼내면 죽어도 보내지 않는다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할 테니까.”
“다른 신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어. 이건 오로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발드르의 말에 현찬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 이것은 현찬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야만 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직접 하계로 내려왔구나.”
“처음에는 힘들었어. 내게는 육신이 없었고 죽음은 나를 좀먹으려고 들었으니까. 여기서 자칫 잘못했으면 정말로 나는 소멸했을지도 몰랐을 정도야. 그렇게 쇠약해지는 날을 거듭하면서 나는 발견했지.”
“그게 바로 나였구나.”
“이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그 자리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어.”
발드르는 그렇게 말하더니, 난데없이 현찬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너에게는 너무나도 큰 짐을 짊어지게 해서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고 평범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지 몰라. 어떻게 보면 다 내가 자초한 일이야.”
고개를 꾸벅 숙이는 발드르를 보며 현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정의롭고 선한 이 신은, 이런 부분에서도 참 융통성이 없이 완고했다.
“됐어. 고개 들어. 오히려 나는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다고 생각해.”
그가 아니었다면, 현찬은 헤르메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각성자도 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삶을…… 지치고 힘들고 괴로운 삶을 연명해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가지게 해 준 발드르에게 고마움을 품어야 할 정도였다.
“어찌됐든 간에, 네가 왜 내 몸 안에 있는지는 이제 알겠어.”
“이해해줬구나! 고마워!”
“됐고. 일단 중요한 건 이거야. 앞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이 멸망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며? 그렇다면, 그것에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너라면 뭐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아?”
흥분했던 발드르는 현찬의 냉철한 말에 겨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응. 맞아. 하지만 솔직히 방법이나 길을 내가 제시해줄 필요는 없어. 그럴 수도 없고. 애초에, 너는 계속 잘 하고 있거든.”
“내가?”
“응. 네가 몰라서 그런 건데, 너는 이미 몇 번이고 무너질 뻔했던 세계를 지켜냈어. 그 일에 너의 의지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결국 세상은 너의 도움을 받아 활로를 열어가고 있는 거야. 거기에다가 대고 내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미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세상을 지켜,’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짐작되는 구석이 상당히 많았다.
현찬은 뭔가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이렇게 나오게 된 것도, 네가 엄청나게 잘 성장했고 다른 신들의 힘을 잘 다루게 되었기 때문이야. 여러 의미로 고마워. 내 걱정을 덜어줘서. 그리고 내 기대 이상으로 내가 바라는 일들을 잘 해줘서.”
“딱히 네가 바라서 한 건 아니야.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직접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발드르는 현찬에게는 어딘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현찬은 볼을 약간 붉히며 그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피했다. 남들에게 칭찬 받아도 별로 기쁜 감정이 들지 않았거늘, 역시 빛의 신이 건네는 칭찬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찬은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아,’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로키가 있었지.”
“로키? 아아. 그랬었지. 참.”
“왜 로키가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했는데…… 너 때문이었구나. 어쩐지. 그랬었어. 걔가 너를 애타게 찾고 있었구먼?”
“어라?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발드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현찬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발드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놈. 전혀 눈치를 못 챈 걸 보니까 딱 둔감계 주인공의 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발드르에게는 난나라는 부인이 있다는 거겠지.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 발드르 주위에는 온갖 여자들이 다 꼬였을 것이다.
“쯧쯧. 그러니까 좀 잘해.”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발드르는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며 주제를 환기했다.
“자.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야. 여전히 이 세상에는 멸망의 운명이 서려있어. 물론 현찬이 너의 덕분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방심할 수 없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비해야 해.”
“대비라…….”
현찬은 문득 최근 지구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이 지닌 공통점을 종합하자 빠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대충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할지 알 것 같네. 아무래도, 썩 걸리는 녀석들이 있거든.”
“악신회 말이지? 나도 느꼈어. 어쩌면, 이 세상의 멸망의 근원은 그 녀석들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답은 나왔네.”
현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드르는 가만히 앉아서 고개만 든 채로 현찬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제 가려고?”
“마음을 정했으면 빠르게 움직여야지. 하여튼, 만나서 즐거웠어.”
“응. 나도 그래.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서 정말로 즐거웠어.”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또 만나자.”
“응.”
현찬은 발드르의 방을 나섰다. 현찬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빛으로 이루어진 신전의 풍경이 다시 검은 물감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녹아내리는 풍경의 속에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서 발드르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또 보자. 친구.’
그는 입모양을 뻐끔거리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현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