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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215화 (215/265)

# 215

215화 빛의 신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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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자신의 안쪽에 내재한 힘을 자각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현찬도 자신의 안에 깃든 힘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자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점점 신들과의 계약 횟수를 늘려나가고, 강한 적들과 싸우며 스스로 역량을 늘렸으니 자연스레 깨닫게 된 것이다.

그건 초반에는 아주 미약한 기운이었다. 너무나도 작고 자연스러워서 곁에 있어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대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별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힘 또한 그것과 비슷했다.

이를 깨닫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최근에 꿨던 꿈 때문이었다.

‘여기는?’

눈을 감고 수면에 취한 현찬은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공간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다리에 힘을 주자 몸은 아주 가볍게 움직여졌다.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현찬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애초에 현실에서 이런 남모를 장소로 불려 나가는데, 현찬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전에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어서 바로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로키의 짓인가?”

현찬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주위 세계에 변화가 찾아왔다.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흐릿한 먹물을 잔뜩 끼얹은 것 같은 풍경이, 물에 씻겨 나가는 것처럼 녹아내렸다. 검은 그림자들은 꾸물꾸물 움직이며 형상을 이루고 색을 찾았다.

그 익숙한 광경에 현찬은 약간의 추억을 느끼면서도 어딘가 이 그림자는 로키 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림자 자체에 깃든 기운의 차이였다.

로키의 것은 사람의 눈을 현혹하고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기운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보란 듯이 당당하게 행동하며 따뜻하고 눈 부신 빛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로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현찬이 그런 의문을 품는 사이에 그림자는 점점 뚜렷하게 변하며 완전한 형상을 이루었다.

새로운 세계가 완성되면서 현찬이 느낀 것은 눈을 강하게 자극하게 만드는 빛이었다.

어둠이 가득한 공간이 갑자기 빛으로 가득 차자 현찬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긴…….”

새롭게 변한 곳은 그야말로 황금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현찬의 눈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자라난 황금성이 보였다. 그야말로 거대한 산처럼, 수천 개가 넘는 첨탑들이 솟아올라 있었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킬로미터 단위의 거대한 성. 그 주위는 푸른 숲이 있었고 성의 입구로 통하는 도개교는 무지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찬은 그 무지개다리의 위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찬은 한창 헤르메스와 지낼 때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헤르메스는 신이면서도 다양한 세계를 돌아다니며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보다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고 했다.

헤르메스는 다양한 신화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친분을 만들고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보니 현찬은 헤르메스에게 들은 것이 많았다.

‘내가 많은 신화를 돌아다녀 봤는데, 뭐 신화의 신들이 으레 그렇듯이 엄청나게 좋은 곳에서 살고 좋은 음식을 먹었거든? 아, 물론 지금 지구의 요리와 비교하면 이쪽이 훨씬 더 낫지. 그때는 뭐, 조미료를 이용한 음식이 아니고 말 그대로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거라서…… 좀 인공적인 맛이 강했거든.’

‘우리도 MSG 보면 엄청 인공적인데.’

‘아무튼! 나는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 솔직히, 거의 다 돌아다녔지. 72 악마가 사는 그런 곳이나 단테의 지옥 같은 곳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조금 엿본 정도였지만…… 뭐 그 정도면 거의 다 한 거잖아? 동양 바다의 용궁도 가봤고, 에덴도 가봤고, 발할라도 가봤지.’

현찬은 솔직히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헤르메스가 워낙 당당하게 말해서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진짜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중 내가 돌아다닌 곳에 되게 신기한 곳이 많았어. 용궁은 멋졌고 발할라는 온갖 전사들이 가득한 낙원. 에덴은 아름다웠지.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곳이 있었어.’

‘그게 어딘데?’

‘빛의 신전.’

‘빛의 신전? 처음 들어보는데.’

‘그렇겠지. 왜냐하면, 거기는 주인이 없는 곳이니까.’

주인 없이 오랫동안 버려지고 방치된 신전.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신전.

‘그게 뭐가 멋있어?’

‘글쎄 들어봐. 아무튼, 거기가 주인이 오랫동안 사라져서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었지만 원래 주인이 신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청소를 안 해도 먼지가 안 쌓이고 광이 막 나는 곳이지 않겠어?’

헤르메스는 그렇게 말하며 그때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는지 우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주인이 없는 신전이었지만, 그것은 거의 성이라고 해도 무방했지. 마치 왕관처럼 생긴 황금의 첨탑이 뾰족하게 솟은 그건 크기가 어지간한 산보다 더 컸다. 첨탑마다 길이가 수 킬로미터나 된다면 믿겠어?’

‘아니.’

‘그런데 신이 거주하는 곳은 그렇게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워. 보면 장난이 아니지. 역시 북유럽 신화 쪽 거라서 그런지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곳이 빛의 신전이었어. 빛으로 빚어진 거대한 성들과 그 성 주위에 깔린 에메랄드의 호수. 그리고 성의 입구와 이어지는 무지개다리까지.’

언젠가는 함께 그것을 구경하러 가자고, 헤르메스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헤르메스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던 풍경이, 지금 현찬이 보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빛의 신전이라니. 주인이 없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분명히 헤르메스가 말하기를 주인이 없어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신전이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이 안쪽에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무엇보다 현찬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 건, 무지개의 다리가 조금 전부터 계속 빛이 나면서 현찬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점멸하는 아름다운 빛의 향연은, 현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현찬은 거침없이 발을 놀리며 빛의 신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꿈인 만큼 현찬에게 타격할 수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전혀 적의가 느껴지지 않은 것도 컸다.

그러니 남은 것은, 이 신전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싶은 호기심뿐.

빛의 신전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도 정말로 멋지고 아름다웠지만, 거대한 성문을 지나서 안쪽에 들어오고 나니 더욱 색다르게 보였다. 이 세상의 모든 예쁘고 다양한 빛들을 전부 가져와서 장식처럼 썼는지 내부는 눈부시면서도 화려했다.

적, 청, 녹, 황, 백 등의 다양한 빛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춤을 추고 있었고 고풍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며 귀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온도도 적당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며 감미로운 꽃향기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말 그대로 유토피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현찬은 그곳을 걸으면서 전혀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곳이 꿈인 것도 한몫했지만, 만약 현실이라 하더라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비싼 돈을 들여서 좋은 집에서 살고 있지만, 이 빛의 신전과는 절대로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네.’

계속 걷던 현찬은 발걸음을 뚝 멈췄다. 자신을 안내해주던 빛의 흐름이, 여기서 끊긴 것이다. 그렇다는 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소리. 현찬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자, 거대한 황금색 빛으로 이루어진 문이 있었다.

문은 현찬이 바라보자 반짝하고 빛났다.

‘들어오라는 건가.’

대체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얼굴은 봐야겠다.

현찬은 거침없이 두 손으로 문을 밀듯이 열었다. 순간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이미 익숙해진 현찬은 가볍게 그것을 무시하며 방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문 안쪽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하고 멋진 신전에 딸린 방이라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곳이었다.

물론 빛의 신전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소박하다는 것이다. 이 자그마한 방 안쪽에는 어지간한 것들이 다 갖춰져 있었으니까.

“왔어?”

발코니로 추정되는 곳에 누군가가 그물침대에 누워서 등을 보인 채로 그렇게 말했다. 현찬이 알 수 있는 거라고는 그의 머리카락이 빛을 머금고 있는 금발이라는 것과 상당히 목소리가 좋은 남자라는 것이었다.

현찬은 방 중앙에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앉는 순간 자신의 엉덩이 감촉을 의심했다.

신의 권능으로 인해 생겨난 꿈에 오감이 생생한 것은 이미 느낀 바이지만, 현찬이 놀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이 의자, 너무나도 편안하다. 마치 현찬을 위해서 만들어진 의자처럼 그야말로 몸에 딱딱 맞게 편안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읏쌰.”

신전 주인은, 그물침대에서 내려와 방안으로 들어왔다. 현찬은 그제야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잘 생겼네.”

“고마워.”

남자는 웃으며 현찬의 맞은편에 앉았다.

현찬은 남자를 보며 그런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저자를 보고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말들이 한가득하였지만, 그것을 언어로 변화하여 입 밖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냥 잘생겼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겨서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말이다.

후광을 머금은 얼굴이 바로 저런 것이라는 걸, 현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다.

“주인이 없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있었구나?”

“헤르메스에게 들었지? 나도 다 보고 있었어.”

다 보고 있었다? 그것은 현찬과 헤르메스 다 둘이 있을 때 나눈 대화다. 다른 제삼자가 그것을 엿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현찬이 눈을 가늘게 좁히자 남자는 당황했는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아니. 내가 훔쳐보려고 그런 게 아니야. 애초에, 나는 네가 보고 듣고 느끼는 걸, 고스란히 나도 느낄 수밖에 없거든.”

“넌 도대체 누구야?”

현찬은 저 남자를 볼 때마다 자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함께 했음에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며 하나씩 뜯어보는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반갑고, 기쁘고, 행복해서…… 현찬은 스스로 감정이 제어되지 않았다.

남자는 테이블에 차 한잔을 만들며 그것을 한 모금 머금었다.

“나는 너야.”

탁. 컵을 테이블에 놓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빛의 신 발드르이기도 하지.”

발드르.

현찬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지간한 신화의 주연급 신들은 전부 다 꿰뚫고 있는 사람에게 발드르라는 이름은 절대 잊을 수 없으니까.

어쩐지 얼굴에서 빛이 난다 했더니 역시 빛의 신이었다.

“그보다 나라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리야?”

“너도 조금씩 느끼고 있지 않아? 내 기운과 너의 것이, 어딘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설마…….”

“맞아. 그 생각대로야. 나는 지금, 네 몸 안에 있어.”

“…….”

그 충격적인 말에 현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고를 유지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발드르는 기꺼이 현찬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가만히 기다렸다.

현찬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약 10분이 지난 뒤였다.

“그래. 뭐, 대충 알겠어.”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발드르는 사람 좋은, 아니 신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남은 차를 전부 들이켰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왜 너의 앞에 나타났는지 설명하기만 하면 되겠네.”

“말해 봐.”

현찬은 진지한 표정으로 발드르의 눈을 마주쳤다. 발드르는 그런 현찬의 기세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말해줄게.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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