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화 마계 협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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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의 말에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헤르메스와 아테나 그리고 구천현녀가 조용해졌다. 특히나 헤르메스는 입을 쩍 벌린 채 자청비의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경악하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현찬에게 들리지 않도록, 영령들끼리 사용하는 심언으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내 계약자에게 무슨 헛소리를…….]
[너는 가만히 있어라.]
자청비의 강렬한 기운이 담긴 언령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려던 헤르메스가 뒤로 물러났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 마주쳤고, 헤르메스는 자청비가 자신이 숨기려던 사실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자신의 계약자에게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겠지.]
뼈가 있는 자청비의 말에 헤르메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기를 쓰고 말리는 순간, 오히려 현찬이 더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헤르메스는 머리를 굴렸다. 현찬이 진실을 아는 것은 상관없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더라도 영향은 간다.
인간은, 아무리 강해도 결국 인간.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헤르메스는 그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자청비는 완고했고,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막아야 하나 싶은 순간, 안 그래도 잔뜩 벼르고 있던 아테나가 나섰다.
[너야말로 남의 계약자와 관련된 일에 멋대로 끼어들지 마라.]
[헤에? 반응을 보면 너도 모르고 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함께 지내던 사이 아니었어?]
아테나는 헤르메스를 보다가 다시 자청비와 눈을 마주쳤다.
[저 바보 같은 동생은 항상 진실을 숨기고는 하지. 하지만, 너야말로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뭣?! 아테나 너……!]
당황하는 헤르메스에게 아테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전쟁의 여신이지만 지혜의 여신이기도 하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지 마라.]
[끄응…….]
헤르메스는 앓는 소리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아테나가 지원군으로 도와준다면, 자청비의 돌발행동을 막을지도 모르니까.
[우리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남의 계약자와 관련된 일은 신경 껐으면 좋겠군.]
[내 계약자가 아니니까 신경 꺼라?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는 한번 계약을 맺었으면, 그것이 한순간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계약자라고 생각하거든? 무엇보다,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진실을 숨기는 꼬라지는 내가 못 참아.]
자청비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다.
호탕하고 과격한 면이 있지만, 올곧아서 틀린 것을 보면 참지 못한다.
그녀는 현찬이라는 인간에게 숨겨진 비밀을 숨기는 저 두 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로는 진실이 무거울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것을 바로 알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머리가 있다면 그걸 굴리는 걸 추천하지.]
[선의의 거짓보다는 무거운 진실이 더 나은 법이지. 결국에 알게 될 거라면 배신감이 들지 않도록 빨리 말해주는 게 더 나은 걸 몰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때를 맞춰 말해 줄 뿐이지.]
[와. 이거 진짜 웃긴 연놈이네. 진실은 숨겼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말 안 한 게 더 나빠.]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두 여신의 기세가 다시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구천현녀는 당황하며 둘을 말리려 들었다. 이게 적당한 신들끼리의 기 싸움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여신 중에서도 당연히 탑 티어나 되는 둘이 붙으면 그 자체만으로 재앙이다.
[잠깐. 둘이 너무 감정이 고양됐다. 조금은 진정하고…….]
구천현녀가 말리려고 해도 아테나와 자청비의 기세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이걸 어떻게 막아야지 고민하는 순간, 가만히 있던 현찬이 움직였다.
현찬은 자청비가 무슨 말을 꺼내는 듯해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귀를 기울이던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헤르메스가 나서고 아테나가 나서며 자신은 듣지 못할 자기들끼리의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걸 좀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아테나와 자청비가 서로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또 싸우는 건가. 현찬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방금도 말했지? 둘 다 싸우지 말라고.”
현찬이 나서자 아테나와 자청비는 귀신같이 기운을 거둬들였다.
“대체 둘이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또 이렇게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거야? 응? 말해 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는…….”
아테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현찬은 믿지 않았다.
대놓고 자기만 빼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 바보가 아닌 이상 현찬이 알아서는 안 되는 대화를 나눈 것은 알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섭섭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대체 뭣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싸우지만은 마. 그렇게 둘이서 계속 충돌하면, 주변 사람들도 곤란해한다고.”
현찬의 말대로 주위에 몰린 세아리스의 부하들은 다들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한기에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영체화 한 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기운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다만 자청비와 아테나의 기세는 영체라 하더라도 육신을 가진 하계의 존재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강했고, 그것이 서로 충돌했으니 당연히 주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악마 종들 말고도 다른 차원의 종족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면서 떨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아테나와 자청비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솔직히 나는 좋은 일 하려고 하는데 쟤들이 막잖아.]
자청비는 그래도 영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게 정말이냐고 현찬이 묻자 아테나와 헤르메스는 고개를 저었다. 자청비는 그 모습에 다시 울컥하려고 하고, 여러모로 참 사이가 안 좋은 신들이었다.
‘무슨 애들 싸움도 아니고.’
현찬은 자청비에게 따로 말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노여워 마세요.”
[아니. 쟤들이 너를 속이고 있다니까?]
“속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저를 걱정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 거예요. 저희는 서로 계약으로 묶인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니까, 잘 알고 있어요.”
[…….]
부드럽게 달래는 현찬의 말에 씩씩거리던 자청비도 점점 화를 가라앉혔다. 자청비는 현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의심하지 않는 진실이 담긴 올곧은 눈동자.
현찬의 태도에는, 헤르메스와 아테나를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자청비는 올곧은 사람을 좋아한다. 변해가는 21세기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 탐욕스러워졌고 욕망에 찌들었다.
이런 세상일지라도,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현찬이 그런 인물이었고, 자청비는 그런 현찬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본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여기서 더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민폐겠지.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더 뭐라고 하지 않을게.]
“선처에 감사드려요.”
[그래도, 알아둬. 나도 완벽히는 모르지만, 너에게는…….]
“숨겨진 힘이 있다고요?”
[…… 어?]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자청비에게 현찬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다 알죠. 제 몸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제가 몰라요?”
[어? 아니. 잠깐만. 이게…… 그. 전부, 알고 있었다고?]
“그럼요. 물론이죠. 뭐,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전은 아니고 최근이기는 하지만요.”
[잠깐만. 그러면 저 두 녀석은…….]
자청비가 손가락으로 헤르메스와 아테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현찬은 헤르메스와 아테나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장난스럽게 웃는 건 덤이었다.
그 광경에 자청비는 당황함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하. 이거 참. 완벽하게 한 방 먹었네.]
“저 둘에게는 비밀이에요. 뭐, 솔직히 저 생각해서 그러는 건 고맙기는 한데, 그래도 저한테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안 한 게 괘씸해서 이쪽이 숨기려고요.”
[…… 그래.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난 모르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청비는 정말로 현찬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계약의 신과 지혜의 여신을 속이는 인간 계약자라니!
물론 현찬의 본질이 인간의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 쳐도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살아왔다. 그 스스로 인간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인간이 신을 속인다.
옛날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나.’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에게 물먹은 일화들은 상당히 많다. 그것 때문에 다른 신화에서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다툼이 생기면 항상 그런 사건들을 들먹이면 놀리고는 한다. 이제 와서 매우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 쳐도 멍청한 녀석들이 당한 게 대부분이지, 영악한 녀석들까지 속여먹다니 세상 참, 모를 일이구나.’
자청비는 작게 웃으며 현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뭐, 계약자여. 네가 뭘 하든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해라. 그래도, 딱 하나 부탁할 게 있다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날 다시 불러주겠어? 먼 미래의 하계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으니까.]
“기회가 생긴다면 그러도록 하죠. 그리고 돌아가신다면 감은장아기님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킥킥.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걔는 꾸준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보고 있으니까. 그래도 전해달라고 했으니 하기는 해야지 뭐. 즐거웠다. 잘 있어.]
“네. 잘 가세요.”
자청비는 손을 크게 흔들며 그대로 사라졌다. 그녀와의 계약이 끝나자 현찬은 지금까지 사용해온 힘의 반동으로 온몸에 탈력감이 밀려왔다. 순간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지만, 옆에서 누군가 부축을 해줘서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딱 봐도 무리하고 있는 게 다 보였다.”
“세아리스…….”
현찬은 자신을 부축하며 이를 드러내며 히히 웃는 세아리스를 보고, 감동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 좀 치워 줄래? 뿔이 찔려서 아픈데.”
“…….”
“어. 세아리스? 저기요? 고개 비비지 말아줄래? 아프다니까. 악! 아니 진짜. 일부러 그러지 마!”
세아리스의 뿔 어택은 한동안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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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머지않았구나.”
그림자에 잠긴 회랑의 중앙의 옥좌. 그곳에서 악신회주는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허공을 막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 코, 입조차 보이지 않는 검은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 악신회주는 그런데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더 고차원적이고 거대한 걸 보았고, 그의 귀는 이 세계뿐만이 아닌 다른 세계의 말조차 듣고 있었다.
‘세상의 균열이,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
그 말을 삼키며 악신회주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그도 얼마나 이런 일을 해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아주 막연히 긴 세월을 이렇게 지내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지구, 그곳의 강현찬이라고 했나.’
그가 하는 행동을 하나부터 열까지 계속 방해하는 인간.
그래. 인간이다. 너무나도 나약해서 바람만 불어도 ‘후’ 하고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런 존재.
그런 인간이 악신회주의 계획을 틀어놓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상식을 넘어서지.’
그들은 약하지만, 그 약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일을 한다.
‘세계의 중심인 지구에서, 대체재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이제 곧 끝이 다가온다는 거겠지.’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대통합>.
악신회주는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겪어왔다.
“이제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