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213화 마계 협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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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전쟁이 벌어진 뒤 싸움이 끝나면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전후 처리다. 전쟁이 가져오는 파괴와 폐허의 흔적은 오랜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복구하는 데만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어간다.
“물론, 지금 상황을 보면 전혀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전쟁이 벌어졌지만, 전후 처리를 할 필요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이것은 엄연히 현실이었다.
“사망자는 전무. 부상자야 싸움의 여파를 다 피하지 못한 녀석들이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수준도 아니야. 넘어지고 굴러서 다친 게 대부분이네. 애초에 수복을 할 필요도 없는 경계마저 멀쩡할 정도니.”
세아리스는 자기가 말해놓고 이 상황이 웃긴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현찬. 너, 진짜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인간이 맞기는 해?”
“인간 맞아. 그저 강할 뿐이지.”
현찬은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렴. 현찬 정도라면 자신이 강하다고 떠들고 다녀도 주변에서 인정해 줄 정도였다.
“좀 어처구니가 없는 걸 빼면 전후 처리할 필요도 없고 이쪽도 완승이네.”
옥사비누스와 파르고잔의 군대는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서 전멸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옥사비누스가 마왕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사용한 희생의 마법이 가장 큰 피해를 낳았다.
저 악마 중에서도 나름의 생존자들이 있겠지만, 패잔병인 데다가 상처까지 입었으니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리라.
뭔가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이었던 것과는 달리 힘 빠지는 결과지만, 좋게 끝난 건 사실이었다.
“설마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어.”
세아리스는 멀리 보이는 다양한 풍경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넓은 지평선. 그 너머에 보이는 다른 마왕들의 영토의 풍경. 검은 대지와 숲이 가득한 곳이 있었고, 마그마가 흐르며 유황이 들끓는 곳도 있었다. 황톳빛 땅에 나무가 적당히 자란 땅도 있었고 푸르고 풍족한 땅도 있었다.
마계는 이렇게 여러 개의 세계로 나뉜 채로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반목과 투쟁을 반복해 온 세월만 해도 수 천 년이 넘었다. 그 세월 동안 많은 마왕이 탄생하고 죽어 나갔지만, 마계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싸움과 전쟁.
투쟁과 약탈.
세아리스는 그것이 싫어서 자신의 영토를 만들고, 힘을 키워서 적들에게 대항했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해도 좋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마계가 하나로 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두를 하나로 모으려 했었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꿈을 품으며.
그 꿈이 지금 현실이 되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마왕 간의 다툼이 이제 거의 다 끝났어.”
겔루키스, 파르고잔, 옥사비누스.
현존하는 다섯 마왕 중 무려 셋이나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아리스와 그라두크 뿐이었다.
“괜찮겠어? 아직 그라두크가 남아 있잖아.”
아무리 마왕 셋을 쓰러뜨렸다 할지라도 아직 하나가 남았다. 무엇보다 현찬은 자청비와의 계약을 통해서 서천 꽃밭을 불러내는 짓까지 벌였기 때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만약 당장 그라두크가 쳐들어온다면, 이쪽은 지친 상태에서 놈의 군단과 대적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저 신들이 힘을 합쳐서 나를 도와주기만 한다면야.’
현찬이 그런 생각으로 헤르메스와 아테나, 자청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서로 열심히 눈싸움하는 자청비와 아테나가 있었고 자시는 모르쇠 취급으로 시선을 피하며 휘파람을 부는 헤르메스가 있었다.
‘눈 깔아라.’
‘너야말로 얼굴 돌리시지?’
두 여신은 입을 열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살벌한 눈빛으로는 이미 그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듯했다. 커흠! 현찬이 일부러 소리 내서 헛기침하자 아테나와 자청비는 움찔하더니 이내 서로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와. 여기 되게 신기하네. 하. 하. 하.]
[음. 헤르메스. 있다가 집에 가서 맛있는 치킨을 먹을 생각을 하니 기쁘지 않은가.]
[아니 나는 별생각이 없…… 커흑!]
[호응해라. 한번 말했다.]
아테나의 주먹이 헤르메스의 배를 때렸지만, 현찬은 그거까지는 봐주겠다며 넘어갔다.
저 셋을 보면 지금 당장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힘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리라.
“후훗. 너무 걱정하지 마. 그라두크는 오히려, 다른 셋과는 다른 녀석이니까.”
“확신해?”
“그럼. 물론이지. 아. 지구 말로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였던가? 때마침 녀석도 움직이기 시작했네.”
“응?”
세아리스의 말 대로였다. 저 멀리, 그라두크의 영토가 있는 곳에서 검은 풍선 같은 것이 둥실둥실 뜬 채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얼핏 보면 느린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게으름뱅이 아니랄까 봐, 등장하는 것도 제일 마지막이네.”
마지막 남은 마왕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세아리스는 전혀 경계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현찬은 그녀의 태도에 무언가 있음을 깨닫고 자신도 가만히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전투태세를 취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세아리스 군단도 웅성거리기는 했지만, 호들갑 떨지는 않았다. 아직 그라두크에 관해 잘 모르는 현찬이라도, 그 마왕이 무슨 취급을 받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풍선처럼 생긴 그것, 그라두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드디어 그 자태를 드러냈다.
“그라……두크?”
“그래 맞다. 저자가 바로 마왕 그라두크다.”
[응?]
[뭐야, 진짜?]
[에이. 설마.]
현찬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다른 신들까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풍선같이 생긴 것이 마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귀여워…….”
양 리화는 그런 말까지 꺼낼 정도로, 마왕 그라두크는 현찬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멸세마왕(滅世魔王) 그라두크.
자신을 건드린 차원을 여러 개나 혼자서 멸망시켰다고 해서 붙은 이 이명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다. 그는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 어떤 마왕도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그라두크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움직인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무엇보다 생긴 것이 상상을 초월했다.
‘무슨 마왕이 찐빵처럼 생겼어?’
현찬이 생각한 그라두크는, 덩치가 한 10m는 되고 인상도 야쿠자처럼 험악한 마족을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본 그라두크는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
500원을 주고 하는 뽑기 게임에 간혹 보이고는 하는 아주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인형, 그라두크는 그것을 닮았다.
몸도 통통하고 팔다리는 아기자기하며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였고 머리 위에 자라난 5개의 뿔은 너무 아기자기해서 그게 뿔인지도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게다가 몸 곳곳에 부드러워 보이는 털이 가득 자라나 있어서 마스코트 캐릭터처럼 보였다.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마왕의 이명치고는 도저히 생긴 것이 매치가 되지 않았다.
현찬이 손가락으로 그라두크를 가리키자 세아리스는 그라두크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 오래간만이야, 그라두크. 네가 직접 영지 밖으로 혼자 나오다니, 귀한 일이네.”
“음냐. 세아리스야?”
날아오면서도 졸고 있었는지 어딘가 몽롱한 어조로 그라두크가 입을 열었다. 생긴 것과 비슷하게 목소리마저 귀여웠다. 양 리화의 눈빛이 더욱 강해졌고 다른 신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그래. 졸면서 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후아암. 귀찮은걸.”
“그렇다 쳐도, 네가 여기에 왔다는 건 너도 대충 상황을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그라두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같은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무례하다고 할 법도 한데 세아리스는 별다른 지적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두 번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소리이리라.
“그래서. 네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직접 찾아온 이유는?”
“음냐. 별거 없어. 그냥, 궁금했는걸.”
“호오. 네가 잠을 자는 것보다 호기심을 더 강하게 품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확인했어?”
“웅.”
그라두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세아리스의 옆에 있는 현찬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바라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선은 확실히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귀엽기는 하네. 현찬마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네. 인간인데, 강해.”
“물론이지. 언젠가 나의 부군이 될 남자다.”
“아니. 안 되거든?”
“될지도 모르는 남자다.”
“…….”
그라두크는 잠시 현찬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라두크. 이제 어쩔 생각이지?”
“웅? 어쩌다니?”
“뭐, 나야 너랑 딱히 악감정은 없으니 말이다. 이대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않겠어?”
그걸 그렇게 간단히 할 소리야?!
천하의 헤르메스마저도 세아리스의 무근본 무대책 행동에 경악했다. 그라두크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뭔가 고민하는 건가?’
하긴, 아무리 그렇다 쳐도 갑자기 사이좋게 지내자며 말을 꺼내는데 바로 대답을 할 마왕이 어디 있겠는가.
“zzz…….”
“자, 자고 있어.”
“공중에 뜬 채로 자고 있어.”
“저렇게 빨리 잠들 수 있는 건가?”
“자는 모습도 귀여워!”
마지막 말은 당연히 양 리화가 했다. 주변 악마 종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아리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숨을 들이켜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라두크으으으으!!”
“아. 응. 나 안 잤어.”
“…… 아무튼. 그래서 어쩔 거냐. 서로 화합을 맺을 건가?”
“그러면 뭐가 좋아?”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않고, 너는 귀찮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계속 자도 된다.”
“응. 그럴래.”
[그렇게 쉽게 승낙해도 되는 거야?!]
협상과 계약의 신인 헤르메스로서 마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약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체결되니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적어도 계약이란 서로 뭔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떠넘기고 빼앗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칼날을 서로에게 휘두르는, 뭔가 막 그렇게 응? 수 싸움도 조금 벌이면서 치열하게 해야 하는 거잖아!]
“…….”
현찬은 헤르메스가 그렇게 많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마 계약의 신으로서, 이렇게나 허접스러운 계약을 하는 모습이 보기가 참을 수 없던 것이겠지.
[안 돼! 무효야! 다시 해! 내가 주관할게! 내가 하게 해줘!]
[가만히 있어라! 헤르메스!]
결국, 보다 못한 아테나가 나타나 헤르메스를 제압했다. 헤르메스는 발버둥 쳤지만, 무력으로 아테나를 이길 수 없었기에 ‘끄응’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하하. 그러면 계약 체결이구나!”
“응. 후아암. 난 이만 자러 갈래.”
“그래. 잘 자라.”
“웅.”
그라두크는 그 말을 남기고 풍선처럼 바람을 타고 다시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다. 양 리화는 그라두크가 떠난 것이 못내 아쉬운지 계속 그라두크가 사라진 장소만 바라보았다.
세아리스는 현찬을 보며 어떠냐며 이를 보이며 웃었다.
“후훗. 이것이 바로 마왕이나 되는 자의 협상 능력이지! 대단하지 않냐?”
“…… 어, 응. 그래. 멋지네.”
뭐 어쩌겠는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그만인 것을.
현찬은 태클을 걸 생각을 포기했다.
[그런데 말이다.]
그 순간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자청비가 입을 열었다.
[계약자여. 그대, 정말로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