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212화 과학을 무시하지 마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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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회주 앞에 선 아지다하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조로아스터교에 등장하는 최강의 악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한 희대의 악룡이다.
비늘은 강철보다 단단하며 머리는 세 개나 되고, 입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사멸시키는 죽음의 숨결을 내뿜었다.
단순히 무력만 강한 게 아니다. 아지다하카는 힘만 사용하며 날뛰지 않고 두뇌마저 지혜로워 오히려 교활하게 움직였다. 세상에 나타날 때는 귀인의 모습을 가장하는 등 자신의 손을 직접 쓰지 않고도 세계의 혼란을 부추겼다.
신화 속에 나오는 용 중에서 급을 따지자면 티아매트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그런 아지다하카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이 기운은…… 전성기의 앙그라 마이뉴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군요.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인가요.’
조로아스터교 태초의 악이자 모든 선에 반대되는 절대적인 악, 앙그라 마이뉴. 그로 인해 창조된 아지다하카는 당연히 앙그라 마이뉴가 얼마나 대단한 신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를 보며 그때 느꼈던 기분을 하계에서 악신회주를 보며 또다시 느끼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대답을 부추겼다.
“왜 그러지? 아지다하카.”
“아. 죄송합니다. 일단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지다하카는 자신이 마계에서 지켜보았던 일들에 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설명했다. 옥사비누스와 파르고잔이 동맹을 맺은 것과 옥사비누스를 이용하여 죽은 마왕들을 사령술로 부활시킨 것.
그들을 이용해서 현찬을 죽이려고 한 것까지.
그리고 현찬이 서천 꽃밭을 사용해서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린 일까지 말이다.
“서천 꽃밭?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서천 꽃밭을 몰랐다고?’
악신회주의 반응에 아지다하카의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온 것에 관한 약간의 당혹감이었다.
‘회주 님의 정체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 잊힌 신화에 존재하던 고대의 악신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서천 꽃밭을 모르시다니…….’
서천 꽃밭은 악신들의 사이에서도 엄청나게 유명하다. 한 송이만 있어도 어지간한 신들의 권능에 버금가는 힘을 사용하는 무지막지한 꽃이다. 그것이 한 무더기로 있다.
동양의 신들이 세계의 균형과 조화 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꽃밭 또한 다수의 신이 동시에 관리하기에 한쪽이 멋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악용되지 않았다.
만약에 한 신이 그것을 독점하고 독한 마음만 먹는다면 세계는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당연히 서천 꽃밭은 일반적인 신들뿐만 아니라 유명한 악신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그것이 어떻게 악용되지 않을지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다.
남에 관해서 잘 신경 쓰지 않는 세트조차 관심을 가질 정도니 모르는 신들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으리라.
그런데 악신회주는 그런 서천 꽃밭의 정체에 관해서 별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역시 저분은…… 이쪽 세계의 존재가 아닌 건가.’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로써 확신이 들었다.
악신회주는 지구 출신이 아니다. 그보다 더 바깥쪽, 다른 신들조차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상관은 없겠죠. 지금은 제가 그저 믿고 따를 뿐이니.’
아지다하카는 그런 결론을 내리며 회주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회주는 한동안 무슨 고민을 하는 것 같은지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그림자를 일렁이며 아지다하카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다. 일단 지금 당장, 마계에 관련된 모든 증거는 폐기한다.”
“폐기라…?”
“어차피 놈들은 우리 정체를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네가 그 마왕을 돕기 위해 약간의 힘을 사용한 것 말고도, 정황상 충분히 의심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꼬리를 완전히 잡히는 건 좋지 않지. 마계와의 연은 확실히 끊는다. 우리가 뒤를 봐주던 녀석들이 패배한 이상, 더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혹시 더 따로 내리실 명령은 없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아직이다. 아. 그건 있겠군. 마계는 이제 끝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동맹을 약조한 여러 차원이 더 있으니까.”
“그렇죠.”
악신회는 아직 지구가 모르는 다른 차원 몇 개와 접촉하여,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해당 차원이 지닌 전력도 만만치 않지만, 그런 차원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악신회에 있어서 훌륭한 아군이 될 수 있는 곳들이었다.
“그들이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보고 있도록.”
“배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입니까?”
“이유를 말하자면 그것은 두 번째가 되겠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점은, 놈들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지구에 먼저 접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걸 감시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정보가 새 나간다면 크게 불리해질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그림자의 오른손이 손가락 하나를 더 펼쳤다.
“단순히 이익 관계에 의한 동맹이니만큼, 놈들은 언제 우리를 배신할지 모른다. 지금이야 서로 마음이 맞으니 손을 잡았지만, 과연 지구 쪽에서 더 좋은 제안을 내놓는다면 놈들이 등을 돌리지 않을까?”
“…… 확실히. 그것도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 혼자서는 약간 힘이 부치는군요.”
아무리 아지다하카라고 할지라도 그 혼자서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지다하카의 그런 걱정을 알고 있었는지 악신회주가 그 생각을 덜어주었다.
“너 혼자만의 일은 아니다.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도 비슷한 명령을 내렸으니까.”
“그렇습니까.”
“너 말고도 다른 둘이 움직일 거다. 거기에, 최근에 제물을 모아서 또 다른 악신을 불러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아지다하카는 가볍게 목례 하고 회주의 방을 벗어났다. 쿵. 문이 닫히며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소름 끼치는 기운이 차단되었다. 아지다하카는 자신이 나온 방문을 바라보며 닭살이 오른 팔뚝을 가볍게 쓸었다.
악신인 자신에게 이런 기운을 느끼게 만드는 미지의 힘.
과연 그가 따르는 회주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런 의문도 잠시, 저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회주가 말한 함께 임무를 수행할 동료이리라.
일단 세트나 야마타노오로치는 아닌, 본 적 없는 새로운 얼굴이었다.
아지다하카는 웃으며 그를 맞이해 주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지다하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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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경계>는 상당히 한산했다.
불길이 몰아치고 빙산이 떨어졌으며 죽은 자들이 부활했다. 전쟁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신화 속에 나오는 신벌에 가까운 현상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런데도 <경계>는 폐허가 되지 않고 이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서천 꽃밭>이 지닌 영험한 힘 덕분이었다.
“와. 진짜로 놀랍네. 꽃 자체가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본신 상태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세아리스는 자신이 파괴했던 흔적마저 지워진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세아리스가 힘을 잘못 주는 순간 벌어지는 참사는 그녀의 부하들이 몇 날 며칠을 개고생해야 겨우 메꾸어질 정도였다.
현찬은 그 몇 배나 되는 파괴의 현장을, 순식간에 고쳐버린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아리스 군단 중에서 고생이 심했던 몇은 현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부디 자신들의 영토에 남아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아리스가 창피하다며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음하하! 봤지? 봤지?! 내가 이런 신이야!]
자청비는 콧대가 높아져서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여신이라고 할 수 없는 호쾌한 웃음에, 현찬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청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서천 꽃밭의 힘이 대단한 거지만, 그것을 다루는 것이 자청비이기에 현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아테나보다 더한 왈가닥이 존재했다니.]
[왈가닥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냐! 나는 이래 보여도 매우 얌전하다! 저런 들소 같은 여자랑 비교하지 말아라!]
[뭐? 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아테나의 말을 들었는지 자청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여신이라면 그 기백에 눌릴 만도 했지만, 아테나는 어지간한 여신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표정을 굳히며 자청비를 노려보았다.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나?]
[하. 이거 봐라. 너 아테나 맞지?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이야기는 들었어. 너네 쪽에서 나름 한 가닥 하는 년이라며?]
‘한 가닥 하는 년…….’
여신님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언에 현찬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테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도발에 걸려서 먼저 화내는 순간 그녀의 패배다.
[흥. 그러는 너야말로, 동양 쪽에서 사내조차 감당하지 못할 왈패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바로 너였나 보군.]
[왈패? 너 지금 나보고 왈패라 그랬냐?]
[그 귀가 장식이 아니라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다만?]
[와 이거 진짜. 야. 너 오늘 그 왈패한테 죽도록 맞아 볼래? 응? 입에서 ‘언니 죄송해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맞아야 정신 차리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던가.]
두 여신의 기백이 충돌하며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낀 헤르메스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헤르메스는 헤헤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기,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너무 싸우지 말았으면…….]
[시끄럽다 헤르메스! 넌 빠져라!]
[야. 넌 남자애가 뭔 계집애처럼 생겨 가지고 참견질이야? 엉?]
[…… 네.]
헤르메스가 순식간에 쭈구리가 되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믿었던 헤르메스마저 이렇게 됐으니 현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두 분 모두 싸움을 멈춰주세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계약자인 현찬이 직접 나서자 아무리 한 성격 하는 두 여신이라고 할지라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자! 너도 들었지! 저 갑옷 입은 딱딱한 년이 날 보고 왈패라고 한 거!]
[그러는 너야말로, 꽃의 힘으로 까부는 주제에 뭔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뭐? 씨. 이게 진짜…….]
“아니 그만 싸우라니까요.”
여동생 둘 싸움 말리는 오빠가 이러할까.
현찬은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강경하게 대꾸했다.
“여기서 더 싸우면, 진짜 저도 안 봐줍니다.”
[뭐?]
[아니, 그게 무슨…….]
“일단 자청비 님. 모처럼 하계에 내려와서 힘 좀 쓰시니 좀이 쑤시던 게 가라앉아서 기쁘셨죠? 이거 나중에 또 느끼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그, 그건…….]
하계에 내려오고 싶은 신 앞에서, 현찬은 그야말로 갑의 위치에 있었다. 특히나 자청비의 경우에는 하계에 내려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지만, 그녀를 받아들일 각성자가 없어서 손가락만 빨던 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현찬은 유일하게 그녀의 쌓여가는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활로였다.
당연히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아테나. 그쪽도 마찬가지. 계속 이렇게 나오면, 앞으로 치킨 없어.”
[아, 안 된다! 계약자여! 그것만은 부디!]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알겠다…….]
아테나도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렇게 불붙은 사태가 꺼지자 마음 졸이며 구경하던 헤르메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찬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는 헤르메스의 모습에 이유 모를 화가 올랐다.
저걸 진짜.
현찬은 차오르는 한심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