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화 꽃은 칼보다 강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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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리화는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구천현녀>와 계약을 맺고 그녀의 엄격한 지도 아래에서 산 깊은 곳에 틀어박혀 수련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나름 초창기 헌터라고 할 정도였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었고 그런 그녀를 구천현녀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부모님 없이 자란 양 리화의 어머니와 스승님이 되어준 게 바로 구천현녀였다.
어느 옛날 어린 양 리화는 구천현녀에게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이 모든 영령 중에서 제일 강한가요?”
[흠. 강하다고 한다면 강하겠지.]
구천현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양 리화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제일 강한 것은 아니란다.]
“에? 스승님이 제일 강한 거 아니었어요? 스승님은 신이잖아요.”
어린 소녀에게는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신이 제일 전지전능하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양 리화에게 힘을 준 것은 구천현녀였고, 양 리화는 그녀야말로 진짜 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구천현녀는 어딘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좋게 봐주는 것은 고맙다만, 그렇다 해도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나는 물론 강한 건 맞다. 중국 계통 신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정도로 강한 것도 맞지. 그렇다 해도 나보다 강한 신은 얼마든지 있단다.]
대표적인 것이 각 신화의 주신 격인 인물들이었다.
하늘을 관장하며 천둥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제우스>.
목표를 놓치지 않는 창과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지닌 <오딘>.
뜨거운 태양 그 자체를 상징하는 <라>.
그 외에도 각 신화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들이 수두룩했다.
구천현녀는 그녀에게 신화 공부까지 시켰기 때문에 양 리화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양 리화는 이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여자 신 중에서는 스승님이 제일 센 거 맞죠?”
신 중에서 엄청나게 강한 힘을 다루는 신들은 대부분이 남신이었다. 여신들 사이에서 뛰어난 재능과 전투 능력을 지닌 신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구천현녀가 1등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양 리화의 기대는 이번에도 배신당했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내가 1등은 아니구나.]
“네에? 하, 하지만. 스승님은 세잖아요. 엄청나게 강한걸요!”
[네 말대로, 여신들 사이에서 전투력을 따진다면 나는 분명히 한 손안에 들어갈 정도겠지.]
어쩌면 탑3 안에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딱 한 명.
그녀가 절대로 넘보지 못할 여신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아테나는 나와 동등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런 나라도 넘볼 수 없는 여신이 한 명 있단다.]
“스승님이 넘보지 못하는 신이라니, 그게 대체 누구예요?”
자신이 가장 경외하는 스승님이 인정하는 여신이라니, 어딘가 아쉬움이 들면서도 호기심마저 들었다. 양 리화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구천현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곳의 신이 아니다. 정확히는 가까운 나라인 한반도의 신이지.]
“아. 알아요! 한국이죠! 그곳에도 신이 있나요?”
많은 신화를 공부한 양 리화지만 한국 신화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쪽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이 별로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양 리화의 착각이었고 구천현녀는 그것을 정정해 주었다.
[너의 기대감을 어긋나게 해서 안타깝지만, 그곳에도 신들은 있단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신이 나보다 훨씬 더 강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물론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란다. 실제로 나는 그녀의 힘을 직접 보았고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구천현녀는 그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단 한 송이의 꽃을 쥐고 적들을 쓸어버리는 그 아름답고도 위엄 넘치던 모습을.
그것이 서천 꽃밭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그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그녀 스스로 재량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소리였으니까.
[서천 꽃밭의 일부를 양도받은 한국의 여신. 자청비. 그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신일 것이다.]
구천현녀도 이견을 달지 않는 최강의 여신.
양 리화는 믿기지 않는다며, 말도 안 된다며 짧은 손을 흔들었지만 구천현녀는 언젠가 알게 될 거라며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양 리화는 어째서 구천현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다양한 색을 지닌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펼쳐졌다. 현찬을 중심으로 공간 자체를 장악하며 자라난 꽃밭은 그 자체만으로 말로 표현 못 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양 리화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영혼마저 사로잡혔다. 옆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구천현녀도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때도 그랬다. 저 꽃밭에서 뽑은 꽃 한 송이만 사용해도 어지간한 신들 이상 가는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꽃의 힘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바로 그것을 다루는 자청비 본연의 능력일 것이다.
현찬이 손에 쥔 꽃을 휘둘렀다.
그 이상 행동할 필요도 없었다. 옥사비누스는 이 꽃 한 송이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을 어지럽히는 그 바람에 양 리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에 이미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넓은 대지를 가득 뒤덮었던 언데드 군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수천이 넘는 단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어디 그뿐일까. 언데드 군단을 이끌던 옥사비누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갑주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옥사비누스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기침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한 사발씩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이럴…… 수가.”
옥사비누스는 보았다. 언데드 군단에게 파묻히기 직전에 현찬이 했던 행동을.
처음에는 비웃었다.
꽃이라니! 천상의 보검을 휘둘러도 부족할 판에 지금 한다는 게 고작 꽃을 휘두르는 거란 말인가? 수천이 넘는 언데드 군단과 꽃 한 송이. 둘 중 누가 이길 것인지는 누가 봐도 뻔했다.
‘단순한 꽃이 아니었단 말인가…….’
옥사비누스는 자신의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령술을 사용하고 죽음을 농락하며 시체를 다루던 그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을 좀먹고 있는 이 기운은 분명히 그가 거스르던 죽음이었다.
어떻게든 그것에 저항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미 육신은 점차 죽음에 좀먹히며 붕괴하고 있었다.
“오. 설마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었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옥사비누스의 시선 끝에 누군가의 발끝이 보였다. 이 목소리와 저 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쿨럭! 어떻게 인간이…… 그런 힘을…….”
그의 계산은 완벽했다. 단지 현찬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을 뿐.
여기까지 와서 패배하니 옥사비누스는 그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음에도 지고 말았다. 이 압도적인 패배에 입이 두 개여도 할 변명이 없었다.
‘그 녀석…….’
옥사비누스는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과 파르고잔을 손잡게 하고 뒤에서 현찬을 죽이게끔 도와주겠다고 말한 검은 그림자.
그의 집단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옥사비누스는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나는 그저…… 녀석의 힘을 파악하기 위한 제물이 지나지 않았구나.’
언데드를 부리며 많은 제물을 바쳐왔던 그의 최후는 똑같은 제물이었다. 큭큭. 죽음을 마주하니 이제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옥사비누스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웃기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죽음을 다루고, 죽음을 피해왔던 내가 결국에 죽음을 맞닥뜨리게 됐으니 말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반드시 죽일 수 있는 죽죽이꽃. 현찬이 옥사비누스에게 사용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하더라도 이 꽃이 지닌 힘에는 절대로 저항할 수가 없었다.
“기뻐해. 너 때문에, 나도 꽤 큰마음 먹고 사용한 거니까.”
그만큼 <서천 꽃밭>을 불러내는 건 현찬으로서도 상당한 무리를 한 행동이었다. 7대 천사를 전부 불러냈던 것보다 자청비 하나를 불러낸 것이 몸에 부담을 줬을 정도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여신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큭큭. 아쉽구나. 너무나도 아쉬워.”
옥사비누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팔과 다리는 이미 움직이지 않았고 온몸의 감각이 점점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더는 죽죽이꽃의 힘에 저항하는 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네놈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거늘……. 그게… 너무나도 아쉽구…….”
옥사비누스의 고개가 바닥으로 크게 떨구어졌다. 그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넘어갔다.
자신의 스승마저 배신하고 마왕의 자리까지 올라, 망자를 희롱하던 마왕의 최후는 더없이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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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당해버리고 말았군요.”
멀리서 모습을 숨기며 상황을 지켜보던 <아지다하카>는 감았던 눈을 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악신회주의 명령에 따라 옥사비누스를 남들 몰래 지원해주었지만, 결국 옥사비누스는 현찬을 죽이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하나가 그와 동격의 힘을 지닌 마왕이 무려 여섯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현찬은 단 일신의 힘으로 전부 쓰러뜨린 것이다.
특히나 수라멸망악심꽃을 사용했을 때는 아지다하카마저 너무 놀라서 더 멀리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는 저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서천 꽃밭. 설마 저것까지 다루다니. 이미 저 남자의 능력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하고 말았군요.”
그러나 아지다하카는 웃었다.
“상정 내입니다.”
아지다하카는 현찬이 저 정도의 힘을 내도 이미 거기까지 예측했다. 저 남자에게는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도 이해될 만하다.
‘정확히 뭘 숨기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마, 본인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고.’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헤르메스가 과연 그것을 모르고 있을까?
‘그게 어떻게 됐든, 일단 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어디까지인지 대충 확인은 끝났고…….’
아지다하카는 현찬이 지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모습을 보았다. 아지다하카는 순간 고민했다. 상대방의 힘이 빠진 이 기회를 노려서 기습을 가할 것인가. 그러나 현찬에게 다가가는 거대한 마왕의 모습을 보며 그 생각을 접었다.
현찬 혼자 있으면 모를까, 세아리스와 양 리화까지 있어서 아무리 아지다하카라 하더라도 함부로 달려들 수 없었다. 그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긴다면 더욱 최소한의 능력으로 최대 효율을 만든다.
그는 다른 악신들처럼 멍청하게 힘만 믿고 돌격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일단 물러나야겠군요.’
이 상황을 회주에게 전해줘야 했다. 아지다하카는 몸을 숨기며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구와 연결된 <문>은 그의 발걸음으로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여러 병력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지다하카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볍게 <문>을 통과한 그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인파가 모여서 떠나가질 않고 있었다. 대체 언제 현찬이 돌아오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누구는 텐트를 쳐서 숙식마저 해결하고 있었다.
그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에 아지다하카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 미소가 계속되는지 보자.
이 평화도 이제 멀지 않았다.
‘음?’
아지다하카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금 모습을 숨기고 있어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없을 터다. 그런데 지금 시선이 느껴지는 건 대체 왜일까.
아지다하카는 시선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인파가 너무 많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착각인가?’
어쩌면 우연히 이쪽을 보던 그 시선을 그가 과민하게 반응한 걸지도 몰랐다.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빨리 상황을 보고하러 가야겠다. 아지다하카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인파의 틈새 속에서, 아지다하카를 바라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한국의 S랭크 헌터 김은혁.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의 사이에 숨어있던 그는 아지다하카가 사라지자마자 무전기를 꺼냈다.
“김은혁입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아지다하카가 서 있던 장소를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말했다.
“강현찬 헌터님의 예상대로, 놈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