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209화 꽃은 칼보다 강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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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대지를 어루만졌다.
보라색으로 물든 땅은 빠르게 썩어가며 부패하고 악취를 뿜어냈다. 양 리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양 리화를 보며 옥사비누스는 소리 내서 웃었다.
“인간 계집. 부질없는 짓을 하는구나.”
옥사비누스의 모습은 상당히 많이 변했다.
악마 종들이 사용하는 고유한 권능 중 하나인 마갑을 몸에 둘렀지만, 그의 마갑은 다른 악마들과는 매우 상이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보통 악마들이 사용하는 마갑은 기본적으로 마력의 색을 띠기 때문에 매우 새까맣다. 불을 다루는 파르고잔은 붉은색이며 얼음을 다루는 글루아렌은 연푸른빛을 띤다.
그렇기에 옥사비누스의 마갑 또한 자신의 마력의 색을 고스란히 가져와 불길한 보라색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갑옷이라기보다는 제사 때 사제가 입을 법한 상당히 치수가 큰 옷가지처럼 보였다.
자색 마력이 옥사비누스의 얼굴을 뒤덮으며 해골 모양으로 변했다.
“내 능력이 무엇인지 잊었느냐?”
“기분 나쁜…… 기술.”
“나의 뛰어난 사령술을 보고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네년의 심미안을 뭐라고 해주고 싶지만, 대충 어떤 것인지는 잘 아는 것 같구나.”
옥사비누스는 해골 가면을 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경계>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알고 있겠지?”
이곳은 마왕의 무덤.
그러나 꼭 이곳에 마왕 시체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경계>는 예로부터 마계에서 모든 분쟁의 중심이자 핵이었고 그렇기에 마왕을 제외하더라도 이곳에 묻히고 썩어가는 시체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파앗!
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해골의 손아귀에, 양 리화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비단을 활짝 펼치며 활공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나비 같았다.
옥사비누스와 거리를 상당히 벌린 그녀는 지면에 착지했다. 옥사비누스 주위로 땅이 헤집어지며 썩다 만 시체들이 와르르 일어나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묻혀있는 이곳은 나의 권역.”
옥사비누스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그의 스산한 목소리는 한기를 머금으며 온도를 빠르게 낮췄다. 양 리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계속 땅을 뚫고 해골 병사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숫자는 이미 1천을 넘어서서 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많아지고 있었다.
“오너라 인간이여. 마왕에게 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깨닫게 해주마.”
그의 명령을 받든 해골 병사들이 양 리화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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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이 망할 영감탱이!”
세아리스는 잡을 만하면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는 율리그란데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율리그란데는 그녀가 화를 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이며 주문을 읊었다.
모든 마법의 지배자이자, 천 개가 넘는 마법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마왕 율리그란데.
오직 마법 하나만으로 마왕의 자리까지 올라가 역대 마왕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킨 것이 바로 그였다.
세아리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천력을 다해서 그와 거리를 좁혀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율리그란데는 그녀와 상성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아무리 거리를 좁히더라도 순식간에 멀어지고, 거기에 더해서 다중 영창으로 발동한 마법이 세아리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도 그랬다.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검은 사슬이 그녀의 몸을 속박하고 얼음이 얼어붙으며 발목을 붙잡았으며,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거대한 물 폭탄이 그녀의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가해지는 다양한 공격을, 세아리스는 그 강력한 육체로 때우며 불도저처럼 전진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불리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깎여나가는 것은 이쪽이었다. 율리그란데의 마력이 먼저 다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을 다루는 마왕답게 끝이 없는 마력으로도 유명했었으니까.
마왕 대부분의 소문이 실제보다 더 약하게 퍼진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 이상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바다처럼 흘러넘치는 마력이 바닥나는 것보다 세아리스가 지쳐서 먼저 쓰러질 것이다.
‘뭔가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일이 일어나야 할 텐데.’
세아리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왕과 싸움에서 무언가 천운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건 아무리 그래도 날로 먹겠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세아리스는 지금 그만큼 절실하기도 했다.
“응?”
그런데 놀랍게도
그 천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도 지금.
“뭐, 뭐야?”
멀리서 느껴지는 엄청난 힘의 기운. 엄청나게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세아리스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은 마치 거대한 짐승 같았다. 하늘과 땅마저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 이빨을 들이밀며 세계를 물어뜯는 착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나마 느껴졌던 마왕들의 기척이 일순 사라졌다.
율리그란데도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죽어서 부활한 그에게 이성과 감정은 남지 않았을 텐데도 율리그란데는 세아리스에게 눈을 떼고 말았다.
그것은 육신 깊은 곳에 박혀 있는 본능이 반사적으로 발동한 것이었다.
그것을 잘 모르는 세아리스라도 일단 지금이 기회인 것은 알았다.
‘지금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세아리스는 지면을 박차고 율리그란데를 향해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율리그란데는 황급히 방어막을 펼치며 막아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어!”
유일하게 건틀릿이 씌워진 그녀의 주먹이 호쾌하게 방어막을 깨부쉈고,
그대로 율리그란데의 육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율리그란데의 소멸을 확인한 세아리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먼 곳에서 일어난 상황에 호기심을 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쉽게도 그녀의 큰 키로도, 저 멀리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너무나도 뿌연 안개가 있어 시야가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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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양 리화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쓰러지려는 몸을 다잡았다. 그녀는 손에 쥔 검을 놓치지 않고 옥사비누스를 겨누었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는 온갖 해골의 부산물들이 널려 있었다.
옥사비누스는 그녀를 보며 탄식했다.
“건방진 인간이라고 생각했거늘. 아무래도 생각을 고쳐먹어야겠구나. 끈질기다. 너무나도 끈질겨.”
양 리화는 처음에는 기세 좋게 싸웠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의 힘은 명백히 한계가 있는 반면에 옥사비누스의 군대는 끝이 없었다.
죽음과 시체가 가득한 이 땅에서 옥사비누스는 원하는 만큼 시체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거기에 제약을 받는 일도 없었다.
“내가 상처를 입어서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자만했는가?”
“하아…… 하아…….”
쯧쯧. 옥사비누스는 양 리화에게 안타깝다며 혀를 찼다.
그가 상처를 입었고,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서 전성기 힘의 일부를 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양 리화는 그 점을 노렸고, 확실히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마계라는 점이었다.
“그 날 지구에서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나 또한 힘을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살아가는 땅. 이곳에서의 나는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내 힘에 제약을 받지 않지.”
무엇보다 환경의 요소가 옥사비누스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구 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옥사비누스는 지금이 훨씬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오히려 여기까지 버틴 양 리화가 더 대단할 정도였다.
“희망이 꺾인 것인가. 이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구나.”
“원래…… 말 잘 안 해…….”
양 리화는 숨을 고르면서 겨우 그런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애초에 내 목적은 당신을 이기는 게 아니야.”
“뭐?”
옥사비누스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죽기 살기로 덤빈 주제에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으란 말인가.
양 리화는 씨익 웃었다. 체력이 소진되고 지쳤지만, 그 얼굴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잊었어? 아까 전의 싸움도, 지금의 싸움도. 내 목적은…… 오직 시간을 끄는 것뿐이야.”
그가 오기까지 말이지.
“그건 무슨…….”
그럴 리가 없다. 거짓말이고 속임수다. 저 말에 놀아나는 사이에 분명히 체력을 회복할 생각이겠지. 옥사비누스는 그 틈마저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속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
그는 해골 가면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경악의 감정을 품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힘이 어느 정도나마 연결되었던 마왕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설마 전부 당했단 말인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율리그란데는 세아리스를, 글루아렌은 파르고잔을 상대했다면 나머지 여섯 마왕은 현찬을 마크했을 것이다.
현찬이 강한 건 알고 있다. 지구에서 마왕 셋이 덤벼서 이기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마왕이 무려 여섯이다. 심지어 이곳은 마계라 역으로 현찬이 자신의 힘을 다 사용하지 못하게 제약을 받았다.
상황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옥사비누스는 확실한 승리를 계산했다.
그래서 자신의 군단을 희생시키면서 파르고잔의 군단마저 제물로 삼으며 마왕들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반드시 승리를 장담하고 보냈던 마왕 여섯이 동시에 죽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면서도 간단했다.
현찬이 이겼다는 것을.
경악하는 옥사비누스의 귓가에 양 리화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당신은…… 그를 잘 몰라. 그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상상을 잘 뛰어넘는지.
“겨우…… 한 방 먹일 수 있었네. 아쉬워.”
“…… 건방진 인간. 정녕 나를 화나게 만드는구나.”
옥사비누스는 다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계집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처참하게 능욕하듯이 죽이고 그 시체를 이용해 영혼을 붙잡아두고 평생을 자신의 종으로 고통스럽게 살게 만들겠다고.
“감사하고 찬미해라. 나 옥사비누스는 인간의 시체를 다루지 않으니. 그 마음을 어기게 만드는 네년의 가치는 그래도 썩 쓸만했다.”
“그래? 내가 생각한 너의 마왕들도 뭐 썩 쓸만했는데.”
대답이 돌아온 것은 양 리화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의 출처는 옥사비누스의 머리 위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은 현찬이 허공에 떠 있었다.
도저히 여섯 마왕과 싸움을 치르고 온 사람의 행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왜? 놀랐어? 내가 이렇게 버젓이 돌아왔다는 것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옥사비누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일개 인간이 마왕을 상대로 저렇게 멀쩡하게 돌아올 수 있었단 말인가. 설마 파르고잔을 이용한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파르고잔이라 할지라도 저 마왕들을 다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왜? 궁금해? 내가 무슨 꼼수라도 부렸을까 봐?”
“…….”
옥사비누스의 시선에는 여전히 불신이 서려 있었고 현찬은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보여줄게. 내가 과연 꼼수로 너를 엿 먹였는지 아니면 정말로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했는지.”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꽃 한 송이를 꺼내 쥐었다. 그런 현찬을 중심으로 허공에 꽃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양 리화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을 내뱉었고 옥사비누스는 눈을 부릅떴다.
“오늘부로, 너는 여기서 끝이다.”
“웃기는 소리!”
옥사비누스의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해골 군단이 현찬을 향해 날아올랐다. 수천이 넘는 언데드가 현찬과 꽃밭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고.
“잘 가.”
현찬은 꽃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