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208화 자청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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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고잔은 현찬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그를 노리는 글루아렌이 바로 코앞에 있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그것은 파르고잔의 생존본능이 직결된 일이었다.
현찬에게서 눈을 돌리면,
죽는다.
그것은 글루아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받은 명령은 그저 원하는 만큼 마음껏 날뛰는 것이었다. 한 줌 남은 자아와 그것의 수천 배 이상 되는 증오심으로 파르고잔을 노리려던 그녀 또한, 현찬의 위험함을 깨닫고 마력을 일으켰다.
뜨거운 화염과 차가운 얼음이 양쪽에서 현찬을 강하게 위협했다.
얼음과 불의 조화.
적과 청으로 물들어가는 세상을 보며 현찬은 웃었다.
‘여신님. 살살?’
[엉. 너무 세게 가면 재미없잖아.]
자청비는 지금 이 순간순간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모처럼의 하계인데, 여기서 빠르게 끝내고 그 지루한 곳으로 돌아갈 것 같아?]
‘여신님이 뜻이 그러시다면야.’
현찬은 자청비의 권능을 빌려 손에 또 다른 꽃 한 송이를 쥐었다. 그것을 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리듬을 타며 흔들었다.
세상의 종말이 온 것 같은 풍경 앞에서 하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빈약했다. 숟가락 하나로 바다를 푼다고 해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거대한 바람이 현찬과 서천 꽃밭을 중심으로 강하게 휘몰아쳤다.
돌풍은 순식간에 바깥쪽으로 타고 나가며 글루아렌의 얼음을 갈아버렸고 파르고잔의 불꽃을 꺼버렸다.
두 마왕의 진심이 담긴 공격이 꽃 한 송이에 꺾이는 순간이었다.
실로 기적 같은 광경에 파르고잔은 지금 상황이 정말로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 꽃밭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신의 힘이 깃든 화원은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2번이다. 무려 2번이나 그의 공격을 꽃 한 송이로 막았다. 심지어 2번째 공격은 글루아렌까지 합세한 것이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하다.’
파르고잔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옥의 유황불조차 그의 몸에 땀을 내지 못하게 했지만, 현찬이 보여주는 가공할 정도로 두려운 무위는 그에게 난생처음으로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두렵다.’
파르고잔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두렵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마왕이 되고 마계에서 최강의 자리에 군림하면서 싸움 다운 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그를 위협할 존재도,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파르고잔은 싸움을 원했고 그래서 <대통합>이 일어난 이후로는 다른 세계로 눈독 들였다. 그곳에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고 다양한 강자들이 있었다. 파르고잔은 그들과 싸웠다.
자신의 공허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그러나 그와 제대로 대적할 자들은 없었고, 파르고잔의 군단은 그렇게 여러 개의 차원을 멸망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르고잔은 자신이 그토록 찾던 가장 강한 자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찬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찬은 강하다. 그와 대적할 수준을 넘어서서, 오히려 파르고잔의 목숨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삶의 마지막 종착역일지도 몰랐다.
뜨거운 불꽃처럼 타오르며, 닿는 것은 뭐든지 태워버렸던 그의 장렬한 최후일 것이다.
파르고잔은 웃었다.
무섭다. 미치도록 무섭다.
그래서 뭐?
그것이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아아. 좋아.”
지금까지 모든 것을 실컷 태워왔다.
그렇다면 이제 이쪽이 불에 탈 차례인가.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지 뭐.
그러니.
“재도 남기지 말고, 어디 시원하게 타보자.”
그는 염옥마왕(炎獄魔王) 파르고잔.
마계의 다섯 군주 중 하나이자 수많은 차원을 멸망한 군단의 지도자.
그런 존재의 최후란 자고로 무엇보다 화려하고 장렬해야 하는 것.
“크하하하하하!!”
파르고잔은 불을 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피부와 근육, 살이 전부 다 불꽃으로 변했다. 악마 종의 육신을 버리고서 지옥의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옥염의 정수 그 자체로 변모한 것이다.
이 힘을 사용하는 순간 그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파르고잔의 가공할 마력과 투기 그리고 의지를 읽어낸 자청비는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오. 마냥 날뛰는 망아지 같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꽤 호탕한 면모도 있는구나.]
자청비의 마음속에서 파르고잔을 향한 평가가 상당히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좋다.]
원래라면 자청비는 파르고잔을 그야말로 가지고 놀면서 자근자근 밟아 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관리하는 꽃밭을 고작 저따위 불꽃으로 전부 태운다는 망나니에게는 그에 합당한 벌을 내려야 했으니까.
그 생각은 바꿨다.
싸움을 바란다면. 그토록 원한다면 그 바람을 이루어 주기로 했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여신이었으니까.
[계약자. 쟤는 진심으로 쓰러뜨려 줘.]
“아. 힘 너무 쓰면 이 상태 오래 유지 못 해요.”
[네가 알아서 적당히 조절해.]
“…….”
참 막무가내 여신님이다. 하는 행동을 보면 아테나가 얌전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뭐 그래도 여신님의 명령이니, 따라야죠.”
현찬은 또 다른 꽃 한 송이를 쥐고서 자신을 향해 불로 변해 돌진해오는 파르고잔과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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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모두 피해라! 어서!”
“휩쓸리는 놈들은 전부 죽는다! 어서 도망쳐!”
세아리스 군단은 처음 싸움을 시작하기 전의 투기는 온데간데없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경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경계>의 중심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폭풍은 닿기만 해도 쓸려나갈 테니까.
“이건 대체 무슨 일인지…….”
세아리스의 부관인 글루아스는 충분히 그곳에서 안전거리를 유지했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청량감이 <경계>의 중심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딘가 보기만 해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기운이었지만, 그것이 내포한 힘은 자연재해 그 이상 가는 것이었다.
‘마왕 님께서는 우선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대피하라고 하셨지.’
마왕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경계>로 뛰어가 돕고 싶었지만, 이성은 그것을 말리고 있었다.
글루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더 멀리 물러난다! 빨리 움직여!”
파르고잔과 옥사비누스 군단은 후퇴가 늦어서 거의 휩쓸려 나갔다. 그 꼴을 멀리서지만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글루아스는 여전히 불안했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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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마왕들을 모두 보낸 옥사비누스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바탕 싸움을 벌인 양 리화는 싸늘한 시선으로 옥사비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살기에 옥사비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계집. 끝까지 날 쫓아온 건가.”
“그때의 복수…… 잊지 않았어.”
“그때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것에 감사히 여기며 평생을 조용히 지냈어야 할 것을.”
양 리화는 대답 대신 손에 쥔 검을 옥사비누스를 향해 겨누었다.
옥사비누스는 ‘허’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조금 전에 그가 싸움을 피하려고 했던 것은 마왕들을 제 때에 부활시키기 위함이었지 그녀를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금, 옥사비누스는 더 거리낄 게 없었다.
부활시킨 마왕들은 이미 전부 <경계>로 보낸 상태이니 여기서는 그가 직접 손을 쓸 차례였다.
“좋다.”
옥사비누스의 점잖았던 목소리가 점점 스산하게 변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내 직접 상대해주마.”
하아.
옥사비누스가 내뿜는 숨결에 허공에 서리가 맺혔다. 그 가공할 냉기는 동토의 마왕인 글루아렌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옥사비누스의 주위로 해골 모양 원혼이 소용돌이치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네년의 그 어리석음을 탓해라.”
“탓하지 않아. 여기서 이기는 건…… 나니까.”
양 리화는 그렇게 말하며 신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서양 신화, 전쟁의 여신에 <아테나>가 있다면
동양에는 <구천현녀>가 있다.
예전과 다르게 확실히 강해진 양 리화는, 그때와 같은 처참한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너 따위에게 지지 않아.”
그리고 현찬 또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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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꽃밭의 바깥 경계선에 서서 고개를 숙여 바닥에 쓰러진 파르고잔을 내려다보았다. 파르고잔은 반신이 날아간 상태로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육신을 버리고 한계를 넘어서서 불꽃 그 자체가 되었지만, 결국 파르고잔은 패배하고 말았다.
“크흡! 큽! 푸하하하하하! 쿨럭! 쿨럭! 크하하하!”
파르고잔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졌다. 완벽하게 졌어. 내 생명을 바쳐 가면서까지 싸웠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질 줄이야.”
파르고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모든 힘을 쥐어 짜내서 눈앞의 벽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 보기 좋게 박살 나고 말았다.
거기에 이견은 없었다. 불만도 없었고.
“적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고맙다.”
“…… 여신님의 자비가 있었을 뿐이야.”
“그래. 그 여신님께도 고맙다고 전해줘라.”
파르고잔은 그 말을 끝으로 격한 기침을 내뱉었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뜨거운 불씨가 그의 입에서 폭죽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미 모든 것이 불꽃으로 변한 파르고잔은, 더 자신의 육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래도 죽기 전에 소원은 한 번 성취했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서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싸우는 것.
파르고잔은 조금 전의 싸움에서 그것을 절실히 느꼈다.
“젠장.”
파르고잔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눈동자를 굴려 현찬을 바라보았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와 다르게 현찬의 몸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더럽게 강하잖아.”
그래도 뭐.
썩 즐거운 싸움이었다.
파르고잔은 그 말을 끝으로 온몸이 불씨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허공에 흩날리는 불씨는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점점 <경계>에 녹아들었다.
<경계>는 모든 마계의 싸움이 벌어지는 근원이면서도
마왕들의 무덤이다.
파르고잔은 결국 이곳에서 그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했다.
현찬은 허공에 흩어지는 불씨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꽃밭 주위로 여러 개의 기척이 도착한 뒤였다.
“동료의 복수…… 는 아니고. 옥사비누스가 부활시킨 마왕들인가.”
글루아렌은 조금 전의 공격에서 파르고잔과 함께 휩쓸리며 소멸했다. 이제 남은 마왕은 총 일곱. 그중 하나는 세아리스와 싸우고 있으니 이곳에 남은 여섯의 마왕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마왕이 무려 여섯이라니.”
심지어 힘을 제약받는 것도 아니었다. 죽었다가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막대한 마력과 제물의 영향 때문에 전성기의 힘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마왕 하나가 어지간한 차원 하나를 멸망시키는 걸 생각하면, 이 자리에 있는 여섯 마왕의 존재는 그야말로 오버 밸런스 그 자체였다.
“이 정도는 돼야 싸워볼 만하지.”
[암! 물론이고말고.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으면 재미없잖아!]
현찬은 무려 <서천 꽃밭>을 불러냈다.
실제 신화에 존재하는 그것의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그래도 <서천 꽃밭>이다.
이쪽에서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상대가 너무 약하게 나오면 재미없지 않은가.
마왕 여섯은 썩 좋은 전투 상대였다.
“자. 이제 봐주는 것 없이 이쪽도 전력으로 상대한다?”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수라멸망악심꽃’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