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화 자청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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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는 이글거리는 눈길로 현찬을 노려보는 파르고잔을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계약자. 쟤는 내가 하는 말을 못 듣지?]
“그렇죠.”
[그러면 저 녀석에게 전해 주겠어?]
무력으로 치면 한국 신화의 여신 중 최고가 부탁하는데 어떤 계약자가 거절할까.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청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현찬은 그것을 고스란히 파르고잔에게 전해주었다.
“야. 거기 불타는 뿔 머리.”
“부, 불타는 뿔 머리?”
갑자기 바뀐 칭호에 파르고잔은 당황했다. 마왕 자리에 올라오면서 그는 이제껏 이렇게 멸시적인 호칭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체 그 누가 마왕에게 겁 없이 그런 말을 꺼내겠는가.
하지만 현찬은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그래 너. 네가 불 좀 뜨겁게 다룰 줄 안다고 좀 까부는 것 같은데…… 너 그러다 진짜 네가 태워야 할 꽃으로 죽도록 처맞는 수가 있다. 아니, 진짜 꽃으로 죽을 수 있어. 자비로운 내가 이번 한 번 기회를 줄 테니까 방금 했던 말을 철회하고 고개 숙여 사과해라. 그러면 봐줄게.”
“뭐?”
“…… 라고 여신님께서 전해달라고 하더군.”
현찬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청비가 한 말을 파르고잔에게 전했다. 그걸 전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여신님은 진짜 성격이 장난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대체 이게 봐준다는 건지 제발 덤벼달라고 도발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과, 과연 듣던 대로 괄괄한 성격이네.]
[그, 그 말 그대로다. 천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유가 있었군.]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영체 상태인데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자청비는 악신이 아닌 신 중에서도, 성격이 지랄 맞기로 아주 유명했다.
올림포스의 유명한 망나니 신 아레스마저 그녀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설설 길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파르고잔은 당연히 자청비의 도발에 분노했다.
“네놈이 강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오만함에는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야 한다. 그 꽃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이미 짐작했다만 과연 내 불꽃을 정말로 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화륵!
파르고잔의 몸 주위로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붉은빛을 띠던 그것은 점점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화염은 바깥으로 퍼지지 않고 오히려 파르고잔의 몸에 꽉 달라붙었다.
압축된 화염은 파르고잔의 갑옷이 되었다.
파르고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부시게 붉은 화염으로 타오르는 한 인형이 그곳에 서 있을 뿐.
파르고잔이 오른손 주먹을 쥐자 가공할 열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열기를 동반한 열풍은 순식간에 <경계> 지역을 강하게 훑고 지나갔다. 열풍이 지나간 자리의 풀들이 모두 새까만 잿더미로 변했다.
“으악! 피해라!”
“모두 물러나!”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던 세아리스 군단은 열풍을 피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저것에 휘말리면 어지간한 악마 종마저 끔찍하게 타죽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현찬은 뜨거운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파르고잔 주위 지반이 점점 흐물거리더니 이내 녹아내리며 뜨거운 점액처럼 변했다. 단단했던 맨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서 마그마로 변했다. 파르고잔은 그 마그마의 웅덩이 중심에 서 있었다.
놀랍게도 서천 꽃밭은 여전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꽃밭의 주위는 시뻘건 마그마로 가득했지만, 현찬은 그 밭의 중심에 서서 평온한 표정으로 파르고잔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그 여유를 유지하겠다 이거냐!”
현찬의 여유는 파르고잔의 분노의 불씨가 되었다. 파르고잔은 오기가 생겼다. 저 범상치 않은 꽃밭을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던 신의 화원을, 자신이 마음껏 짓밟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거기에서 오는 정복감과 쾌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테니까.
분노와 욕망의 합이 맞아떨어졌다.
파르고잔의 화염이 기세를 더했다.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짐승의 형태로 변했다. 그 수는 물경 1천이 넘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강철조차 한순간에 쇳물로 만들어버릴 위력을 지닌 짐승이 무려 1천 마리.
그 짐승들이 전부 현찬과 서천 꽃밭을 노리고 허공을 질주하며 내달렸다.
현찬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염의 짐승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자신을 짓누르기 위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뜨거운 열기로 세상이 휘어지고 어지러이 흩어졌다.
공간마저 뒤트는 열기에 현찬은 자신의 육신마저 뒤틀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현찬은 가만히 있었다.
“끝까지 반항하지 않겠다는 거냐!”
파르고잔은 기세를 더욱 실어서 꽃밭 전체에 일격을 가했다. 무시무시한 화염 폭풍이 몰아쳤다. 지면은 녹아내려서 마그마로 변했고 공기는 순식간에 연소했다. 바깥의 공기가 안쪽으로 밀려들어 왔지만, 그마저도 다시 빠르게 연소하는 것을 반복했다.
화염을 중심으로 바깥에서 강한 바람이 몰려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었다. 그 피처럼 붉은 불꽃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닿는 것은 뭐든지 태우고 녹이고 갈아버렸다.
됐다.
파르고잔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과하다 싶을 정도의 공격을 때려 박았다. 저것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설사 동급의 마왕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버틸 수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시체가 남기는커녕, 세포의 한 조각조차 전부 소멸했을 터다.
오랜만에 피를 들끓게 만드는 상대라 조금 더 싸우고 싶었지만…….
“뭐야. 별거 아니잖아.”
“뭐?”
화염 속에서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는 그 대사는 파르고잔의 귀를 제대로 꿰뚫고 뇌리에 박혔다.
“이게 무슨…….”
그의 마력 운용에도 불구하고 화염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수만 개의 조각으로 찢어져 허공에 흩어졌다.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고 몰아치던 폭풍이 그치며 일대에 평온이 찾아왔다.
그 중심에서 현찬은 여전히 멀쩡한 꽃밭의 위에 서 있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자 파르고잔은 당황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공격을 가했는데도 저 꽃밭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꽃밭에 있는 꽃 한 송이조차 불에 그슬린 자국도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거대한 산림조차 수초면 잿더미로 만드는 그의 불길이 고작 저런 자그마한 화원 하나를 태우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이…….”
인지를 넘어서는 상황에 파르고잔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머리를 팽팽 돌렸다. 범상치 않은 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수준이 그의 상상을 넘어섰다. 여기서는 물러서거나, 아니면 마음을 다한 일격을 날려야만 했다.
파르고잔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미 물러서기엔 너무나도 먼 길을 왔거니와, 애초에 파르고잔은 싸움에서 등을 돌리고 벗어나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파르고잔이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하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가 햇빛을 가렸고, 주변의 기온이 순간 10도 가까이 내려간 것만 같았다.
뭐지? 파르고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현찬도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서, 지름 10km에 가까운 거대한 얼음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그냥 얼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운석처럼 거대한 그것은 남극해에 떠다니는 거대한 빙산을 그대로 가져온 것만 같았다.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세아리스 군단은 경악했다.
파르고잔은 분노를 터뜨렸다.
“글루아렌! 이미 죽어버린 년이 감히 내 싸움을 방해하겠다는 것이냐!”
파르고잔은 지금 떨어지고 있는 빙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가 본격적으로 마왕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바로 저 동토의 마녀를 쓰러뜨리고 난 뒤였는데.
파르고잔은 ‘칫’ 하고 혀를 찼다.
화나지만 저것을 막을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너무 저쪽에 신경 쓴 나머지, 저만한 얼음을 준비하는 데도 눈치채는 것이 늦었어.’
흐름은 글루아렌이 먼저 잡았다. 저만한 공격을 막아 내려면 준비가 필요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파르고잔은 우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꽃을 압축하며 몸 주위에 망토처럼 둘렀다.
현찬은 가만히 서서 떨어져 내리는 빙산을 바라보았다.
“불에 이어서 이젠 얼음인가.”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구나.]
자청비 또한 그런 마왕들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콰아아앙!
거대한 얼음이 떨어져 내리며 산산 조각났다. 수억 개의 조각으로 갈라진 얼음들은 지면에 박혔고 가공할만한 냉기로 땅을 얼려버렸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녹아내리던 대지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버렸다.
“글루아렌? 설마……!”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아리스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한 초로의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달린 뿔은 작고 조잡해 보였지만 분명히 다섯 개였다. 세아리스는 그를 알고 있었다.
“…… 옥사비누스 이 녀석. 결국, 자신을 키워준 스승마저 부활시킨 건가. 대체 얼마나 더 부활시킨 거야.”
율리그란데는 세아리스를 보자마자 바로 주문을 읊었다.
세아리스도 지면을 박차고 율리그란데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법사 계열인 율리그란데는 모든 마법을 지배하는 마왕이다. 겉모습은 노인이고 실제로도 육체적인 힘은 약하지만, 그가 다루는 마력과 마법은 같은 마왕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시간을 끌면 이쪽이 불리하다!’
세아리스의 주먹과 율리그란데의 방어 마법이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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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이 짜릿한 냉기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거로군.”
뜨거운 화염으로 몸을 보호한 파르고잔은 그 거대한 빙산의 충돌 속에서도 무사했다. 최대한 화염을 압축했기 때문에 얼음은 파르고잔의 육신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파르고잔은 이제 사방이 빙판으로 변해버린 곳을 보며 혀를 찼다.
동토의 마녀라는 허명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죽고 나서 부활했음에도 그녀는 이 주변 일대를 그야말로 얼음으로 가득한 필드로 만들었다. 파르고잔은 옛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 또한 그녀와 싸울 때 죽을 뻔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었다.
결국에는 승리했지만, 그때의 전투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써늘해지고는 했다. 파르고잔은 상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파르고잔의 앞에 글루아렌이 내려섰다.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파르고잔을 직시했다. 그 행동에 자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파르고잔을 향한 증오는 확실히 서려 있었다.
파르고잔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날 미워하는 건 알아. 그렇다 해도…… 내 싸움을 방해하는 건 아무리 죽은 녀석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지.”
이번에는 부활하지 못하도록 뼛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다 태워버려 주마.
화륵!
파르고잔 주위로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다. 글루아렌 또한 냉기를 일으키며 열기에 저항했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며 두 마왕이 격돌하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그 둘은 잊고 있었다.
이 장소에 둘 말고도 누가 있다는 걸.
“너희들…… 이렇게 크게 한 번씩 먹여놓고 이제 서로 한눈을 파는 거냐?”
파르고잔은 몸을 움찔 떨었다. 분명히 평범한 목소리에 평범한 말투인데 파르고잔은 거기서 모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글루아렌도 현찬의 기세에 눌려 파르고잔에게서 시선을 떼 현찬에게로 옮겼다.
그곳에서 현찬은 여전히 꽃밭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글루아렌이 사용한 거대한 빙산의 낙하도 서천 꽃밭의 터럭만큼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제 내 차례지? 그래야 공정하잖아.”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한 송이의 꽃을 쥐고 그것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 세상이 지워졌다.
아니, 정확히는 얼음으로 가득 뒤덮였던 <경계> 지역이 처음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 이럴 수가.”
마왕의 인지를 초월하는 꽃의 능력에 파르고잔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현찬은 그런 마왕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아직 내 차례 안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