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205화 전쟁 속에 피는 꽃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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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왕(深魔王) 겔루키스.
한때 마계의 다섯 지배자 중 하나면서 강력한 마력과 튼튼한 육체로 모든 적을 때려 부수는 거로 유명했다.
욕심이 많고 단순한 성격이지만, 전투에 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으며 그것이 지닌 힘과 맞물려 큰 상승효과를 냈다.
같은 마왕조차 제대로 타격을 주기 힘든 단단한 갑옷은 모든 악마 종이 사용하는 흑마갑주(黑魔甲冑)의 원류였다.
마계에서 온전히 자신의 권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겔루키스의 흑마갑주는 같은 마왕이라 하더라도 부수는 게 쉽지 않았다.
“크와아아아아!”
검은 갑옷으로 온몸을 무장한 겔루키스가 세아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숨길 수 없는 우람한 근육은 두껍고 튼튼한 갑옷으로 잔뜩 뒤덮였고 투구에서는 붉은 안광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겔루키스에게 이성은 없었다.
그는 그저 자기 육신의 주인인 옥사비누스를 믿고 따르는 노예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 세아리스는 분노를 터뜨렸다.
“옥사비누스 이 자식!”
세아리스는 옛날부터 겔루키스와 승부를 보고 싶어 했었다. 근접전으로, 그것도 무투파로 싸우는 둘은 서로 싸우는 방식이 비슷했고 거기에 서로 호승심을 보였다.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대방을 인정하고는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녀석과 만족할 만한 싸움을 하고 싶었다.
“이런 결과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지금의 겔루키스는 그저 그의 육신을 지닌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었다. 겔루키스를 그렇게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세아리스는 그래도 그를 인정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너를 죽여주마.”
세아리스는 마력을 일으켰다. 뚜렷한 형상을 갖추지 못한 그녀의 검은 마력은 그녀의 의지를 따라 점점 선명하게 변했다.
보통 악마 종은 기본적인 권능으로 자신의 마력을 이용한 갑주를 두를 수 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너무 강력한 육신을 지니고 태어난 세아리스는 다른 악마 종들과 달랐다. 그녀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 때문에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뒤덮을 갑주를 구현하지 못했다.
마왕 자리까지 올라와서도 여전히 그 상태는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종족이 지닌 기본적인 권능의 결여는 매우 큰 손해였다. 세아리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
쿵!
검은 마력은 세아리스의 두 손에 집중적으로 뭉치더니 이내 장갑 형태로 변했다.
마력으로 전신을 두르지 못한다면 극히 일부만이라도 두른다면 되지 않은가.
세아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양 주먹에 마력을 이용한 갑주를 둘렀다.
“이건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존재 자체가 천지를 울리는 세아리스다. 그녀가 마력을 이용해 몇 배나 늘어난 공격을 가하게 된다면 거기에서 비롯되는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거기에 지금까지 전력을 낼 기회가 오지 않은 것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크아아아아!”
갑옷 안쪽에서 겔루키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고통에 찬 비명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겔루키스는 등 뒤에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 날개마저도 검은 마력이 움직여 갑주로 뒤덮였다.
세아리스는 양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겔루키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너무나도 강력한 힘 때문에 제대로 싸운 적 없는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집중 공격을 선보일 생각이었다.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낸다.
기운을 흘리지 않고 한 점으로 집중한다.
파앗!
겔루키스가 지면을 박차고 세아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유성처럼 변한 겔루키스는, 유성과는 다르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세아리스는 그런 겔루키스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마계에서 가장 단단한 갑주와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서로 부딪쳤다.
콰직!
&
분홍빛 두루마리 천이 길게 늘어나며 시야를 어지럽게 희롱했다. 옥사비누스는 보랏빛 마력을 일으키며 주위를 향해 방사형으로 분출시켰다. 보랏빛 마력에 닿은 풀이 빠르게 시들더니 죽어버렸다.
모든 생명체 심지어 무생물에도 영향을 주는 극독의 공격에 천마저도 빠르게 부식되어 타들어 갔다. 그 틈새를 뚫고서 양 리화는 손에 쥔 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그녀의 검은 매섭게 마력을 가르며 옥사비누스의 미간을 찔렀다.
옥사비누스는 고개를 빠르게 젖히며 공격을 피했다. 다만 그 속도가 조금 느려서 그의 뿔에 검이 살짝 스치듯 지나쳤다. 옥사비누스는 손을 휘두르며 양 리화는 멀리 밀어냈다.
‘빌어먹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옥사비누스는 속으로 매우 초조해하고 있었다. 고작 인간 하나를 상대로 예상 이상으로 시간을 너무 끌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이긴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쉽지 않았다.
‘상처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그의 본 실력이라면 지금의 양 리화를 상대로 충분히 몰아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옆구리에 남아있는 상처의 고통이 옥사비누스를 계속 괴롭혀서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 리화는 그때 이후로 무슨 훈련을 했는지 더 강해져 있었다.
“그때 당하고 나서, 노력했어.”
양 리화의 목소리가 옥사비누스의 지척에서 울렸다. 옥사비누스는 보지도 않고 사법을 사용하여 독 안개를 흩뿌렸다. 양 리화는 나비처럼 부드럽게 날며 독 안개를 흐르듯이 피했다.
“너는, 노력하지 않았구나.”
“이 건방진 인간이!”
옥사비누스는 분노를 터뜨렸지만, 그녀를 공격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그걸 여기서 꺼내야 하는 건가?’
비장의 수 중 하나인 겔루키스를 꺼낸 것만 해도 이미 큰 손해였다. 여기서 남은 패를 더 드러내야 하는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고작 이런 인간을 상대로 사용하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저 계집. 심지어 내가 급한 걸 알고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
복수전을 한다고 찾아온 것 치고는 양 리화는 과도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양 리화는 물론 옥사비누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기는 했다. 옛날의 그녀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현찬을 봐 오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상대방이 원하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
즉 말하자면.
‘상대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어. 거기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꾸미고 있는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만 해도 충분해.’
양 리화는 상대방을 빡치게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다.
‘결국, 여기서 사용해야 하는 건가…….’
옥사비누스가 그런 결심을 하는 순간 어디선가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이 양 리화를 향해 덮쳐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불구하고 양 리화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거리를 벌리며 뱀의 공격을 피했다.
“이건…….”
옥사비누스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예의 한 존재가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지다하카라고 했었나.’
악룡 <아지다하카>.
악신회 멤버 중 하나인 그는 혹시나 무슨 상황이 벌어질까 봐 마계로 넘어와서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옥사비누스가 궁지에 몰린 것을 발견하였고 멀리서 지원해 준 것이었다.
[제 도움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저 또한 노출될 위험이 처했으니까요. 지금이 기회이니 어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십시오.]
[……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옥사비누스는 날개를 펼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양 리화가 그를 쫓으려 했지만 거대한 뱀은 독니를 드러내며 양 리화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고 했다. 대체 무슨 뱀인지, 양 리화의 공격마저도 잘 먹히지 않는 놈이었다.
그녀는 결국 이를 악물고 이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왜 그러지? 조금 전부터 제대로 싸움에 집중 못 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치열한 격돌이 어느 정도 이어졌을까,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마자 파르고잔이 그런 말을 꺼냈다. 현찬은 대답 대신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쳤다. 아무리 마력과 신력으로 몸을 보호해도 파르고잔이 뿜어내는 불꽃의 열기를 전부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그만큼 파르고잔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남 이사. 신경 꺼. 우리는 어차피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 아니었어?”
“흠. 뭐 그러긴 했지. 왜. 옥사비누스 녀석이 신경 쓰여서 그래?”
“…….”
“이런. 내가 정곡을 찔렀군.”
“세아리스와 내 동료가 막으러 갔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파르고잔은 어깨를 으쓱였다.
“흠 글쎄. 나는 오히려 그들이 녀석‘들’을 막을 수 있을지가 궁금한데. 너도 알고 있지 않아? 과연 적이, 옥사비누스 혼자일 뿐일까?”
“그러는 나도 묻지. 녀석의 계획에 너마저 휘말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그걸 내가 모를까. 나도 이미 알고 있어.”
파르고잔의 대답은 상당히 놀라웠다.
“너…….”
“그 녀석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보아하니 이 기회를 틈타서 나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리려는 속셈이겠지. 내가 아니더라도 내 군단에 타격을 주려는 건 확실해.”
“그걸 알면서 지금…….”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하지?”
“뭐?”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현찬은 파르고잔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애초에, 나에게 군단이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녀석들이야. 내가 원하는 건, 그저 강한 녀석과 싸우는 것뿐이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설사 싸우다가 죽더라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파르고잔은 애초에 그런 마왕이었다.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기왕이면 싸움에 미쳤다고 해 주면 고맙겠어. 그건, 나에게 있어서 극찬의 말이거든.”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마력 파동이 세계 천지를 강하게 뒤덮으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파동의 중심에서는 보랏빛의 기류가 격하게 솟아오르며 거대한 기둥이 되었다.
“저 녀석, 벌써 시작했나 보군.”
파르고잔은 팔짱을 끼며 옥사비누스가 숨겨놓은 패를 살피려고 들었다.
“저 녀석, 대체 뭘 할 속셈이지?”
현찬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파르고잔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크하! 그 녀석! 설마 그걸 노리려는 거였나!”
“넌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알다마다. 인간. 아니, 현찬이라고 했지. 이곳의 <경계>가 어떤 곳인지 알아?”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뭐, 일단 들어봐. 예로부터 마계는 이 경계를 기점으로 서로 오랫동안 싸워오고는 했지. 그런데 말이야, 애초에 이 세계에서 마왕은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니었거든? 굳이 표현하자면 전대 마왕, 전 전대 마왕 등이 있었지. 물론 그것도 거의 수백, 수천 년 전 이야기지만.”
그리고 이 <경계>는 옛날부터 서로 반목하던 마왕들이 전쟁을 벌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죽은 마왕들이 꽤 됐겠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녀석들도, 이곳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잠깐. 그렇다는 건…….”
“아아. 저 음흉한 사령술사 녀석. 결국, 일을 내고 말았구나.”
이 땅에 묻힌 마왕의 부활.
옥사비누스가 세운 계획은 바로 그것이었다.
죽었다 하더라도 마왕이라는 이름을 단 자들이다. 그들이 생전에 사용했던 권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대충 적당히 쉬었으니까, 우리는 이제 끝을 봐야겠지?”
지금 파르고잔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앞의 사내와 결판을 짓는 것이었다.
현찬은 잠시 옥사비누스가 있는 곳을 보다가 작게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 김빠지는 반응은. 벌써 포기한 거……?”
그렇게 말하려던 파르고잔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옥사비누스의 승리였다. 저쪽의 상황은 심히 불리해졌고 곧 이어질 파멸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 현찬은 웃고 있었다.
“이쪽도 준비는 끝났어. 모셔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거든.”
“너 그게 대체 무슨 소리…….”
파르고잔이 현찬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현찬의 손에는 어느새인가 창 대신 꽃이 한 송이 쥐어져 있었다. 단순히 꽃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도저히 싸움에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파르고잔의 본능은 위험의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하다!’
현찬의 손에 쥐어진 꽃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니, 바닥에 착지한 현찬의 주위로 점점 꽃들이 자라나며 하나의 밭을 이루기 시작했다.
“역대 마왕들? 그렇다면 하나 물어보지.”
그것은 한국 신화에서도 가장 최상의 격과 힘을 지닌 설화.
아무리 높은 직위의 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으며 함부로 대항할 수조차 없는 지고의 꽃밭.
“너희 마왕들의 수와 이 <서천 꽃밭>의 꽃 개수 중 어느 게 더 많을까?”
[계약]
<자청비>.
현찬의 등 뒤로 서천 꽃밭의 실질적인 사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